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0
제420화. 왕에게 주어진 동아줄
에리포니는 화끈거리는 제 손바닥을 쥐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한낱 장관 주제에, 왕의 손바닥에 상처를 내다니. 이곳이 루스웨나였다면 이안은 당장 대지에서 나뒹구는 시체와 같이 버려졌으리라.
하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패전국이 짊어질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그곳에 자신의 무례함이 잠깐 올라선다고 한들 루스웨나 측은 느끼지 못하리.
“앉으십시오. 전하.”
이안은 의자를 끌어당겨주며 에리포니를 다시 안내했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바깥이건만, 왕은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북쪽의 지원군 역시 본 체 만 체, 왕의 상처를 애써 한눈으로 흘리고 있었으니. 에리포니는 못 이기는 척 다시금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아직 나눌 얘깃거리가 많습니다. 이제 막 전쟁 배상금에 관한 것을 전달하지 않았습니까? 클리포포드 내에 생긴 균열에 관하여,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루스웨나가 빠질 수는 없지요. 북쪽의 지원군들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해 말을 얹을 수 없을 겁니다.”
결국 균열이 일어났다. 그토록 바라던 마물이 범람하였으니 척박한 북쪽 출신에게는 반길 만한 일이었지만, 클리포포드와 그와 접경한 바리엘에겐 이만한 재앙이 따로 없다.
“이미 벌어진 균열을 무슨 수로 다시 붙인단 말인가? 그게 가능했더라면 진즉에 북쪽에서 시도했을 터. 힘을 안배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저들이 이번 전쟁에 참전한 것이지.”
에리포니가 짜증스럽게 고갯짓하자 북쪽 족장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잘못했다가는 저 아득한 찬물 속으로 몸을 내던지게 되는 것이니. 모두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이안과 에리포니 그리고 클리포포드 왕의 발언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지가 갈라지고 균열이 일어나고 있으나, 그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동안 천도(遷都)와 피난 정도가 신께서 허락하신 마지막 기회겠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루스웨나 마법사들을 바리엘로 보내십시오.”
“뭐?”
에리포니가 저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이안의 낯은 평온하여 일말의 변함도 없었는데, 그 잔잔함이 에리포니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모든 것이 이안의 뜻대로, 그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여유가 느껴져서일까.
“방법을 찾기 위해 대륙의 마법사들이 모두 힘을 모을 때입니다. 바리엘은 루스웨나와 달리 유서 깊은 마법부가 있고, 마법사의 수도 상당하지요. 연구에 있어서 이쪽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습니다. 클리포포드에도 마법사가 있었더라면 바리엘로 보내달라 하였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사라진 지 오래라. 루스웨나의 협조가 필수적이겠군요.”
“절대! 절대 불가다!”
차라리 땅 한 덩이를 떼어주고 말지, 마법사를 내어달라니!
이번 전쟁을 통해 마법사의 존재 유무가 국력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몸소 경험한 에리포니였다. 그마저도 몇 없는 자들을 바리엘로 보낸다면,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또 하완국을 비롯하여 타국으로부터 보내오는 지지엔, 루스웨나의 마법사 존재 여부가 상당 부분 차지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마법사들은 왕궁 소속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요. 솔직히 전하의 의견이 딱히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나고 자란 것은 운명이지만, 자신이 살 곳을 정하는 것은 자유라. 그들에게도 선택권은 분명히 있습니다.”
닥치라고, 어디서 수작질을 하는 것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희미하게 남아있는 왕의 처신머리가 간신히 분노를 다스렸다.
루스웨나는 바리엘과 달리, 마법사를 왕궁에 잡아두는 연결 고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안 그래도 가족을 잡아두는 것으로 겨우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 내고 있는데, 망명? 가라 하기도 싫고, 그리 할 수도 없었다.
이안은 부들대는 에리포니를 뒤로하고 고개를 틀었다.
