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2
제422화. 하늘의 구름과 같이
달칵.
마부는 마차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반사적으로 알아챘다. 그가 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기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자가 깃발을 흔들며 뒤쪽에 상황을 알렸다.
푸르른 들판.
클리포포드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하지만, 바리엘의 색이 확연히 깃든 언덕이었다. 묵묵히 뒤따르던 호위병들은 조금씩 속도를 줄였고, 이내 행렬이 완전히 멈추었다.
“무슨 일입니까?”
“바퀴에 뭔가 걸린 것 같습니다. 달칵 소리랑 같이 구를 때마다 갈리는 느낌이 나요. 앞이나 뒤쪽 마차는 문제없나요?”
“앞쪽엔 없는 것 같고, 뒤쪽은… 확인해보죠.”
“예. 어차피 슬슬 쉴 때도 되었으니, 이안 님께 보고하여 잠깐 숨을 돌렸다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확실히 공기가 다르긴 다르지요. 공기에도 맛이 녹아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바리엘로 돌아오니까 제 평생 마셨던 그 맛이 납니다.”
마부가 싱긋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앞바퀴와 뒷바퀴를 훑는 그의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 없다. 기술자들이 모두 모여있긴 하지만, 워낙에 귀하신 분들을 모시고 가는 터라 자그마한 잡음에도 민감할 수밖에.
그사이, 이안이 마차에서 내려 마부를 불렀다.
“무슨 문제 있나?”
“아, 이안 님. 아닙니다. 마차 바퀴가 모난 돌을 끼고 돌았던 것 같습니다. 지지대가 조금 꺾이긴 했는데, 이만하면 조금 손보아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중앙에 들어서서 마차가 멈추기라도 하면 난감하다. 이곳은 보는 눈이 없으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우리가 닿는 곳마다 바리엘 제국민들의 시선이 쏟아질 터.”
이안은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지도를 살피며 일렀다. 최대한 빠른 이동을 위하여, 그들은 험한 길을 피하지 않고 되려 선택하는 여정을 보냈다.
덕분에, 바리엘로 들어왔음에도 제국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보이는 것이라고는 떼 지어 지나가는 산양과 끝없이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 그리고 조금씩 초췌해져 가는 일행들이었다.
이안은 마법사들이 기지개를 쭉 켜는 것을 지켜봤다. 마차가 워낙 흔들리는 탓이라, 하늘을 날던 마법사들이 고작 멀미 따위와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조금 늦어도 좋으니 확실히 손보라. 승전보를 가지고 귀국하는 마법사들의 마차가 중간에서 주저앉는 것보다는 낫겠지.”
“단단히 고쳐두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도록 한다. 평지가 있고, 주위에 산양 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맹수의 위험이 적을 것이니.”
“오늘 여기서 쉬면 모레쯤 중앙에 당도할 것입니다. 아마 이른 아침 정도요.”
“어중간한 오후에 걸치려 서두르는 것보다 낫구나. 자, 모두 짐을 내리고 말들을 쉬게 하라.”
“예. 이안 님.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베릭 님! 저기 산양 떼 보입니까? 오늘은 저것 좀 잡아오십시오! 아니면 1인분만 드리겠습니다!”
“사냥 떼? 무슨 사냥 떼?”
“산양 떼요. 저기.”
“오오! 고기들 움직이네!”
“난 산양 고기 맛 없던데.”
“쟤가 고기를 맛으로 먹는 줄 알아? 먹고 살려고 먹는 거지. 베릭! 가는 김에 주변 정찰도 좀 해봐! 물 길을 만한 곳이 있는지.”
타닥타닥!
마법사들이 채 외치기도 전, 베릭은 이미 쌩쌩하게 언덕 위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지고 가는 식량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릭에게 주어진 몫은 그의 입장에서 절식하는 것에 가까웠다. 끼니 때마다 자급자족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이안은 베릭의 뒷모습을 보다가 헤일에게 고갯짓했다. 그는 알겠다며 눈빛으로 답하였고, 이내 앞장 서서 다몬이 수감되어 있는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끼이익.
마차 문이 열리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다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해 및 자결을 방지하기 위해 물려놓은 재갈. 단단히 결박된 사지. 타국의 왕이었던 자를 존중하지 않는, 항시 함께하는 감시병. 하지만 무엇보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상황에서 그의 후각으로 바리엘의 냄새가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바람에서 느껴지는 타국의 기운. 다몬은 탁해진 눈동자를 들어올리며 이안을 쳐다봤다. 역광으로 인하여 이안의 낯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문제없나?”
“예. 없습니다.”
“소란 떨지도 않고?”
“잠잠합니다.”
“수고했다. 교대 전, 잠시 쉬어라.”
