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5
제415화. 박쥐 영애
“멈추시오!”
루스웨나 병사는 진영 쪽으로 다가오는 고급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적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만 방향으로 보았을 때 아군의 전령은 아니었으니, 아마 바리엘이나 클리포포드의 다른 마을에서 길을 타고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루스웨나 병사들은 일제히 창을 들어 올리며 경계하는 뜻을 보였고, 점차 가까워지는 마차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용 마차가 아니다. 마부 역시 갑옷으로 무장한 자가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인이었다.
혹여 길을 잘못 든 것인가? 하지만 마차는 바퀴를 틀지 않았고, 속도를 줄이며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히이잉!
“바리엘 마차인 것 같은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상부에 보고 올려라.”
병사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뒤쪽으로 나갈 때, 알레나라는 손수 문을 열어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손을 탁탁 턴 다음 병사들을 쭉 살펴보았다. 전쟁은 잘 모르지만, 원래 이리 허허벌판에 말뚝 박고 진지를 세우는 것인가?
“루스웨나의 왕, 에리포니 전하를 뵈러 왔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바리엘의 중앙 귀족, 세르오가의 여식 알레나라 세르오다. 전하께 전달하면 필시 들이라 할 것이니, 잔말 말고 움직이게.”
티잉!
알레나라는 그리 말하면서 작은 보석을 하나 튕겨주었다. 아주 작은 크기의 루비. 그리고 왕과 자신의 증표라도 되는 듯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는 부채.
병사는 보석을 후다닥 집은 다음, 연신 주위 눈치를 보았다. 보는 눈이 많았다. 이렇게 되면 남몰래 주머니에 넣을 수 없고, 무조건 위쪽에 보고 올릴 수밖에.
병사는 헛기침을 하며 잠시 기다리는 듯 손짓했다.
“저기, 아가씨. 저는 인제 그만…….”
“못 간다. 나 말 못 타거든.”
전쟁에 뛰어들려니 답답하고 불안하여, 마부는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알레나라는 단번에 일갈하여 마부를 조용히 시켰고, 표정 없이 서 있는 병사들과 마주했다. 어서, 어서…….
“들어오십시오. 대신 몸수색이 있을 것이니, 이는 양해해 주십시오.”
“물론.”
알레나라는 무엇이든 상관없다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간단한 몸수색 후, 병사를 따라 진영 안으로 들어가자 수십, 수백에 가까운 자들의 시선이 한번에 쏟아졌다. 다른 귀족도 아니고, 바리엘의 귀족이 들어섰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진 것이다.
전쟁이 패배로 끝날까 말까 하는 중요한 순간에, 알레나라의 등장은 꽤나 깊은 흥미를 이끌어냈다.
“이쪽입니다.”
차악!
병사가 천막을 걷어주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안쪽을 휩쓸고 돌아나왔다. 알레나라는 휘날리는 머리칼을 바로 한 채 정면을 보았고, 이내 궐련 문 에리포니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에리포니는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채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그 앞에는 이미 반쯤 먹은 술병이 놓여있었다.
“알레나라 영애. 오랜만이군.”
에리포니는 어서 오라는 듯 두 팔을 가볍게 벌리며 웃었다. 하지만 내부의 기운은 웃음과 정반대의 기온을 띠고 있었으니, 옆에 모여 있는 장군들의 낯빛이 거의 흙과 같았다.
알레나라는 드레스를 입지 않았지만, 무릎을 살짝 까딱인 다음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런 곳에서 보니 더욱 색다르네. 드레스 아닌 옷도 참 잘 어울려.”
“영광입니다. 전하.”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말이지. 제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볼까? 여긴 어찌하여 왔어? 응?”
바리엘에서, 혹은 이안이 보낸 이중 첩자는 아닐까? 에리포니의 삼백안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렇다면 그걸 역이용하여 저들 쪽에서도 무언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터.
황태자 임명식부터 내통하던 사이니, 이안이 모를 리 없다. 에리포니는 거의 반쯤 확신하여 알레나라를 떠보듯 물어보았다.
“제 서신이 전하께 잘 전달되었는지 걱정되어 이리 직접 왔습니다. 전하의 강녕함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작은 마음이 큰 걸음을 만들었지요.”
“아아. 서신.”
