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
제43화. 자루에 담긴 것
채앵!
베릭이 휘두른 검을 데오가 힘겹게 막아냈다. 아무리 그간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한들, 옆구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상태니, 상처가 둘 사이의 밸런스를 잡아준 것 같았다.
“오우.”
“베릭. 괜찮아?”
이안의 부름에 베릭이 뒤를 돌아봤다. 씨익 웃는 모습이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다.
“뉘예뉘예. 그러니까 말 걸지 마세요. 주인님.”
퉤, 하고 뱉는 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지만, 저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나. 그는 다시금 전광석화처럼 데오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데오의 급소를 집요하게 노려댔다.
챙! 채앵!
“백작님!”
데오는 그걸 간신히 피하면서도 제 주인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이 꽤 불쾌했는지, 베릭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데르가는 앞뒤 잴 것 없이 다시 이안에게 덤볐다.
“죽어라! 이안!”
피잉! 쉬이익!
백작의 저주는 신호탄이 되었다. 천려의 전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고, 활 대신 검을 쥔 자들은 이끼 낀 바위를 짚으며 훌쩍 넘어 달렸다.
영락없이 피식자를 눈앞에 둔 포식자였다.
한 발 한 발이 강력하고 정확했으며 파괴적이었다. 살육의 즐거움을 그대로 느끼는 듯한 분위기가 가히 이질적이다.
촤아악!
푸욱!
“으아아악! 살려줘!”
“그래. 잘 뛰네. 어서 더 도망쳐 봐.”
“몰아, 저쪽으로 몰아!”
“겐달로! 그놈은 내가 잡았다고!”
전사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사병들의 숨통을 어렵지 않게 끊어놓았다. 데르가라면 몰라도 이놈들은 죽으나 사나 상관없는 자들 아닌가. 이슬로 축축해진 흙이 피를 머금었다.
“아차차. 시체 가져가야 한다 그랬나?”
“머리만. 몸통은 못 들고 가지. 귀찮잖아.”
채앵! 챙!
“저쪽은 좀 쓸 만해 보이는군.”
“벨이라고 했나? 기사 양반 친구인 것 같은데.”
잔챙이들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정예로 꼽히는 기사들 주위로 천려의 전사들이 어슬렁거리며 모여들었다. 사냥감의 숨통을 노리는 늑대 무리와 같다.
한편, 데르가는 꺽꺽 넘어가는 숨을 쉬어대며 침을 흘려댔다. 수는 백작의 공격을 쳐내기만 할 뿐,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풀에 지쳐 저리된 것이다.
“이…안…! 우에엑.”
“가지가지 하십니다. 아버지.”
“너, 대체 어떻게…….”
수는 데르가의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에 짓이겼다. 이안의 발치 아래 납작 엎드리게 된 데르가는 벌게진 얼굴로 버둥거렸으나 소용없었다.
이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중얼거렸다.
“용기인지, 욕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윈첸이 버티고 있는 대사막에서 부마트와 결탁하였습니까. 이러나저러나 저로서는 상관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아들 된 도리로서 영 보기 힘듭니다.”
서걱.
서슬 퍼런 칼날 소리에 데르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수가 담담한 표정으로 데르가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었다.
저의 식구를 꾀고 정신적 지주를 죽이려 한 원수 중의 원수. 동맹을 맺어놓고 뒤에서는 검을 갈던 배신자 중의 배신자.
“뭐, 뭐 하는! 뭐 하는 게냐!”
“목 대신 자르는 것이오. 아직 시기가 아니니.”
완벽한 복수와 작전을 위해서라면 참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잘라야만 했다.
“이런, 미천한,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시끄럽소. 돼지 멱 따는 기분이 드는군.”
“무, 무어라? 이 천박한 것이!”
“머리카락이 싫다면 목을 잘라줄까?”
수는 단검을 데르가의 목울대에 세우며 중얼거렸다. 살벌하고 뜨거운 분노가 뚝뚝 흘러내렸다. 데르가는 침을 꿀꺽 삼키며, 허망한 눈동자를 돌렸고, 때마침 데오의 목에서 핏줄기가 솟아오르는 걸 목격했다.
“으윽…….”
