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5
제425화. 이안의 작은 부탁
티모시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안색을 굳히고 가만 서 있었다.
간과했다. 지금 자신은 왕궁을 드나들었던 버고스의 사절이 아니라, 그저 바리엘로 귀화한 외국인일 뿐이었다. 이안의 시각으로 저울질해 보았을 때, 자신과 다몬 왕의 가치 차이는 분명하리라.
아직 버고스 측에서 어떠한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으니, 다몬 왕은 종전 협상과 버고스를 점령하기 위한 발판이 될 터. 그런 것과 비견하여, 자신은?
“저는…….”
이미 가져온 장부는 진 황태자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그것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적당한 값을 치루었다 생각했다. 이로써 자신이 빈손이 되었음을 깨달았지만.
티모시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으로 이안 경을 설득할 수 있을까. 다몬 왕을, 그 낯짝을, 그리고 그 멱살을 붙들고 하고 싶은 말이 가슴 그득 쌓였는데, 대체 어찌하면 자신에게 그것이 허락될까.
“진 전하를 통하여 서류는 잘 받았네.”
“그사이 받으셨습니까?”
“클리포포드에서 받았으니, 그걸 전해 준 병사가 바리엘에 첫 승전보를 일렀을 걸세.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담겨 있더군.”
이안은 우선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햇빛 사이로 가볍게 떠다니는 먼지. 답답함보다는 포근함을 머금고 있었다. 이안은 이어서 들어오는 각종 상자들 속에서, 진이 보낸 사본을 꺼내들었다.
“이것이 그대가 지니고 온 전부인가?”
“예. 진 황태자 전하께 드린 것 전부입니다.”
티모시는 사본임을 인지하며 종이를 휘리릭 넘겨댔다. 워낙 닳도록 보았던 것인지라,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만으로도 내용을 빠짐없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이안이 접어놓은 마지막 장을 발견했다.
러더포드와 관련된 부분. 아무래도 마법부에서는 이드갈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 마법부인 수장인 이안 역시 그러할 터.
“러더포드를 직접 본 것은 두 번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버고스 왕국으로 직접 와서?”
“아니요. 모두 타국에서, 제가 외교 업무를 보는 와중 우연히요.”
“우연히라. 티모시. 자네는 우연을 믿나?”
이안이 웃었다. 우연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인연은 운명을 이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연 역시 결국 운명이라는 뜻 아닌가?
그 복작스럽던 거리에서 이안이 티모시를 발견했던 것이, 통행증을 세 장이나 만들어 주었던 것이, 그의 장부가 현재 이안의 손에 넘어온 이 모든 것이-
우연인가?
“당시에는 우연으로 치부했습니다만, 지금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네요. 아마 러더포드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러더포드는 황궁에서 내란이 있었을 때부터 거론되던 자라. 마리브가 그쪽과 연계하여 이드갈을 확보했었거든. 버고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리엘에도 이드갈을 유통시키려 했던 전적이 있다. 당시 여러모로 폭풍이 치는 바람에, 그자의 의도대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손끝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려댔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중얼거렸다.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은, 고풍스러운 틀 사이로 나뭇잎이 끼어있었다.
“다몬과 러더포드가 모종의 거래를 했다. 이는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모를 것이고.”
“송구하게도.”
“다몬의 형제자매들을 러더포드에 넘기면, 그쪽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가? 따지자면 왕족 피가 섞인 자들인데, 그 피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제 소관과 책임 밖의 일이었습니다.”
티모시가 거짓말할 연유는 없다. 가족을 잃었고, 나라도 저버렸으니까. 갈 길은 바리엘이라는 다리 하나밖에 없거늘, 거짓으로 일을 어지럽게 만들까.
이안은 서류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아직 버고스 측의 입장이 도착하지 않았다. 다몬 왕은 이곳에 있지만, 버고스 내부의 반대파가 틈을 노려 정권을 잡는다면 전쟁은 끝난 것이되 끝나지 않게 되겠지. 그리하면 티모시, 그대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나?”
이안은 알고 있었다. 사실상 버고스에서 다몬의 뒤를 이을 자가 없다는 것과, 있다고 한들 지방 귀족들 선에서 마무리될 것이라는 것.
그들은 왕실을 살리는 것보다 제 영토를 중심으로 분리, 반목할 가능성이 훨씬 컸다. 이미 다몬을 지지함으로써 엄청난 물질적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선 버고스 왕실을 바리엘에 바친 다음, 영토를 독립시키는 쪽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엘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징벌 아래, 함께 끌려다니게 될 테니.