에리포니는 엘더트를 쳐다보았다. 서신, 몇 번이나 받았더라? 중요한 내용이 없는 것들은 엘더트 선에서 잘라냈기 때문에, 에리포니는 알레나라가 정확히 얼마나 많은 접촉을 시도했는지 알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엘더트가 눈을 대여섯 번 깜빡였다. 많이도 보냈군, 에리포니는 다시금 연기를 흡입하며 웃었다.
“잘 닿았지. 물론.”
“전하-”
“그런데 말이지, 알레나라 영애. 황태자의 임명식 때와 지금의 우리 사이는 꽤나 많이 달라졌어. 보다시피 이곳은 대리석 조각이 있는 곳이 아니라 사체가 쌓여가는 전장이고, 바리엘과 루스웨나의 관계 역시 변화가 있었거든. 나는 솔직히 그대가 나를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네.”
알레나라가 잠시 멈칫거렸다. 딸깍, 고장 난 시계가 갑자기 움직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여기서 자신이 루스웨나의 망명을 다시금 제안한다고 한들, 에리포니가 쉬이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면 나을 터.
혹여…….
“바리엘에서는 그대가 여기 있는 걸 아는가?”
지금까지 서신 보냈던 것을 증거로 하여 협박 용도로 쓴다면? 자신은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에리포니를 만났던 밤이 너무 달콤하여 자신의 발끝부터 썩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음이라.
알레나라는 마른 침을 삼키며 표정을 관리했다.
“아니요. 제 오라버니가 지원군을 이끌고 클리포포드 장벽으로 들어갔고, 저는 중간에 이탈하여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고 있겠지요.”
“지원군? 얼마나?”
에리포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안 그래도 지금 버고스 측의 실책으로 인하여 전쟁이 끝나네 마네 눈치 보고 있건만, 지원군? 에리포니는 잠시 궐련을 질겅이더니 이내 탁자에 비벼서 꺼버렸다.
“알레나라 영애. 지원군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글쎄요. 지원군의 책임자는 오라버니이기에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이쪽으로 오면 에리포니 전하를 뵐 수 있다는 생각에 함께한 것이니까요.”
“천 단위인가?”
알레나라가 싱긋 웃었다. 똑딱똑딱, 고장 난 시계가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치로 보아하니, 에리포니는 전쟁을 이대로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자신의 행위가 스스로를 옥죄는 약점이 될 수 있어도, 동시에 에리포니에게는 기회였다. 언제든 자신의 편으로 들어설 수 있는 지원군이, 클리포포드 장벽 안으로 진입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장벽 안에서 혼란이 일어난다면, 버고스의 왕이 잡혀있든 말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무조건 진격.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진격.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싸움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사활은 물론, 모든 걸 베팅할 기회 말이다.
“전하.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라버니에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리하면 오라버니가 제게 물을 것입니다. 어딜 다녀왔는지요.”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확답을 내어달라. 알레나라는 그리 이르고 있었다. 루스웨나의 왕실 권한 혹은 그에 준하는 작위를 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행적을 빌미로 삼아 저를 바닥까지 추락시킬 것인지.
에리포니는 머리칼을 한쪽으로 넘기며 알레나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 나라를 등진 자를 어찌하여 믿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귀화를 받아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쓸 만한 카드 패인 것 같았다.
“그리하면 루스웨나의 왕, 에리포니를 직접 뵈었노라 전하라.”
그래. 그렇게 루스웨나로 오고 싶다면 허락하마. 에리포니의 승인이 떨어지자, 엘더트는 슬쩍 고개를 돌렸고 알레나라는 고고히 허리를 숙였다.
“예. 전하. 혹 오라버니께 전할 말씀이 또 있으실까요?”
“알레나라. 이는 그대의 오라비뿐만 아니라, 내 영애에게도 직접 바라는 바인데. 어찌, 이행 가능하겠는가?”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이안 히엘로를 없애고 싶은데.”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만 해도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닌데, 다른 이도 아니고 이안 히엘로를? 마법사를? 제국에서 제일 신임받으며 현 실세로 불리는 장관을?
알레나라가 당황하여 대답하지 못하자, 에리포니는 친히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키 차이가 워낙에 나는지라, 에리포니의 허리가 유연하게 굽어졌다.