“데, 데, 데오……!”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데오를 중심으로 천천히 도는 베릭.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정없이 급소를 찔러댔다. 데오는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으아아악!”
이어서 왼쪽. 천려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틈을 보이기가 무섭게 물어뜯기는 목덜미. 정예라 여겼던 기사들조차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죽을 곳은 이곳이 아니니까.”
이안은 데르가의 볼을 매만지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자 수가 검은색 복면을 데르가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끈으로 쪼였다.
퍼억! 퍼억!
“으아아악!”
이내 사정없이 쏟아지는 매질. 시체를 정리하던 전사들도 오고 가다 데르가의 등짝을 밟으며 욕을 한 사발씩 뱉어댔다.
퍼억! 퍽!
“X발놈, 감히 윈첸 님을…….”
“이거 언제 죽입니까? 이안 님?”
“그냥 지금 해버리면 안 되나?”
데르가는 진즉에 기절했는지, 아랫도리를 적시고서 손만 부들부들 떨어댔다. 첼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제 아비 판박이었던 모양이다.
이안은 카칸티르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일단 중앙에 넘겨주고, 후에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주도권만 가져온다면 데르가의 처형식쯤이야 천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었다. 다만 우선은 황궁이 원하는 대로 바쳐서 신임을 얻는 게 중요했다. 에리카 말고, 보름 거리에 떨어진 바리엘의 중심들 말이다.
입맛 다시는 전사들과 달리, 카칸티르는 멀찍이 떨어져 고개만 끄덕였다. 모두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다들 정리해라.”
“네. 카칸.”
“카칸! 저 멀리 중앙군의 흔적이 보입니다.”
“한발 늦었다 이거여!”
베릭이 킥킥 웃으며 검에 묻은 피를 바지에 슥슥 닦아댔다. 만족스러운 몸풀기였는지, 표정이 한껏 더 가벼워 보였다.
“베릭. 상처는? 여기서 덧나면 치료하기도 어려워.”
의료진은 한정되어 있었고, 전투로 인해 다친 영지민들은 너무나 많았다. 거기에 베릭까지 더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하지만 베릭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코만 훌쩍거리며 웃옷을 들어 보였다. 천려 의원이 감아준 붕대가 그대로였다.
“나 진짜 괜찮은데?”
“…대체 어떻게?”
“나도 몰라. 칼질할 때마다 스트레스 풀리니까, 그거 때문에 회복력이 빨라지는 건 아닐까? 만악의 근원은 스트레스니까!”
쉬익, 쉭! 절도 있게 휘두르는 검과 달리, 말은 장난스럽기 짝이 없다. 이안은 유심히 베릭의 상처를 쳐다봤으나 당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려갑시다!”
“중앙군 뺑이 좀 치게 조용조용!”
“네가 제일 시끄럽다. 아하하.”
포댓자루에 담긴 데르가를 들쳐 메고 소리치는 전사.
이안은 목 잘린 시체들을 지나쳐 브라츠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들 위로 천려의 매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 * *
“에리카 님, 에리카 님!”
“천려족이 돌아왔습니다!”
쿠당탕탕!
에리카는 부하의 외침에 바로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정문으로 위풍당당 들어오는 천박한 야만족들. 죄다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데다, 뭔지 모를 포댓자루를 들고 있었다.
“중앙군은?”
“전서구가 날아왔는데, 숲에서 야영을 할 것 같습니다. 데르가와 그 사병들의 흔적을 찾았다 합니다.”
까득. 에리카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같은 숲에 들어갔다 귀환한 녀석들의 표정이 유독 밝아 보여서 그런 것 같다.
쿠실레에서 내린 이안은 몇몇 전사들과 함께 본채로 들어섰다.
“잠깐, 에리카 님의 허락을 구하고-!”
“시끄럽다. 저택에 전세 냈나?”
“예의를 지켜! 우리는 황궁 조사단이란 말이다!”
“그래? 우리는 대사막의 중심이다. 꺼져.”
복도 쪽에서 소란이 들려오는 걸로 보아, 부하들이 이안의 무리를 막아선 듯했다. 에리카는 한숨을 삼키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널찍한 복도는 사내들로 인해 바글바글했다.
“무슨 소란이지?”
“에, 에리카 님.”