“북쪽에도 마법사들이 있을 테지요.”
족장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세력은 아니었으나, 에프디람과 같이 북쪽을 누비는 마법사들이 분명 있지 않나.
“그들을 소집하는 것이 북쪽 지원군, 그대들의 소임입니다. 이곳에 균열이 일어났으니 북쪽 대지의 기운은 이전보다 덜할 터. 그간의 활동 제약이 많이 풀어졌을 것이라. 해내리라 믿습니다.”
“아, 예. 그, 마물을 다루는 자들은 아탄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예. 요청하세요. 우리는 요구하는 것이지만요.”
이안이 싱긋 웃었다. 요청을 하든 부탁을 하든, 그것은 그대들의 사정이라 선 그은 것이다.
“균열이 심해지면 루스웨나 또한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마법사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머리 맞대는 것을 지지해주심이, 왕께서도 패전의 흔적을 가능한 깊게 지울 수 있는 방법이지요.”
“지금-”
“그리고 루스웨나의 영토 중 일부를 내어주십시오. 바리엘과 인접한 부근이 좋겠습니다.”
스윽.
이안은 펜으로 지도 한 부분을 표시하며 일렀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황당하니 바라보는 에리포니를 향하여 이안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클리포포드에서 난민 발생이 예상됩니다. 바리엘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인접한 국경지를 임시로 열어줄 것이며, 동시에 그만한 영토를 루스웨나 측으로부터 보상받는 걸로 진행하겠습니다. 사실상 황태자 전하께서 최종 결정을 내리시겠지만, 황실의 대신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내올 것이니. 미리 알아두심이 좋겠다는 저의 작은 배려입니다.”
돈, 노예 그리고 영토.
전쟁에서 진 쪽은 언제나 이 세 가지로 그 대가를 치르곤 하였다. 버고스 측은 왕이 잡혀있는 상황이니, 지금 자리에선 논외다.
“우리는 포로로 잡힌 마법사를 무사히 돌려주었고, 버고스 측에 속아서 참전하였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짊어지는 책임은 참전국 중에서도 가장 큰 격이라. 이 정도면 전쟁 주도국이라 낙인찍는 것과 같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가이아의 수많은 왕국이 이번 사태에 집중할 것인데, 제국의 자비가 실로 신기루와 같다 여길 것이다. 가능하다면, 내 그대들의 실담물약을 음용하도록 하겠다. 해서 결백을 주장할 수만 있다면, 내 그 무엇이든-”
“전쟁에 자비가 어디 있습니까.”
이안이 단호하게 에리포니의 말을 잘라먹었다. 바리엘에서 내어주는 정체 모를 것까지 마실 수 있다며 결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사소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바리엘이 현재 루스웨나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릴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거지.
“에리포니 왕께서는 자비가 넘쳐 활을 쏘았고, 병사들의 심장을 꿰었으며, 마법사가 심연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습니까? 왕께서는 자애로우시어 마법사들의 가족을 왕궁에 잡아두고, 어린것들을 전쟁터로 끌고 왔으며, 죽어가는 마법사에게 마력을 나눠주지 말라 이르셨나이까? 그것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시어, 눈물이 다 날 정도예요.”
단어 하나하나 짓눌린 이안의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에리포니는 이 천막 안에서 자신이 얻을 게 없다는 걸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자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가 왕궁으로 돌아가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날이 설대로 서 있는 이안을 자극해서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그제서야 에리포니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가이아의 수많은 왕국이 이번 사태를 알게 된다면, 바리엘의 위대한 국력에 대해 다시금 상기하는 좋은 사례가 되겠지요. 이는 에리포니 전하께서 염려하실 거리가 아닙니다.”
이안이 눈짓으로 마법사들을 부르자, 아직 마력이 남은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앞서 말씀드린 전체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간단한 계약 마법을 맺겠습니다. 모두들 보름 이내로 바리엘 황궁으로 들어서 진 황태자 전하와 회담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갑작스럽게 인생에 마침표가 찍히게 될 것이니.”
