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8
제418화. 회담
왕은 절망했다.
자신의 왕국이 갈라지는 것을 보며 심장이 갈라지는 것을 느꼈고, 백성들의 울부짖음으로 귀가 먹어버릴 것만 같았다. 왕이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징이 되는 터라.
제 아들을 전장에 내세운 채 이리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넘어진 담벼락 하나 세울 수 없고, 무너진 흙더미를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겪는 무력감이었다. 두려움에 앞서 덮쳐오는 무력감. 클리포포드의 선왕들께서 자신을 보고 계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왕이 사념에 잠겨 있자, 메이가 무엄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전하! 이리 계시면 아니 됩니다!”
지진의 여파는 왕궁에까지 닿았다. 진동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더 큰 지진이 그들을 덮칠 게 분명했다. 그들은 왕을 에워싼 채 궁에서 제일 넓은 정원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왕이 몸을 돌린 곳은 궁을 나서는 성문. 혹여 문이 뒤틀려 봉쇄될까 봐 병사들은 문을 반쯤 열어두고 있었다.
“전하!”
타닥타닥!
그 사잇길로 내달리는 왕. 퉁퉁한 몸으로 인해 그리 빠르지 않았으나, 신하들은 붙잡을 수 없었다. 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내오는 것으로 왕의 뒤를 따랐다.
“전하! 말을 타고 가십시오!”
“이쪽입니다! 서쪽 길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남은 자들은 왕자님들과 공주님들을 지켜라!”
“정원으로 대피해! 상처 하나 없이 모셔라!”
계속 흔들리는 대지 탓에 말의 발돋움이 불안정했다. 하지만 왕은 고삐를 놓지 않았으며, 이내 낯익은 자를 발견했다. 이안의 수행원이자, 왕궁의 음식이란 음식은 다 거덜 내던 붉은 머리칼의 호인(胡人).
“베릭?”
“어? 여긴 왜 왔어요? 궁에나 있지.”
왕은 재빨리 그와 대치하고 있는 에프디람을 살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베릭과 적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이안의 적. 나아가 클리포포드의 적이다.
왕의 호위기사들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고쳐 쥐자, 에프디람은 귀찮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뭐? 한번 해보자고?”
“클리포포드인은 아닌 것 같은데, 정체를 밝혀라!”
“아저씨, 쟤 뽀글머리, 미친 애임.”
“너만 할까.”
지이이잉. 지잉.
촤아악!
베릭이 끼어들며 에프디람에게 손가락질하자, 그녀는 그 손을 자를 듯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곳곳에서 솟구치는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으며, 그 바람을 타고 용암과 같은 불티들이 휘날렸다.
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멈추어라! 멈춰!”
왕의 명령에 기사들은 멈추었지만, 두 망나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서로 진짜 잡아 죽일 듯 살벌한 합을 이어갔으니.
싸움이 길어질수록 베릭이 뒤로 밀리는 듯하였으나, 맞먹는 기운만은 확연했다.
“전하. 저 여인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지가 더 흔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기사의 말이 옳았다. 에프디람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거기에 감응하는 것처럼 균열 속 무언가가 일렁였다.
왕은 두 사람의 싸움에 가까이 다가가며 다시 소리쳤다. 명령이라기보다, 부탁에 가까운 절규였다.
“그만! 그만하라니까!”
퍼어엉!
촤악!
그때, 에프디람의 볼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무언가. 피가 배어나며 그 흔적을 확실히 남겼다.
에프디람은 손바닥으로 그것을 문지르며 공격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일 대장이었다. 그는 과녁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한쪽 눈을 감고 있었다.
“뭔데, 뒤에서 통수 치기 있나?”
“통수가 아니라, 조용히 좀 하라는 경고지. 칠 거였으면 볼이 아니라 네 머리통을 뚫었을 게다.”
“말로는 뭘 못하리. 나, 조용히 하고 있거든? 나대는 건 이놈하고, 저 아저씨지.”
“무, 무엄하다! 이놈!”
