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7
제417화. 토올룬
침대에 나른히 누워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암막 커튼으로 인하여 정오의 햇살은 들어오지 않았으나, 미처 막지 못한 거리의 소란이 사내의 단잠을 깨운 것이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자연스럽게 담뱃대에 손을 뻗었다. 작은 인기척을 감지한 그의 부하가 바깥에서 보고했다.
“러더포드 님. 기침하셨습니까?”
“어.”
찰칵.
허락과도 같은 그의 대답에 문이 열렸다. 그러자 환하게 쏟아지는 바깥의 빛. 부하는 침대 밑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술병 그리고 흰 가루 따위를 찬찬히 살펴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밤사이 별다르게 달라진 건 없었다. 러더포드가 담뱃대를 문 채 다시 베개에 몸을 기대자, 부하는 불을 붙여주며 일렀다.
“밤사이 ‘그’ 이드갈이 깨졌습니다.”
불빛으로 인해 더욱 환하게 드러나는 러더포드의 모습. 검고 긴 생머리, 수려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거친 상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러더포드는 눈썹을 까딱이며 되물었다.
“‘그’ 이드갈?”
“예.”
“봐봐.”
러더포드의 명령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부하가 안주머니에서 작은 펜던트를 꺼냈다. 흰 손수건에 싸여 있었는데, 조각난 것으로도 모자라 거의 박살 난 수준이었다. 러더포드는 웃음을 머금으며 손끝으로 그걸 만지작거렸다.
“진짜 주인을 만났나보네.”
금빛 머리칼의 녹안이 아름다웠던 아이. 자신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게 얼마나 위대하고 환상적인 힘인지 알지 못했던 어리석은 아이.
러더포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고, 이내 미소와 함께 뱉어냈다. 그는 가운만 걸친 채 벌떡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촤아악!
토올룬국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색색의 깃발이 꽂혀있는 원형의 돔들이 쭉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사이 골목길에는 지하신을 비롯하여 수만 가지 잡신 믿는 자들의 기도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러더포드는 창틀에 기대어 아래쪽을 훑어보았다.
“지하신 부를 거면 지하에서나 하지, 왜 밖에서들 저러는지 몰라. 안 그래?”
“잠을 설치셨습니까?”
“어. 근데 기분은 좋아. 일어나자마자 선물 받은 것 같네.”
러더포드는 싱긋 웃으며 펜던트 조각을 튕겨댔다. 그것은 어디론가로 굴러가 사라졌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깨진 이드갈은 존재 자체만으로 그 역할을 다한 것이기에.
“준비하자.”
“예. 러더포드 님.”
“클리포포드랑 루스웨나 쪽으로 갔던 놈들은 계속 보고가 올라오고 있나?”
“클리포포드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마지막입니다. 북쪽 소수민족 측과 버고스. 그리고 루스웨나와 클리포포드, 바리엘이 참전하였다고 합니다.”
“이드갈이 깨진 것으로 보아, 이안이 다몬에게 닿았다고 보는 게 맞고. 그렇다면 버고스 측은 체크메이트당했네?”
타악.
러더포드는 창밖으로 담뱃재를 가볍게 털어냈다. 옆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더욱 푸르게 짙어지는 것 같았다.
언제나 생각에 잠길 때면 그의 눈동자엔 깊고 푸른 대양(大洋)이 떠오른다. 부하는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었지만, 혹여 그런 세계가 있다면 필시 러더포드의 눈동자와 닮아있을 것이라 여겼다.
“다몬이 이렇게 나오면 수지 타산이 조금 아쉬운데. 아직 못 받은 게 많잖아.”
“예. 금과 은을 포함하여 총 금화 오만 닢 정도가 누락됩니다. 버고스 측의 흐름을 살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거 영업 비밀이라서 아무한테나 막 나가면 안 돼. 아쉬워도 다몬을 고쳐 쓰는 게 맞지. 회귀법 거의 다 찾았다고 은밀히 전언할 방법을 찾아와. 그 전에 죽으면 어쩔 수 없다.”
러더포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문을 좌우로 젖혔다.
이안이 마력을 쏟아내는 순간이 드디어 왔다. 거대한 우주를 품고 있는 아이가 세상을 뒤흔들었으니, 이제는 바리엘 남쪽, 클리포포드 지대는 균열이 지배하리라.