지이잉. 지잉.
마법사들이 마력을 발동하자, 북쪽 족장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에리포니다. 그녀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짓이겼고, 이안은 그걸 보고서 손을 튕겼다.
“아. 전하께서는 직접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엘더트를 안으로 들라 하십시오. 계약은 그와 하겠습니다.”
에리포니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찌하여 자신이 아니라 엘더트를?
클리포포드 왕조차 의문스러운 듯 이안을 바라보았지만, 이안은 눈짓으로 그저 왕을 진정시켰다. 다 생각이 있으니, 따르라는 듯.
“엘더트!”
에리포니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최측근이자 자신을 포함한 왕궁의 두 번째 실세이긴 했으나, 결국 왕은 아니지 않나. 루스웨나 자체인 자신을 대신하여 목숨을 담보로 잡을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괜찮았다.
에리포니의 부름에 엘더트가 단번에 뛰어들어왔다.
“예. 전하! 괜찮으십니까?”
천막 입구에서 불길이 치솟을 때부터 불안했는데 마법사들의 저지로 인해 접근이 불가했던 엘더트였다. 에리포니가 손바닥을 쥐고 있는 걸 보고 낯이 굳어졌지만, 천막 안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더 냉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중하라는 주군의 눈빛.
마법사 한 명이 엘더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력의 증거인 금빛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지이잉. 지잉.
“엘더트, 그대의 왕을 대신하여 계약 마법을 맺도록 하라. 방금까지 나누었던 것은 모두 루스웨나의 왕, 에리포니 전하께서 알고 계시니 그대는 목숨만 내놓으면 될 것이라. 어찌, 하겠는가?”
내용은 알 거 없고, 주군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엘더트는 당황했으나 고민하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내며 마법사의 손을 맞잡았다. 곧이어 그들의 손아귀 틈에서 마력이 휘몰아쳤고, 거대한 계약 마법 동심원이 주위를 에워쌌다.
이안은 탁자에 걸터 앉아 에리포니에게 고갯짓했다.
“꽤나 믿음직한 부하를 두었습니다.”
“…….”
조롱하는 게 명백한 투였으나, 이안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대꾸조차 못 하겠다.
어찌하여 자신에게는 계약 마법을 맺지 않았지? 아무리 왕이라고 한들 방금까지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 계속 밀어붙였다면 그녀는 분명히 빠져나가지 못했으리라.
찜찜한 기운을 떨치지 못한 채, 엘더트의 계약 마법이 끝났다. 마력이 잦아지는 것을 본 에리포니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천막을 떠났고, 클리포포드 왕은 어이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죽여도 마땅치 않을 자다.”
왕의 중얼거림에 노아 왕자는 살짝 놀랐는지 눈동자를 굴려댔다. 한 나라의 왕이기 전에 아버지인 그가, 저리 거친 말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죽여도 마땅치 않은 자이긴 하지요. 하지만 굳이 전하와 저의 손으로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되면 루스웨나에 남아있는 반대파 세력에 명분을 주는 것이 되고, 나아가 그쪽 기득권을 설득하여 문화 융합하는 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노아 왕자가 이안에게 자세한 걸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먼저 밖으로 나갔던 에리포니의 고함이었다.
노아 왕자는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고, 이내 병사에게 윽박지르고 있는 에리포니를 발견했다.
“어찌 일을 그렇게 처리해!”
“소, 송구합니다.”
마법사가 제 명령 없이 왕궁으로 떠났다는 소식. 정확히는 그 말썽쟁이 자이라와 일부긴 하지만. 에리포니는 이를 아득거리며 말 고삐를 잡아 끌었다.
“당장 본진으로 돌아간다.”
“예. 전하.”
히이잉!
알레나라.
어차피 떨어지면 최악으로 치닫을 운명.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에리포니는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