“없앨 수 없다면, 그 마력이라도 일시적으로 잡아두었으면 해. 이드갈로 만든 단검을 내어주마. 이안의 피를 두 눈으로 직접 본 뒤, 이쪽으로 오도록 해. 그대의 오라비가 장벽 안쪽을 장악해주면 더더욱 좋겠어.”
알레나라는 제 어깨를 꽉 움켜쥐는 에리포니의 악력에서 비장함을 비롯한 간절함을 느꼈다. 이것 봐라? 알레나라는 그녀의 손등에 감히 손을 얹은 다음, 한껏 안타까운 투로 대답했다.
“예. 전하. 제가 최대한 힘써보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안쪽의 상황을 상세히 전했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전하, 혹시 협상 테이블이 필요하신가요?”
“현재로서 제일 좋은 것은 이안 히엘로를 비롯한 마법사들의 부재다. 바리엘에서 분명 루스웨나에도 책임을 묻고자 할 터인데, 그것이 협상 테이블에서 다뤄질 만큼 가볍지 않을 게라”
“그렇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전령에게 들었던 것보다 클리포포드 측의 기세가 더욱 상당한가 보다. 휴전 중인 지금, 줄만 잘 탄다면 바리엘 측에서도 공을 세울 수 있고 루스웨나 측에서도 공을 세울 수 있다.
알레나라는 이안 암살 대신 서로 간의 입장 사이에 서 있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돌고 돌아 협상 테이블에 앉을 거, 자신이 주도하여 재빠르게 만나면 좋지 않겠나? 요점은, 바리엘 측에 루스웨나와의 친분을 담백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차악!
“전하!”
알레나라가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써냈다 지우는 때였다. 천막 밖에서 다급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들은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리포니는 알레나라에게서 떨어진 다음 활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저, 저 멀리 뭔가가 이상합니다.”
“이상하긴, 대체 무엇이?”
“직접 보심이 좋겠습니다.”
에리포니는 망원경을 들고서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때, 대지가 아주 천천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착각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다른 자들 역시 멈칫거리며 무언가 이상한 징조를 눈치챘다.
에리포니는 병사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고정했다. 이들은 언덕바지 위쪽에 있었고, 포도 농사를 주로 하는 클리포포드 대지인지라 사방이 훤했다. 하여, 저 멀리 병사가 말한 의문의 연기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게 뭐지?”
회색빛의 희미한 연기.
마치 갈라진 대지 틈에서 새어나오는 용오름과 비슷했다. 에리포니는 난생처음 보는 자연현상에 인상을 찌푸렸고, 이내 마법사들을 불렀다.
“저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니요. 자, 잘 모르겠습니다.”
루스웨나 마법사들 역시 균열의 시초를 본 적은 없었다. 오랜 세월 이어온 문명의 수혜자들이 한순간에 ‘한낱 인간’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그걸 본 자이라가 왕께 일렀다.
“전하. 무엇이 되었든 왕궁에 이를 알리는 게 좋겠습니다. 하늘길을 내달리는 것만큼 빠른 길이 없으니, 저희가 소식을 전언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직 정찰 간 마법사가 돌아오지 않았다.”
“저만이라도 먼저 보내주세요. 온 힘을 다하여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힐끔, 알레나라를 보았다. 초면이지만 바리엘에서 온 영애가 분명했다. 영애와 왕, 둘다 전쟁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명명백백해 보이니, 에리포니의 명령만 떨어진다면 왕궁으로 가 가족들을 구하고 바리엘로 망명하리라. 그리고 저 여인에 대한 언급도 이안 경에게 해주어야겠다.
한편, 알레나라는 마법사들을 찬찬히 살피며 그들의 인상착의를 머릿속에 꼭꼭 새겨두었으니.
‘마법사의 수를 기억하자. 대화로 보니, 왕궁에 지원군을 요청할 요령인가 본데, 그것과 함께 마법사 두엇이 자리를 비웠다고 전언하면 되겠어. 바리엘 쪽의 신임은 그것으로 얻으리라.’
알레나라는 자이라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고, 자이라는 이를 무덤덤하게 받아냈다. 같은 변질자인데, 어찌하여 저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이는 벌써부터 자신의 균형 추가 바리엘 쪽으로 옮겨졌다는 뜻일까?
자이라는 알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