이안은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가볍게 정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 예의 있는 몸짓인데, 전혀 존중이나 경의가 담겨있지 않았다.
“무슨 소란인지 물었다. 이안.”
“데르가의 뒤를 쫓다 돌아왔으니, 볼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이안의 눈짓에 전사가 자루를 냅다 바닥에 던져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복도가 쿵, 울릴 정도다. 에리카의 부하가 주춤거리며 다가가 자루 입구를 칼로 잘라냈다.
“흐익!”
안에서 굴러나오는 것은 사병들의 머리였다. 뜯겨나간 것도 있었고, 깔끔하게 잘린 것도 있었다. 역해진 에리카가 입가를 가리자, 전사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런. 실례했소이다. 브라츠를 피바다로 만들었기에, 이런 것도 익숙한 줄 알았소.”
“입 닥쳐! 이것들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아, 진짜는 여깄지.”
쿵!
다시 내던지는 포댓자루 하나. 소리가 남달랐다.
이번에는 에리카가 직접 입구를 열어 안쪽을 살폈다. 복면을 뒤집어쓴 데르가가 꼼꼼하게 포박되어 있었다.
“데, 데르가?”
“진짜입니까?”
“맞는 것 같습니다.”
실신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조사단원들이 머뭇거리며 에리카를 돌아봤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제 좀 믿을 만하십니까?”
“…흥. 재주가 영 없는 건 아니었군. 데르가를 지하 감옥으로 옮겨라!”
“아, 네!”
단원들이 데르가를 끌어당겼으나, 워낙 뚱뚱한 몸뚱이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등에 짊어져도 한 걸음 떼기가 무섭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심, 조심!”
“으악!”
쿵!
그걸 보며,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겠나. 천려족은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도와줄까? 그대로 가다간 지하실까지 굴러갈 것 같은데. 데르가보다 먼저 죽겠어.”
“하하하하!”
“우리가 잡아 오길 잘했네. 아니었으면 어떻게 갖고 왔겠어? 간호 다 해준 다음에 두 발로 좀 걸어보시오, 했으려나?”
침묵하던 카칸티르마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에리카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자, 이안은 넌지시 말을 돌렸다.
“그래, 이제 데르가도 잡아 왔으니 어쩌실 예정입니까? 가능하다면 서둘러 처형식을 치르고 떠나주셨으면 합니다만.”
“말이 아주 건방지군, 이안. 나는 아직 임무가 다 끝나지 않았다. ‘브라츠’라는 성을 가진 자들을 모두 처단해야 해.”
“그렇다는 말은?”
“그중 주요 인물인 메리 부인과 첼을 아직 못 찾지 않았나. 그대들도 한가하다면 마을로 내려가서 찾아보지. 그 참에 거기서 지내도 좋고.”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은요?”
“거의 없네. 사라진 날을 특정할 수 있어. 그날은 성벽을 나간 여인이 없었으니까.”
그러곤 에리카는 하나로 묶은 머리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집무실로 되돌아갔다. 저 자리가 꼭 그곳이라는 걸 은연중에 주장하는 것이다. 데르가를 어쩌지 못하는 부하들만 복도에 남아 난감하게 쩔쩔맬 뿐이다.
“저자들을 도와 데르가를 옮겨주어라.”
“네. 카칸.”
카칸티르는 부하에게 지시 후, 이안에게 고갯짓했다. 잠깐 얘기 좀 했으면 좋겠다는 시선이었다. 이안은 흔쾌히 그의 뒤를 따라 복도 뒤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다 멈칫거렸다.
“왜?”
베릭이 눈치도 없이 동행한 탓이다.
이안은 주위의 시선을 잠시 보는 척, 고개를 좌우로 돌린 다음 지시했다.
“너는 따라오지 말고, 필리아에게 가보거라.”
“아아아! 맞다! 네 친엄마?”
“그래. 베릭 네가 은신을 도왔으니 길을 알지 않느냐.”
“알지, 그럼.”
자신 있는 대답과 달리 표정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설마 잊은 거 아니겠지? 이안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하자, 베릭이 후다닥 저택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안 경.”
“네. 카칸.”
이안은 베릭을 내버려 두고서 카칸티르와 마주했다. 그의 표정이 자못 딱딱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