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6
제416화. 으스러지다
똑똑.
이안을 부르는 마법사의 인기척이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다몬 앞에서 격한 감정을 보였고, 무엇보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안에서 들어오라는 헤일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법사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 이안의 상태를 살폈다. 식은땀에 젖어 더욱 창백해 보이는 모습.
이안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안 님. 세르오 가문이 왔습니다.”
“세르오?”
“예. 지원군이라 하는데, 현재 클리포포드 장벽 앞까지 당도했습니다. 노아 왕자께서 이안 님 확인을 받아보라 하셔서요. 상황이 마무리됐다고 한들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보낼 수도 없고… 아무래도 바리엘에서 온 것이라면 클리포포드 측에서는 더욱 신경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젖은 머리칼을 넘겼다.
원래 전쟁 중 귀족들의 참전은 권장되는 바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근본으로 하여, 그들이 지닌 사병은 적은 수라도 제국에 큰 도움이 되고, 나아가 제국민들의 삶을 지킬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이득을 나눠 먹고자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빛과 어둠처럼, 흘러내리는 피가 넘쳐나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커질수록 누군가의 창고에는 금괴가 넘쳐나고 만족스러운 웃음이 커질 터라.
하지만 이번 전쟁은 조금 예외적인 면이 있었다.
“세르오가 왜?”
헤일 역시 그걸 알고 있는지 의아히 물었다.
우선 이는 바리엘의 전쟁이 아니라, 클리포포드와 버고스의 전쟁. 게다가 이안을 비롯한 마법부 대부분의 전력이 지원 명목으로 와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당연히 바리엘의 황궁이 비어있음을 걱정하여, 중앙 귀족들은 수도를 지키는 게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처사 아니겠는가?
마법사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걸 감히 저가 어찌 알겠냐면서.
“혹시 알레나라 영애도 왔던가?”
“알레나라 영애요? 세르오 가의 여식 말입니까?”
굳이 이해하려 하자면 가능은 했다. 몰락해 가는 세르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부담감이 그들을 이쪽으로 이끈 것이겠지. 아마 세르오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건, 그만의 전쟁일 터라.
마법사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르오 경만 뵈어서요. 영애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병력은 꽤 됩니다. 1천 안팎일 것 같은데, 클리포포드에서 이들을 접대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이안 님이 중간에서 중재해주심이 어떨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세르오에게 황제 폐하의 인장이 있는지 물어라.”
“폐하의 인장이요?”
“출정 인장.”
공식적으로 중앙 귀족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바리엘의 특별 지원군이라는 걸 뜻했으며, 나아가 귀족에게는 일종의 증표였다. 종전 시 그들의 공로를 황제가 기억할 것이고, 합당한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는.
이안은 되었다는 듯 손짓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사람 말을 거치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세르오를 맞이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안 님.”
“괘, 괜찮으십니까?”
고작 몸을 조금 일으켰음에도 크게 휘청이는 몸. 이안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은 흔들려서는 안 될 사람인데, 헤일과 마법사가 보는 앞에서 좀처럼 쉬이 되질 않았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게 이토록 답답하고 제 숨을 무겁게 할 줄이야.
하지만 그때, 헤일이 아무렇지 않게 이안의 팔을 잡아주며 부축했다.
“잡으십시오. 이안 님.”
잡을 수 있으면 잡고, 기댈 수 있으면 기대는 게 무엇 어려운 일이라고 자신의 상관께서는 홀로 서려 하시나.
자연스러운 헤일의 배려에 이안이 천천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법사 역시 문을 활짝 열어주며 그가 편히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바리엘에 돌아가서도 이리되면, 헤일. 내 저번에 말했던 것을 유념하라.”
“싫습니다. 저 분명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드갈로 인한 효과이니, 시간 지나면 분명히 돌아옵니다. 다들 그러한데 이안 님만 안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차기 마법부 수장에 관한 언질은 듣기도 싫다며, 헤일은 먼 산만 보았다.