그리하면 모두가 이드갈을 원할 것이요, 젖줄을 쥔 자신은 자연스럽게 제국으로 스며들 수 있겠지. 오랜 숙원이었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똑똑.
“러더포드 님. 식사는 어찌할까요?”
“들여. 이렇게 좋은 날 끼니를 걸러서야 되겠나?”
그의 허락에 문이 다시금 열렸다. 고급 여관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음식을 옮기는 와중,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 자. 러더포드는 새로운 와인의 마개를 따며, 그에게 들어 보였다.
“클라크. 희소식이 있다.”
클라크. 바리엘의 변경, 메렐로프 가문의 후계자를 호위로 삼아 이역만리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기이한 운명의 사내.
러더포드의 축배에 클라크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희소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그의 ‘주인’이 희소식이라 하면 그리할 것이다.
“바리엘로 돌아갈 것이다.”
“……!”
“가고 싶어 했잖아. 그, 이름이 뭐더라? 네가 사랑해 마지않던 여인이 바리엘의 메렐로프에 있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내가 모르겠니?”
노예가 가문의 후계자를 손수 목 졸라 죽였는데, 그걸 어찌 모르겠나? 조금만 이해관계를 따져보아도 쉬이 나오는 결론이었다.
지하신을 믿었던 다이브 메렐로프가 모종의 이유로 이쪽 토올룬까지 밀려왔지만, 그는 언젠가 제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 했을 것이라. 클라크는 그걸 바라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는 제 손으로 주인을 죽일 수밖에. 리엔 부인이 가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오롯이 그녀만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돌아가면 네 몸값은 리엔 부인에게 청구하면 되겠어. 나 장사치인 거 알지? 한 푼도 남김없이 받아낼 것이니, 부인 만나면 말이나 잘하거라.”
토올룬 국법에 살인은 살인으로 처벌받게 된다. 하지만 클라크와 그 주인은 외국인인지라 예외적으로 태형을 시행하려고 했거늘, 그때 구해준 것이 러더포드다.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장사치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이유로 말이다.
클리크는 무뚝뚝하게 그릇을 옮겼지만, 가슴이 쿵쿵 뛰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돌아와.’
마지막에 보았던 리엔 부인의 모든 것이 아직 선명했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죽어서나 다시 만나겠거니 했는데, 러더포드의 말대로 정말 희소식은 희소식이었다.
러더포드는 클라크의 입매에서 아주 작은 미소를 감지해내며, 포도주를 입에 머금었다.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순진한 것인지. 감옥에 갇혀있던 수많은 자들 중 어찌하여 자신이 클라크를 골랐는지, 아직 저자는 모르는 듯했다.
러더포드는 나이프를 쥔 채로 멈칫거렸다.
“아. 그 왕 만났던 애들은-”
“예.”
“바로 없애버리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비빌 언덕이 있으면 맛이 안 살잖아? 내가 직접 갈 때까지, 마음 좀 살랑살랑하게 만들어 보자고. 응?”
“알겠습니다.”
다몬과 에리포니에게 제안을 건네주었던 자신의 부하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돌아오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버고스와 루스웨나에서 러더포드의 상단원이 의문의 죽음쯤은 당해줘야, 자신들도 비집을 틈이 생길 것 아닌가?
전쟁의 명분이라는 것이 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일종의 보험이었다. 나중에 어찌 될지는 몰라도, 우선 가능성은 모두 열어두는 것이 편할 테니까.
러더포드의 명령에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틀었고, 이내 클라크에게 눈짓했다. 같이 나가자는 신호였다.
달깍.
“클라크.”
“예?”
“돌아갔는데 여인이 없거나, 다른 자와 함께 있으면 어쩔래?”
클라크는 문손잡이를 잡고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것이 사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딱 한 번만이라도 리엔을 보게만 해달라 기도했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그녀와 함께하게 해달라 할 수는 없었다.
토올룬. 이곳은 신들의 나라. 무수히 많은 신들이 골목에 숨어 인간들의 희망과 욕심을 좀먹는 나라. 클라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끼이익.
클라크는 별다른 대답 없이 문을 닫았고, 러더포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놈 저거, 생각보다 쓸 만하다며.
