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9
제419화. 1차 협상
핏빛이 낭자하던 클리포포드의 대지 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사체들을 옆으로 옮겨 드넓은 공간을 만든 것이다.
루스웨나나 버고스 혹은 제삼자의 인물들은 언덕바지에서 그것을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버고스의 왕이 잡혔다. 그렇다면 전쟁은 끝난 것 아닌가? 클리포포드는 대체 무엇하러 저런 공간을 만드는 것인가?
일개 병사들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지금껏 마음 한 편에 고이 접어두었던 고향이라는 단어를 매만졌다. 하나 그들의 의문이 풀리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
루스웨나 측에서 움직임이 보인 것이다. 노란색 국기를 높이 올린 채, 휘황찬란한 말을 호위하여 움직이는 병사들. 누가 보아도 왕의 발걸음이었다.
패전의 색이 짙지만 않았더라면, 모두가 경외하여 바라보았을 터인데. 지금은 넝마를 주워입은 자들조차 그저 의뭉스럽게 쳐다볼 뿐이다.
히이잉!
그리고 이어서 버고스 쪽에서도 움직임이 보였다. 정확히는 북쪽에서 온 사령술사와 소수 부족들. 그들은 개개인마다 부족을 대표하는 대표자였기에, 이안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이대로 상황이 어찌 될지 고민하던 차라,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말을 몰아 대지 한가운데로 내달렸다.
부족을 살리기 위해 참전한 전쟁. 그것이 패배로 마침표를 찍는다면 그들의 안위만이 아니라 각 부족의 존패마저도 위협받게 될 터. 상대는 바리엘이었다.
끼이익.
클리포포드 장벽 문이 열렸다. 그들은 상앗빛의 거대한 천막을 쳤고, 이내 손수 걸어나오는 금발의 소년을 발견했다. 이안이었다.
작고 어린 소년을 따르는 수많은 마법사들. 그가 몸을 틀자 마법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고, 이내 클리포포드의 왕이 말을 타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이안은 손짓으로 장벽에 수신호 따위를 주며 전체적인 행진을 지휘했다.
본디 이것은 노아 왕자가 할 일이었으나, 왕자는 별다른 불만 없이 왕의 뒤에 붙어서 이안의 지시에 따라 걸었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클리포포드의 아버지인 왕께서도 별말씀이 없으신데, 자신이 어찌하여 말을 덧붙이겠는가?
부우우-
서로의 만남을 알리는 물소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왕은 좌우의 산처럼 쌓인 사체를 보지 않으려 정면만을 응시했고, 이내 먼저 천막 앞에 당도한 에리포니와 마주했다.
에리포니는 우아하게 말에서 내리더니 고개만 까딱거리며 먼저 알은체를 해왔다.
“클리포포드의 왕이시여. 이리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아드님이 클리포포드의 자랑이라, 언제고 모습을 보이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루스웨나의 왕이시여. 침략자 주제에 혀가 너무 깁니다. 나는 지금도 피비린내와 까마귀 우는 소리에 속이 뒤집혀요.”
에리포니는 조금 당황하였으나 티 나지 않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혀에 칼을 두르고 있지 않나?
사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에리포니는 자신이 현 상황을 어떡해서든 타개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오만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했다. 에리포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략자라니요, 본의 아니게 클리포포드의 아름다운 대지를 어지럽힌 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버고스에게 속아서 이리된 것이랍니다. 어찌 보면 피해자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왕께서는 서운한 점을, 저희는 억울한 점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봅시다.”
절대 미안하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곧 루스웨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요, 앞으로 펼쳐질 협상에 있어서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리포포드 왕이 무어라 덧붙이려는 순간.
차악.
이안이 천막을 젖히며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북쪽의 족장들과 애리포니의 느슨했던 기류가 단번에 날 섰다. 클리포포드보다 더욱 기민하게 대응할 자가 나타난 것이니.
에리포니는 웃음기를 살짝 지운 채로 이안의 모습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창백하긴 하나, 특별한 부상 따위는 없어 보였다.
“다들 모이셨습니까?”