이안이 거동에 신중을 기하며 장벽 위로 올라서자, 쭉 늘어선 천인대(千人隊) 규모의 병사들이 보였다. 곳곳에서 휘날리는 바리엘 국기와 세르오가의 인장. 세르오는 이안의 금발 머리칼을 단번에 알아채고 손을 흔들었다.
“이안 경! 날세! 세르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마법사들이 타국에서 고군분투하는데 내 중앙에 가만있을 수 없어서 말이지. 그런데 역시 이안 경일세.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들었어. 내 여기까지 먼 걸음 한 게 아쉬워서 그런데, 뒷수습이라도 손을 보태고 싶네만.”
“폐하의 인장은요?”
“어?”
“폐하의 인장이 없다면 전하의 인장이라도 보여주십시오.”
세르오가 멈칫거렸다. 황제는 고사하고 황태자도 못 만난 채 내려온 것인데, 그걸 요구하다니. 세르오는 팔짱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용병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소리쳤다.
“급하게 내려온 터라 내 황실의 축원을 얻지 못하였네. 이안 경. 내 그대와는 인연이 깊지 않나? 한시라도 빠르게 도움이 되고픈 내 마음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어.”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세르오 경께서 저를, 그리고 마법부를 이리 생각해주고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이거, 확실히 역경 뒤에 얻는 것이 있는 법이라. 세르오 경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것 같군요.”
이안은 장벽에 기댄 채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 그러면 어서 문을 열어주어야지? 세르오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으나, 이안은 움직임이 없다.
“하지만 세르오 경. 그대들이 장벽으로 들어오면 클리포포드 입장에서는 성대히 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연히 바리엘의 지원군을 맞이하는 것이니까요. 현재 상황을 갈무리하기에도 정신이 없는지라, 세르오 경의 입성은 정중히 제 선에서 받기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클리포포드를 도울 길인 것 같은데요.”
“어? 그, 일손이 부족하지 않나?”
“전혀요. 클리포포드의 큰 장점 중 하나가 많은 인구수 아닙니까. 저도 내일 아침 일찍 바리엘로 떠나려 했습니다. 오신 김에 저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세르오 경과 함께라면 귀국하는 길이 안전하여, 제 마음 편히 쉴 수 있겠습니다. 마차는 있으신가요?”
마차. 전투용 마차가 아니라 장거리용 마차를 의미했다. 이것을 갖고 왔다면 알레나라가 동행했을 가능성이 컸으니, 이안은 자연스럽게 세르오를 떠봤다.
그리고 세르오는, 아주 쉽게 떠지는 자였다.
“마차는 한 대밖에 없는데.”
흐음. 이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알레나라도 왔구나. 한데 지금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갈림길에서 루스웨나 쪽으로 틀었을 게다. 단순히 가문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루스웨나 쪽으로 길을 튼 것이다. 황태자 임명식 때부터 간보던 것이, 알레나라의 입맛에 아주 딱 맞았나 보다.
헤일이 이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속삭였다.
“어찌할까요, 이안 님. 장벽을 열까요? 사실 환대하는 것만 아니면 클리포포드 측에서는 일손이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저들을 절대 장벽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
“아. 예. 알겠습니다. 아래쪽에는 그리 전하겠습니다.”
헤일은 가타부타 연유를 묻지 않고 바로 아래쪽 계단에 수신호를 주었다. 장벽을 열기 위해 대기하던 병사들이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어디선가 들리는 굉음.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바닥에 꽂혀있던 깃대가 좌우로 천천히 흔들렸으며, 병사들이 걸어둔 투구와 옷가지들이 달그락거렸다.
이안은 장벽에서 몸을 뗀 다음 소리 난 쪽을 바라봤다.
콰아앙!
“무, 무슨 소리입니까? 이거?”
“루스웨나 쪽에서 지원군이라도 온 걸까요?”
“아니, 왕궁쪽에서 난 소리였는데.”