“나라가 어지럽겠지만, 수도 칼라마트가 버고스의 전부는 아니지.”
“저는 이미 바리엘인이 되었습니다. 버고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갈 수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돌아가면…….”
아직 제 부인과 자식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버고스 어디선가 살아있을 것만 같은 헛된 희망에, 티모시는 평생에 걸쳐 절대 버고스 땅을 밟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조금 걱정하던 차였다. 혹여 티모시가 버고스로 돌아간다면, 나움의 존재에도 문제가 생길 테니.
저자는 이곳에서 행복해야 했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자식을 낳아, 후대의 나움에게 존경을 받는 자로 남아야했다.
“뜻대로 하시오. 바리엘 제국민에게는 자유가 있어.”
“부탁드립니다. 다몬 왕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티모시 경. 내 분명 물었던 것 같은데. ‘왜’냐고.”
이안은 다리를 꼰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외교부 출신 아니시던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엄밀히 따지면, 보고서는 이안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티모시는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넘기며 한숨 쉬었다.
“저는-”
손에 쥔 것은 없지만, 자신이 평생 해오던 일이 이런 것이었다. 보이지 않은 것을 주고받으며, 약조하고, 지켜내는 것.
“저는 버고스의 왕궁 중심에서 일했던 자입니다. 곧 있으면 그쪽과 전쟁 관련 협상을 진행하실 것인데, 그 과정에서 제가 힘쓰겠습니다.”
“버고스는 패전국 입장이다. 협상이라 할 것 없이, 바리엘과 클리포포드의 요구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지. 한데 그대가 무엇을 조율하겠다는 것이지? 음. 버고스어를 잘하는 자는 황궁에도 많은데.”
“…무언가 무리가 있어서 그리하신 것 아닙니까?”
“무슨?”
“클리포포드에서 버고스 패잔병을 흡수한 뒤 그대로 칼라마트까지 진격해 올라갔더라면, 보다 확실하게 패전국을 함락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안 님은 마법사들을 데리고 귀환하는 걸 선택했지요. 특별한 연유가 있지는 않은지, 솔직히 의문스럽습니다.”
다몬의 뒤를 이을 자가 없다는 것과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예상은, 말 그대로 예상에 불과했다.
병사들도 결집했던 마당에, 이안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북진하여 버고스를 완전히 장악했을 터. 전투의 흐름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귀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 짐작한 게다.
이안은 손끝으로 턱을 문지른 다음 희게 웃었다.
“그래. 그대가 이전에 모시던 왕께서 사고를 좀 거하게 치셔서 말이지.”
황궁에서 균열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아직 아무도 없을 것이다. 티모시는, 오로지 이안의 행보만을 분석하여 의심을 품은 게다.
‘나움, 네가 말했던 것만큼 티모시는 상당히 현명한 자인 것 같구나.’
“사고라니요?”
“대회의에서 거론될 사안이다. 아무튼,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그대에게 다몬과의 면회를 허락할 수 없어. 그쪽을 만나게 하지 않는 대가로, 다몬이 정보를 조금 풀었거든.”
“이안 경! 내 이리, 이리 부탁합니다!”
“진정하게. 시간은 많아. 우리는 이제 막 도착했고.”
티모시가 절박하게 한 걸음 내딛자, 이안이 손을 들어 단호히 저지했다.
“다몬의 심문이 먼저다. 실담물약을 사용할 것이지만, 일반인에게 과다 복용했을 때의 실험 결과가 없어. 최대한 다몬의 협조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내가 여기서 그대와의 만남을 주선한다면 다몬이 참으로 좋아라 할 것이다. 그렇지?”
“…….”
“심문이 충분하다고 판단되고, 버고스의 공식 입장을 전해 들은 다음, 진 전하의 판단 아래 다몬에게 처분이 내려질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는, 그대를 위한 시간도 준비되어 있겠지. 다몬의 남은 삶에 설마 이전 부하의 원망 하나 스며들 틈이 없을까.”
차락.
이안은 자중하라는 뜻으로 서류를 한데 그러모으며 정리했다. 먼지가 좀 쌓이긴 했어도, 자신이 없는 와중 로만드로가 책상 정리는 꼬박꼬박 했었나 보다. 모든 것이 익숙한 손길 아래 정렬되어 있다.
“…부탁드립니다. 꼭.”