이안이 클리포포드 왕에게 어찌하여 서 있냐는 듯 눈짓하자, 그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따라 앉는 에리포니와 북쪽의 족장들. 이안은 그들 앞으로 천천히 나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자작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클리포포드 침략에 관한 수습과 그 배상 그리고 균열의 대책에 관하여 논의할 자리입니다. 저는 마법부의 장관이지만, 현재로서는 바리엘을 대표하는 입장이며, 이 순간 나누는 모든 말들은 대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께 전달할 것이니 단어 하나에도 신중과 예의를 갖춰주시길.”
스윽.
이안은 그리 말하며 탁자 끄트머리를 잡았다.
“혹여 대화를 원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지금 이 천막을 나가시길 바랍니다.”
족장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미동하지 않았고, 모두의 시선은 은근히 에리포니 쪽으로 쏟아졌다. 에리포니는 진행해도 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참석 여부를 알렸다.
이안은 손을 탁탁 턴 채, 지도를 가져오라 눈짓했다.
촤아악.
“현재 전투로 인하여 클리포포드 피해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버고스, 루스웨나와 인접한 국경선 그리고 바키 마을을 비롯한 크고 작은 거주지들. 추청 피해액은 추산해보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대략 최소 금화 1백만 닢 이상을 예상합니다.”
흡. 족장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1백만 닢 이상? 일반인의 한 달 평균 봉급이 대략 금화 한 닢이었다. 그런데 1백만 닢이라니. 소수 민족인 그들에게는 1만 닢조차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에 관해서 절반은 버고스가, 절반은 루스웨나가 부담하십시오. 그리고 버고스 편에 참전했던 부족들은 버고스 몫에서 다시 나눌 것입니다.”
“잠깐, 잠깐.”
전쟁 배상금을 내라는 이안의 말에, 에리포니가 손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수도가 뚫린 것도 아니고, 그저 장벽 앞에서 며칠 안 되는 전투를 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뭐? 1백만 닢?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금액 아닌가?
“다시 주장합니다.”
에리포니는 클리포포드 왕과 이안을 번갈아 보며 나지막이 문장을 눌러 말했다.
“루스웨나 역시 버고스에게 속은 피해국입니다. 다몬 왕이 거짓된 정보로 현혹하여 루스웨나를 속였으니, 이를 참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클리포포드의 왕이시여.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힌 점은 굉장히 유감이고, 이에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루스웨나는 클리포포드의 복구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지만, 배상금이 너무 과하다는 점을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된 정보라 하면?”
이안이 팔짱을 끼며 끼어들었다.
“해봤자 전쟁의 이득을 나누는 기준이 서로 다른 것 정도 아닙니까? 에리포니 왕이시여. 바리엘이 보았을 때 루스웨나의 행보에는 변명할 거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말씀 안 드린 것이 있는데, 이것은 클리포포드에 관한 배상금입니다.”
족장들의 얼굴이 희게 변했다. 클리포포드에 대한 배상금이라는 말은, 바리엘에 대한 배상금 역시 따로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우선 ‘저희’의 말을 계속 들어주십시오.”
이안은 바리엘과 클리포포드가 동맹국임을 은근히 강조하며 에리포니에게 조용히 해달라 부탁했다.
클리포포드가 배상금을 받으면 그중 일부가 다시 바리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참전국에 대한 예우로 성의를 표하기 위해.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오가는 모든 금화의 숫자와 재산들은 바리엘로 흘러들어오는 소금과 같았다.
“클리포포드는 일반 병사들의 피해가 막심하였지만, 바리엘은 마법사들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전하의 활 솜씨가 아주 대단하시더군요.”
에리포니가 마법사를 직접 공격했다는 증언이요, 동시에 맞히지 못했음을 조롱하는 언사였다.
에리포니의 얼굴이 굳어지자, 이안의 낯은 서서히 온화해졌다.
“바리엘로 돌아가면 황궁을 위해 수행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현 상황으로는 그것이 불가할 정도입니다. 하여, 바리엘에 대한 배상금으로 금화 1천만 닢을 받겠습니다. 이 역시 버고스와 루스웨나가 반으로 나누어 부담하고, 소수 부족들은 버고스 몫에서 책임을 지십시오.”