땅울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진을 몇 번 겪긴 했지만, 대지가 흔들리는 것 외 무언가 폭발하는 것 같은 느낌은 처음이었으니.
병사들은 두려움에 질린 낯으로 몸을 움츠렸고, 헤일은 단번에 창공으로 뛰어올라 주위를 살폈다.
촤아아악!
“이안 님! 저 멀리, 용오름이 오르고 있습니다!”
용오름이라니. 세르오는 믿을 수 없어서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또한 선선한데 어찌하여 용오름이 오른단 말인가?
이안은 문득 자신의 손에서 파훼된 이드갈 펜던트를 떠올렸다. 당시 계속해서 쏟아지던 자신의 마력도.
“균열이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순리. 거기에 맞물려 지각의 자국이 균열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안은 클리포포드 측에 서둘러 지시했다. 그때까지도 지진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듯, 조금씩 조금씩 그 힘을 더해가며.
“균열 인근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노아 왕자님께 전하라.”
“아. 네넵! 알겠습니다.”
“이안 님. 저희가 정찰 가볼까요?”
마법사 중 한 명이 물었으나,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다몬 왕을 생포한 것과 별개로 아직 그들은 적군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북쪽 지역의 지원군과 루스웨나 그리고 기가 막히게 찾아온 세르오까지.
여기서 등을 돌렸다가는 적들에게 빈틈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무엇보다 균열이 일어나는 건 클리포포드 장벽 안쪽, 왕궁의 관할이었다. 이안은 아코렐라를 소환했다.
“아코렐라. 부하 한 명을 데리고 가서 용오름을 조사하도록 하라. 그 크기와 힘 그리고 지각 변동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상세히 보고하여 앞으로 균열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도록 해.”
“아코렐라 대장!”
“예? 예예. 들었슴다! 저 여기 있슴다!”
아코렐라는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튀어나왔다. 베릭과 잘 어울리더니, 아탄 족장 에프디람과도 별 허물없이 한 상에서 밥 먹었나 보다.
에프디람 또한 고기 한 덩이를 손에 쥔 채 바깥으로 나왔다.
“음. 좋은 냄새.”
균열로 느껴지는 마물의 냄새. 그녀가 음미하여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베릭은 자신도 모르게 코를 움켜쥐었다. 그래. 부정할 수 없다. 식당에서 나는 고기 냄새와는 다른, 달작지근한 무언가가 은근히 풍기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를 인정하면 자신이 에프디람과 같은 정체성이요, 이는 바리엘 그리고 이안과 함께할 길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 아닌가? 몸의 반응이 마음같지 않아 짜증이 솟았다.
쿠웅!
쿠구구궁!
“으아아아!”
“저, 점점 심해집니다!”
“다들 거기서 나와! 무너지면 큰일 난다고! 넓은 곳으로, 이쪽! 이쪽!”
콰앙! 두두두!
대지가 크게 꿈틀거렸다. 인간을 비롯한 그들이 세운 억겁의 세월 흔적 역시 불가항력으로 인해 뒤틀렸으며,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푸른 하늘이 잡아먹히는 것처럼, 그들이 알던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쿠웅!
콰아아앙!
마법사들은 이안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하늘로 띄웠다. 시야가 점점 높아질수록 클리포포드 안쪽, 소란의 근원지가 보였다. 건물이 기울고, 사람들은 뜨거운 물이라도 끼얹은 개미마냥 이리저리 날뛰며 질겁해댔다.
그리고 용오름이 새어나오는 틈 안쪽으로 용암 같은 게 이글거리는 것이…….
“저게…….”
“이안 경! 무슨 일인가? 문 좀 열어주게!”
저게 들끓어 세상으로 흘러넘치면, 그것이 곧 마물이 된다.
이안은 언덕바지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루스웨나 측과 영문 모른 채 모여있는 버고스 측을 번갈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번 으스러진 것은 되돌릴 수 없다.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문제만이 남아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