이안이 마차 문 옆으로 몸을 틀어주자, 경비병은 감사하다며 인사 후 자리를 피했다.
이안은 다몬의 맞은편에 앉아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일정한 시간마다 이리 제대로 살아있는지를 살피는 중이었는데, 그들의 침묵은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정도로 무겁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려나. 헤일이 아껴둔 궐련을 습관적으로 꺼내들자, 다몬의 시선이 그쪽으로 틀어졌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사작용과 같았다. 속이 답답하여 모든 게 틀어질 것 같은 지금, 바리엘의 바람 냄새를 지워버리면서 자신을 달래줄 만한 것은 궐련밖에 없었으니까.
이안은 그의 반응을 긴밀히 눈치챘고, 헤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뭘 달라 하시는 거지? 헤일이 이안의 손을 보며 당황했다. 지금 자신에게는 보고서가 없는데? 몇 초간 고민하던 헤일이 슬쩍 손바닥을 맞잡으려고 하자, 이안이 단호하게 손등을 쳐내며 일렀다.
짜악.
“궐련.”
“아. 아아아. 궐련. 예? 이안 님, 안 태우시잖습니까.”
“나 말고. 이자.”
이자. 다몬 전하에서 급격히 격하된 존칭. 헤일은 듣는 자신이 괜히 겸연쩍어서 다몬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안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헤일은 이안에게 남은 궐련을 모두 넘겨주고 마차 문을 닫았다. 커튼을 통해 은은히 들어오는 빛을 제외하고, 주위가 어둠으로 잠겨들었다.
“어쩐지 축사 같군.”
그걸 본 이안이 신랄한 농담을 건넸다. 축사에 갇혀본 적은 없었지만, 충분히 상상 가능했다. 온몸이 결박당한 채 어디론가로 실려가는, 무기력한 자의 입장을.
“한 대 피울 겐가? 궐련을 물고 허튼짓하면 위험해. 재는 뜨거우니까.”
이안이 손가락 틈으로 궐련을 들고서 까딱거렸다. 재갈을 잠깐 풀어줄 테니까, 소란 피우지 말고 인간다운 휴식을 취해보는 게 어떨지 제안하는 게다. 그렇지 않으면, 다몬에게 어떤 ‘처벌’이 가해질지는 그만 알 것이다. 재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궐련을 물고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으니.
다몬은 이안을 가만 노려보았다. 침묵은 긍정이라. 이안은 천천히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의 재갈을 빼주었다. 삼키고 삼켜도 흘러넘치던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미 바리엘 안쪽으로 들어왔다. 다몬. 그대는 패하였고, 이제는 나아갈 길이 없지. 왕궁으로 가면 마법부를 중심으로 취조가 있을 터인데, 나는 기록되지 않을 그대의 말이 궁금해.”
“…….”
이안이 궐련에 불을 붙여서 그에게 내밀었다. 마치 낯선 자를 경계하는 길짐승과 같이 다몬은 한참이나 그걸 지켜보았고, 이내 이안이 내민 궐련을 입에 물었다.
하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고린 피비린내가 풍기는 듯했다.
“기록되지 않을 것을 어찌 궁금해하는가. 누구보다 기록될 것에 관심 많으면서.”
“한 줄의 문장엔 수없이 많은 자의 의견이 덧대여 있다. 가끔은 그것이 너무 시끄러워 판단을 흐리게 하지. 하여, 나는 그 누구의 의견도 덧대이지 않은 그대의 순수한 발언을 듣고자 해.”
피식, 다몬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틀었다. 속된 말로, 지랄하고 있다는 낯이었다. 이것도 승자가 누릴 수 있는 여유라 이건가?
“다 됐고, 차라리 나를 죽여라. 심장에 검을 찔러 넣어준다면 내 친히 유언을 그대에게 일러주마. 러더포드와 회귀에 관한 것? 아니면, 버고스 왕국의 비밀? 무엇이라도 내 숨 닿는 순간까지 지껄여주지.”
후우. 다몬은 반항적으로 이안의 얼굴에 연기를 뱉어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안. 그는 우아하게 연기를 흘려보내고, 그 이름을 꺼냈다.
“티모시가-”
멈칫. 눈에 보일 정도로 갑작스러운 기색이다. 다몬은 연기를 체내에 머금은 채 굳어버렸다.
“티모시가 그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우리의 전하께 머리를 조아리며 피 흘리는 것을, 티모시는 꼿꼿하게 서서 다른 자들과 함께 내려다보겠지.”
다몬의 눈빛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졌다.
차마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그가 그렸던 최악의 상황은 사실상 최악이 아니었다는 걸. 희미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 또한 스스로 깨달은 듯 보였다.
티모시 뿐이겠는가? 바리엘 중앙에 기거하는 모든 버고스 국민이, 그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게 될 터였다.