“말도 안 된다! 1천만 닢?”
“정확히는 550만 닢입니다. 전하. 혹, 계산이 서투신 것이라면 적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겐가?”
“아니시면, 무엇을 묻는 것이지요?”
패전국으로 전락할 주제에 지금 어디서 소리를 내는지 알 수 없다는 되물음이다. 에리포니는 어금니로 안쪽 볼을 깨물며 자중했다.
“…금화 550만 닢이면 루스웨나의 몇 해 치 예산과 맞먹는 금액입니다.”
“분할로 내십시오. 대신 그에 맞는 이자를 내시면 됩니다.”
“그대가 아니라 진 황태자 전하를 뵈어야겠소. 그대는 루스웨나의 억울함을 알아줄 생각 자체가 없군.”
“바리엘이 어찌하여 루스웨나의 억울함을 알아줘야 합니까?”
사락.
이안은 냉정히 대꾸하며 서류를 천천히 넘겼다. 그곳에는 패전국이 지불할 금화 외 배상 목록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금화를 제외하고 노예 1천 명, 그리고 각 왕궁의 보물 열 점씩을 클리포포드와 바리엘에 헌납하십시오. 이 또한 각자가-”
“아니. 받아들일 수 없네. 여기서는 내 그 어떤 것도 납득하지 못해.”
막대한 배상금을 낼 바에, 전쟁을 계속하는 게 이득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차라리 바리엘이 빠진 후, 우회하여 클리포포드를 점령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게다.
저 제안에 응한다면 루스웨나는 말 그대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과 같다. 전쟁에 참여하여 힘 한번 제대로 못 쓰고 패전국 딱지를 얻게 되다니. 귀국하면 국민들의 지지도가 바닥을 치는 것은 물론, 왕궁 내 반발 세력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
그래. 차라리 전쟁을, 알레나라를 통하여 저자의 숨을 끊고 버고스 잔병을 흡수하여 전쟁을…….
스윽.
에리포니는 족장들의 눈치를 봤다. 저자들 역시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국가 차원에서도 부담하기 어려운데, 소수 부족이 어찌 저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나?
저들 역시 자신의 땅에서 세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참전한 자들이다. 이대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끝이다. 죽어서 끝나든, 어찌되어 끝나든. 그렇다면 차라리 계속 싸워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아보는 게 맞지 않겠나?
“그대들은?”
이안이 나른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북쪽의 낯선 자들이여, 그들 역시 클리포포드와 바리엘의 제안을 납득하지 못하겠는지 묻는 것이라.
하지만 그들은 에리포니처럼 당당하게 이르지 못했다. 루스웨나는 바리엘에 비하면 작은 나라였지만, 그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그리고 마법사를 보유한 나라였다. 인접국과의 관계도 우호적인지라, 바리엘과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면 하완국을 비롯해 중재해줄 나라 또한 존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 흑갑옷과 이드갈로 장착한 대군을 지니고 있지 않나?
반면 자신들은?
“부담이 아니라, 불가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행 가능한 선에서 제안을 다시 주신다면 그 영광을 바리엘의 황궁으로 모두 돌리겠나이다.”
“그래.”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버고스의 짐을 나눈다 한들, 저들에게는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앞으로 나눌 균열에 관하여 입장을 선점하기 위한 것.
에리포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루스웨나 또한 부담이 아니라 이행 불가이니. 내 잠시 부하들과 의견을 나누고 다시 참석하겠다. 클리포포드의 왕이시여. 부디 자애를 베풀어 잠시간의 시간을.”
에리포니가 그나마 왕에게는 예의를 차리며 천막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잉.
촤아아악!
“아악!”
이안은 마력을 발동하여 천막 입구에 타오르는 불길을 쏟아냈다. 에리포니는 화상 입은 손바닥을 감싸 쥐며 이안을 돌아봤고, 그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시작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나가려면 아까 나가셨어야지요. 예의를 갖추어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시 앉으십시오, 에리포니 왕이시여. 바깥에 그대의 대군이 있다지만, 이곳엔 그대 혼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