“그리고 티모시 경. 바리엘을 위해 버고스와의 회담에 참석하겠다는 것은 내 참으로 기쁘게 여기네만, 사실 그것은 응당 해야 할 자네의 도리 아닌가?”
“…원하시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티모시는 기민하게 이안의 뜻을 알아챘다. 도리를 하면서 대가를 치른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게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진 황태자와 대제국 바리엘을 위한 것. 지금 마주한 것은 이안이니, 티모시는 이안이 바라는 걸 내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제 손에 있다면 말이다.
“원하는 것이라…….”
어린 나이에 제국 장관 자리에 오른 미소년 마법사가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티모시는 그가 원하는 걸 바로 머릿속에서 그릴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무릇 저마다의 욕망을 품고 있기 마련인데, 이자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돈, 명예, 권력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쾌락. 대부분은 이 정도 선에서 분류가 가능했거늘, 이안은 불가했다.
모든 걸 지니고 있어서? 아니.
‘텅 비어있어서 그렇다.’
지상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어 떠도는 현인과 같이, 이안의 욕망은 텅 비어있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티모시는 문득, 어찌하여 이안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는지를 깨달았다. 욕망 없는 자가 황궁에서 권력을 쥔다는 게, 가능키나 하나? 지도자의 위엄을 타고난 자가 아니라면-
“티모시 경.”
티모시는 어지럽게 얽히던 사념을 한순간에 지워내고 고개를 들었다. 이안은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무슨 생각 하는지 궁금하다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나중에, 적당한 기회에 말이지. 다몬과 자리를 만들어준다면 그대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십니까?”
“마법부 별채 건설을 진행할 것인데, 거기에 쓰일 버고스 수입 마력석을 그대가 담당했었지. 이어서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마법부 별채 건설이요?”
이전에는 마법부의 비대해진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반대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만한 세력이 없다. 볼브를 중심으로 제국방위부 절반이 갈려나갔으며, 그로 인해 황자의 입지가 굳건해졌기 때문이다.
마법부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대금 자체는 이안의 개인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라 반대할 명분 자체가 없다.
“그래. 마법부 별채. 끝 쪽 복도에는 책을 읽을 만한 작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 커다란 유리창으로 마법부 뜰이 한눈에 들어오고, 사계절을 그림처럼 담아내는 그런 창.”
“저는 건축가가 아닙니다만.”
“버고스에서 들어오는 마력석 담당으로 시작하지. 그리고 내가 보았을 때, 그대는 건물을 꽤 잘 지을 것 같아.”
뭘 보고? 덩치가 이래서 그런가? 티모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때, 벌컥 열리는 문.
아코렐라가 보고서를 양손에 가득 든 채 붕붕 흔들어댔다.
“이안 님! 지하실로 내려가시죠!”
“그래. 실담물약 제조는 계속하고 있나?”
“역시 재료가 다르니까 때깔부터가 다릅니다. 완벽해요. 죽여집니다! 예!”
아코렐라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서두르라는 듯 앞장섰다.
이안은 티모시를 스쳐 지나가며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는데, 참으로 많은 의미가 뒤섞여 있어 의중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힘내라는 것일까. 잘 하라는 것일까.
티모시는 소파 팔걸이에 살짝 걸터 앉은 채 이마를 짚었다.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죽인 원수가 이 바닥 아래 있건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리도 한심할 수가.
타닥타닥!
“다몬 왕 경비, 삼엄히 하라.”
“물론이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인데. 그 걱정은 마세요. 마법사 아니면 어차피 지하로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이안은 아코렐라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맨 끝 방. 희미한 불빛과 함께 인기척들이 몰려있었다. 타 부서에서 파견 온 자들과 마법사들이 한데 모여 있는 탓이다.
“아, 이안 님.”
“심문을 시작할 것인데, 어느 부서에서 왔지?”
“외교부와 행정부입니다.”
“뒤에서 대기하도록.”
“예.”
이안은 쇠사슬로 결박당한 다몬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자연스럽게 꼬아지는 다리. 그것을 신호로 서기가 펜을 붙잡았고, 마법사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자, 그러면 버고스 왕국의 다몬 전하. 바리엘에서 하는 첫 심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대답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대답을 들은 후, 실담물약을 통하여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것이니까요. 나라를 저버린 왕이 타국에서 거짓말이나 일삼았다는 걸, 버고스 국민들이 알면 참으로 통탄해할 것입니다.”
심문에 협조하지 않으면 버고스에 피해가 갈 것이라, 이안은 그리 돌려말하고 있었다.
차락.
보고서를 받아 든 이안은, 다몬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