“그때 되어서는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을 놓치지 않는 게 좋아.”
다시금 작은 제안이 속삭여졌다. 티모시와의 재회를 막아주는 대가로 무엇이든 털어놓아 보라고.
러더포드와 회귀법 그리고 다몬의 동생들. 이 모든 것들이 엮여있는 실타래 속을, 이안이 조심스럽게 손끝을 까딱이며 파고들었다.
다몬은 타들어가는 궐련을 툭 뱉어내고서 발로 그를 짓밟았다.
“러더포드는-”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뭇 짜증스러운 투로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티모시와 그리 재회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아주 작은 사건의 모서리만으로 막을 수 있다면…….
“러더포드는 신과 직접 소통하는 자다.”
“신(神)?”
이안이 웃으며 손끝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신? 가이아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가이아의 모든 소리를 동시에 듣고 계시다는 그 신? 존재는 하나이나, 온 세상 수많은 인간들 속에 존재한다는 그 신?
“…신전 출신인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직접 그를 만나면, 어째서 그리 부르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 러더포드는 신과 소통하여 세계를 조율하는 자이니. 이안. 아무리 날고 기는 너라 한들, 그 조율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터라.”
“그래서 다몬, 그대도 이리되었군.”
흐음. 다은 싱긋 웃으며 이안의 조롱을 받아쳤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음은, 그 역시 어쩔 수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닌가?
똑똑.
“이안 님. 문제없으십니까?”
그때, 밖에서 헤일이 문을 두드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다몬은 제 할 말 다하였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이안은 오늘 더 이상 다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들어오거라.”
“어이고, 연기가…….”
“잠시 환기한 후, 경비병을 둘로 늘려라.”
“아, 둘로요?”
하나만 써도 될 것을 둘로 쓰라 하시니, 이는 재갈을 풀어도 좋다는 명령이었다.
이안은 천천히 밖으로 나와 상쾌한 공기를 쐬었다. 저 멀리, 산양 떼 쫓는 베릭이 새끼손톱만 했고, 그 위로 거대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저 뒤에 숨어계십니까?’
신이시여. 가이아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계시다면, 지금 제가 바라보고 있는 것 또한 보고 계시겠지요. 러더포드보다는 이쪽이 나을 것 같은데, 어찌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이안 님. 식사 준비하고 있답니다.”
“그래. 시장하지는 않다.”
“그 말 하시면 베릭이 득달같이 달려옵니다. 남은 것 좀 달라고. 귀찮으니까 자중해 주십시오.”
헤일이 혀를 끌끌 차며 옷깃을 바로 했고, 이내 경비병 두 명이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다시금 닫힐 때까지, 다몬은 바깥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것이 이안이 들은 다몬의 순수한 말이었다. 황궁 밖에서 들을 수 있었던, 기록되지 않을 마지막 발언.
* * *
히이잉!
타닥타닥!
마부는 저 멀리 보이는 바리엘 중앙 성벽을 보고서 코를 훌쩍였다. 돌아오고 싶었던 자신의 집이 눈앞에서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아침이 막 지나가는 시간이었으나, 베릭은 기특하게도 깨어있었다. 이마를 창문에 딱 붙인 채로, 우둘투둘한 길을 내려다봤다.
“이안아.”
“응.”
“이 길, 우리 변방에서 올라올 때 탔던 길 아닌가? 로만드로 아저씨랑.”
“호칭이 어찌 그래.”
“맞지? 하샤도 같이 있었잖아.”
“그래, 맞다. 중앙으로 들어서는 산길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신전에서 신탁의 빛을 가져왔을 때 멈추었던 산도 이곳이다.”
“어쩐지. 역시, 내가 이런 기억력은 좋단 말이지.”
“베릭, 길치 아니었던가?”
“그거랑 좀 달라.”
뭐가 다른 걸까. 이안은 연신 바깥을 구경하는 베릭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릭은 연신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때는 지금을 전혀 생각 못 했어.”
“지금? 어떤?”
“말 그대로, 지금. 황궁에 들어가서 고기도 졸라 먹고, 전쟁터 나갔다가 이렇게 돌아오는 거.”
“신기했었지? 그때.”
“어. 별…….”
“별천지.”
“그래. 별천지였다.”
이안은 책을 탁, 덮으며 멀리 보이는 중앙을 내려다봤다. 천천히 피어오르는 흰색 풍선. 베릭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이번에는 더한 별천지일 것이다. 승전하여 돌아오는 전사들에게, 바리엘 제국민들이 어떠한 찬사를 보내는지 보게 될 테니까. 보아. 저기, 벌써부터 거대한 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니.”
어서 오라고, 푸른 하늘의 구름과 같이 그대들이 있을 곳은 이곳이라고. 제국민들이 멀리서부터 보내는 환호가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