“므, 므엄하다! 이느음!”
발끈한 기사의 말에 에프디람이 깔깔 웃으며 따라 했다. 거울 치료라는 게 이런 것인가. 베릭은 살짝 충격 먹은 얼굴로, 그녀를 진실로 미친 자 보듯 쳐다보았다.
헤일이 천천히 창공에서 내려와,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 다몬 왕의 생포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그래. 이안 경의 활약 덕분에 클리포포드에서는 한시름 놓았다네. 그런데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때 말했던 균열, 그것이 맞나? 하지만 마법부에서는 최대한 힘을 제한한다고 하였는데, 어찌…….”
“걱정스러운 것도 많으시고, 궁금한 것도 많으시리라 사료됩니다. 이안 님이 전하를 장벽으로 모시면 좋겠다고 전언하라 명하였습니다. 루스웨나와 저 미친 자의 부하들을 비롯한 버고스군이 아직 대치 중인지라, 쉬이 이쪽으로 물러설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전선을 지키고 서 있던 자들이 뒤로 물러서면, 작은 공백이 생긴다. 그것이야말로 기회였다. 버고스군의 전멸도 아니고, 고작 다몬 왕의 목숨 하나만을 밧줄로 묶어둔 상황이 아닌가.
이안의 우려를 단박에 이해한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내 클리포포드의 왕으로서 더 이상 궁에서만 있을 수는 없겠다. 균열에 대해 함께 논의해보는 게 최선이라.”
“그래! 가라! 난 여기서 먹을 거 있나 볼 테니까!”
에프디람이 그리 말하는 순간, 베릭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이 틀어지며 검이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지나갔다.
놀란 에프디람이 베릭을 쳐다보자, 베릭은 가운뎃손가락을 삐죽 올리며 대꾸했다.
“말했지. 이안이 허락 있을 때까지 짜져있으라고.”
“이 새끼가 뒤지려고…….”
“너, 앞으로 앞통수도 조심해야겠다?”
“보자 보자 하니까-!”
“보지 마, 시발아!”
채앵! 챙!
두 사람이 다시금 불꽃 튀기며 붙자, 왕은 헤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듯 쳐다봤다. 그는 손을 입 근처에 둥글게 말아 소리쳤다.
“에프디람! 안 오면 장벽 앞에 있는 네놈 부하들 모두 참수라 하셨다. 괜히 소란 피웠다가 피 보지 말고, 대화로 푸는 것이 좋을 것이라. 그리고 네가 원한다는 비밀, 그것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언질하셨으니 가서 말 잘 들어라. 베릭! 너는 에프디람 전담해. 놓치면 고기 없다 하셨다!”
“고기가 없어? 아! 진짜!”
채찍과 당근을 절묘하게 섞은 것이다. 소란 피우면 부하를 몰살하겠다는 채찍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겠다는 당근.
에프디람은 베릭과 맞댄 검에서 서서히 힘을 빼곤 한숨을 내쉬었다. 균열이 바로 앞에서 이글거리는데, 나 원 참.
“봐줬다. 진짜.”
“봐주긴 뭘 봐줘. 딱 보니까 끝까지 가면 내가 이기겠구만. 아, 이게 정신 승리, 그런 건가?”
“빡대가리가 그런 단어도 아네. 꺼져. 네 주인 만나러 가야 하니까.”
“같이 가! 방금 말 못 들었어? 네 전담이라잖아! 내가!”
“아, 몰라몰라. 꺼져!”
“같이 가자고!”
타앗!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그리 검을 휘두르더니, 사라지는 뒷모습은 친구와 다름없다.
헤일은 조심스럽게 내려와 왕에게 손을 건넸다.
“전하. 지진이 계속되고 있으니 다른 신하들은 말로 이동하고, 전하께서는 저와 함께 거동하심이 어떠십니까? 더욱 안전하고 빠르게 장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메이!”
“예. 전하.”
“이곳 뒷수습에 만전을 기하고, 재상을 비롯한 자들을 장벽으로 보내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조심하고.”