사람의 가치는 내면의 원동력이 정하는데, 저만큼 진하고 강한 의지는 러더포드 입장에서도 환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준다면.
푸욱!
“재밌겠네.”
러더포드가 나이프로 스테이크의 정가운데를 찔렀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심장과 같았거늘, 러더포드는 되려 그게 마음에 드는 듯했다.
‘곧 보자고. 이안.’
원래라면 가을쯤에나 들어갈 생각이었건만, 일이 재미있게 돌아갔다. 황궁에서 내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모든 게 어긋나는 듯하였지만, 결국에는 제자리를 찾아가는 이 쾌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라.
러더포드는 싱긋 웃으며 고기의 살점을 베어냈다. 그 칼질을 따라 익지 않은 핏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 * *
쿠구구궁!
콰아앙!
“대피해! 대피!”
“밖으로 당장 나오세요! 물건 챙길 시간 없습니다!”
“저, 저게 다 뭐랍니까? 가, 갑자기-”
“묻다가 죽겠네, 이 사람아! 빨리 뛰어!”
“엄마! 엄마아!”
“도와주세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발이 끼었어요!”
클리포포드의 수도, 프로드호나의 서쪽 부근은 난데없는 재앙으로 인하여 아비규환이었다.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리다 못해 폭삭 주저앉았고, 대지가 갈라지며 녹음 졌던 포도밭은 사라졌다. 그 틈으로 이글이글 솟구치는 열기. 발을 헛디뎌 안으로 떨어진 자들은 비명 지를 새 없이 녹아내렸다.
인근에 화산도 없는데, 대체 저 용암은 어디서 끓어올랐단 말인가? 한평생 클리포포드에서 살았던 자들은 난데없는 상황에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곳이 정녕 자신들의 고향이 맞나? 이곳이 정녕 자신들이 알던 그곳이 맞나?
구구궁!
촤아아악!
“으아악!”
대지는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갈라져만 갔다. 한 명이 휘청이며 그 아래로 떨어졌고, 이내 물길이 튀어 오르듯 용암이 솟구쳤다.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던 자의 시선이 천천히 하늘로 따라 올라갔고, 용암은 공기와 맞닿으면서 잿더미로 변했다.
모습이 점점 갖춰져 갔다. 형태는 없되, 존재만 하는 그것. 균열에서 제일 먼저 생성되는 마물, 더스트.
“이, 이, 이…….”
놀란 자가 뒤로 넘어지며 눈을 크게 떴다. 정확한 정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마물인 것은 틀림없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더스트가 바람을 따라 몸을 흔들고, 자신의 탄생을 자축하며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순간.
지이잉.
퍼어어엉!
마력구가 놈의 몸통을 정확히 뚫고 지나갔다. 그 궤를 따라 흩날리는 잿더미.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그걸 바라보다 고개를 틀었다.
창공에 사람이 있다. 마법사다.
필시 장벽에서 저들과 함께 전투하였다는 그 마법사들.
“가만있지 마시오! 계속 움직이세요!”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뭣들 합니까?”
“어, 어! 가, 가자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천천히! 질서를 지키며 움직이세요! 앞쪽은 길이 좁습니다!”
그 틈을 타서 왕궁 병사들이 피난을 계속 진행했다. 균열 아래로 빠지려는 자들을 구하기도 하고, 더스트에 맞서 용기 있게 검을 휘두르는 자들도 있었다.
이는 균열의 시작을 알리는 하급 중의 하급 마물이라. 사실상 마물이라 하기에도 우습고, 그 증상이라 보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촤아아악!
마법사들은 계속되는 지진 그리고 점점 달구어지는 열기 따위를 상세히 살펴보며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이안에게 빠짐없이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진짜 균열이다.”
그들 역시 살면서 균열은 처음 보는 현상. 호기심 반, 두려움 반 섞인 시선으로 갈라지는 대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어디선가 느껴지는 남다른 움직임.
타닥타닥!
“보자, 보자! 잔치 열렸냐!?”
에프디람이다. 그녀는 부하들과 함께 균열 가까이 접근하는 중이었고, 마법사들이 이를 막아서려고 하는 순간.
촤아악!
“이안이가 뭐라 할 때까지 가만있으라고.”
베릭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에프디람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검을 어깨 뒤로 둘러멨다.
“지랄하네. 입에 고인 침이나 닦고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