왕은 메이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헤일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균열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더스트들은 탄생과 죽음을 반복했다.
메이는 잔해로 남은 마물 찌꺼기를 짓밟으며 한숨 쉬었다. 클리포포드가 점점 기울기 시작했으니.
* * *
“이안 님. 아코렐라 대장이 보고서 올린답니다.”
이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이제 식은땀은 가라앉았고, 힘없이 축 처치던 몸에도 중심이 생겼다.
그는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했고, 이내 아코렐라가 마법사의 뒤를 따라 힘차게 발걸음 했다. 그녀의 첫마디는 꽤 직관적이었다.
“이안 님. X 됐습니다.”
“흐익.”
마법사가 제 입을 틀어막으며 눈알을 굴려댔지만, 아코렐라는 굴하지 않았다. 실로 그것 외, 현 상황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균열이 열렸어요. 클리포포드 측 연구진하고 연락해봤는데, 여진이 조금씩 세지고 있다 하더라고요. 이런 식이면 이틀 내지 나흘 안에 대지진 다시 크게 온다고 보면 된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대지가 갈라져서 그 안의 마력이 보이거든요?”
이안은 아코렐라가 내민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자세한 수치와 과정보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확인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으니.
아코렐라는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일렀다.
“그렇게 되면 형체와 자아를 가진 마물이 출현할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거의 확실하다고 보는 게 맞죠. 더스트가 나오기 시작했더라고요. 그 정도는 일반인도 어느 정도 감당 가능하니까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지진 한 번 더 오면 다 죽습니다. 아, 우리 말고 클리포포드가요.”
장벽 안, 왕궁에서 가까운 서쪽 지역. 그쪽에서 마물이 범람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빤했다. 역사에서 클리포포드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만, 서자 이안이 펜던트와 접촉한 것이 한계점을 눌러버린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빠져나간 자신의 마력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서자 이안이 미리 끌어다 썼다 한들, 분출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향이 아예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일단 수도, 그러니까 프로드호나는 싹 비우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문제는 저희입니다. 이제 어쩌죠? 사실상 전쟁은 끝났고, 계속 여기 있을 명분이 없는데요. 이안 님도 내일 일찍 떠나기로 하셨잖습니까.”
바리엘은 할 만큼 했다. 아니, 그 이상을 해주었다. 이안은 다몬을 데리고 바리엘로 귀환하여 황태자의 치하를 받으면 될 일이다. 트웰러 장관과 제이럿 대장 역시.
“가세요.”
아코렐라는 혹여 이안이 대지진 수습까지 한다고 할까 봐 먼저 선수 쳤다. 어차피 마법사들이 조금 남아있을 것이니 이안은 그만 물러나서 쉬어라, 그녀의 눈빛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아주 단호하게.
그러자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에는 변경 없다. 나는 내일 즉시 이곳을 떠날 것이며, 지진과 마물의 피해를 구제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진 전하의 뜻이라. 어찌 전하의 명 없이 사사로이 움직이겠는가?”
구호 요청은 명백히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영역이었다. 이안은 진이 할 일과 자신이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하고 있었으며, 그를 침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수 있지는 않겠나? 조금 더 적은 피를 흘리기 위해, 기울어지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염원 담은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말이다.
“근데 왜 애들 모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코렐라, 보통은 그걸 회담이라고 하지.”
“제가 베릭이에요? 그것도 모르게? 그러니까, 왜 루스웨나 왕이랑 북쪽 지도자, 그리고 클리포포드 왕까지 다 한자리에 모으시는 지를 묻는 거잖습니까.”
차락.
이안은 손끝으로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어떤 거요?”
“제일 쉬운 방법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폭력이요, 제일 어려운 것이 감화를 통한 것이라.”
아코렐라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니까 지금, 평화적인 대화 방법으로 해결책을 서로 제시해보자, 이 뜻이지?
이안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에 보고서를 건네줬다.
“나는 그것을 해보려 함이니. 안 된다 하더라도 상심할 것 없겠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