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1
제431화. 대회의에 홀로
비탈길을 오르는 마차.
러더포드는 푹신한 곰 가죽 위에 몸을 비스듬히 걸친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느릿한 마차의 움직임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감각과 함께 작은 일렁임이 일어났다. 곧게 하늘로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 역시 흔들렸다.
“아.”
“왜 그러십니까?”
러더포드는 부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궐련을 집어들었다. 깊게 마시는 연기 속에서 러더포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몬에게 걸어두었던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여섯 번째 감각으로 이어져 있던 실이 끊어지는 기분이다. 그가 어찌하여 마법을 발동시켰는지는 명확하였으나, 생사를 알 수는 없었다. 머리통이 날아갔으면 그대로 끝인데, 어쩐지 느낌이 기이하단 말이지.
러더포드는 작게 열린 마차 창문 밖으로 궐련 연기를 툭툭 털어대며 일렀다.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는데. 다몬 왕이 죽었을 수도 있겠어.”
“발동한 것입니까?”
“어어. 그렇네. 근데 시원치가 않아.”
“마부를 재촉하도록 하겠습니다.”
톡톡. 부하는 마부석 쪽 창문을 두드리며 손으로 수신호를 주었다. 바짝 긴장한 마부는 말고삐를 팽팽하게 잡아당겼으며,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마차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러더포드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찮은 인간이 두 발로 걷고 뛰는 것과 같이, 마치 자신이 대지를 기어다니는 한 마리의 벌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러더포드의 기분 변화를 눈치챈 부하가 슬쩍 말을 붙였다.
“아니면, 러더포드 님과 마차 일부만 바리엘 근처로 보내심이 어떠십니까?”
“되었다. 먼저 가서 무엇 하려고. 무기 없이 적진으로 달려드는 것과 무엇 달라. 다몬이 죽었으면 죽은 대로, 살았으면 산 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애들 힘 아껴야지?”
러더포드가 싱긋 웃으며 질책하자,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바리엘로 돌아가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단순히 대지를 밟고, 제국민을 눈에 담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는 게다.
황궁으로 입성하여 황실의 핏줄이 자신을 보게 하고, 나아가 자신의 이름이 다시금 역사서에 새겨지는 일이 될 터. 러더포드는 흥분과 긴장이 한데 섞인 한숨을 궐련 연기와 함께 뱉어냈다.
“너무 오래 걸렸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었다. 맨 처음, 기억의 시작. 반도르라는 이름부터 하여 수많은 죽음과 삶 사이에서 억겁을 살아왔다. 부하가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오래 걸린 만큼, 러더포드 님의 의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러더포드는 희게 웃으며 부하의 턱을 붙잡고 살짝 벌렸다. 혓바닥 옆으로 살짝 보이는 검은 무늬. 다몬과 같은 것이다. 러더포드는 그의 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물었다.
“그리 생각하니?”
“물론입니다. 러더포드 님은 존재만으로 신과 가까우신 분이니까요.”
“…그것이 어찌 내 의지일까.”
반도르. 러더포드는 이미 까마득하게 바래버린 자신의 첫 육신을 떠올렸다. 바리엘을 위하여, 마법사의 신념을 위하여, 모든 것을 짊어지고 균열로 몸을 내던졌으나 자신에게 남은 것은 저주와 같은 영생이었다.
“지긋지긋하다.”
연속된 죽음이었다.
어느 순간은 가이아 끝 쪽의 유목민이, 어느 때는 망망대해와 같은 블라스터 해의 떠돌이 어부가. 그리고 또 어느 순간은 사지가 잘린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죄인이, 어느 땐 형제의 알력 다툼에 감금되어 말라 죽어가던 귀공자…….
이 모든 것들이 연쇄적으로 러더포드를 덮쳤었다. 죽음, 죽음. 그리고 또 죽음으로 말이다.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 속에서 러더포드는 어느 순간 전의를 상실하고 그저 겪은 것을 버텨냈다. 그러다 어느 날, 그자를 만난 것이다. ‘비밀을 먹는 집시’.
“클라크는?”
“바로 뒤쪽 마차에 있습니다. 호출할까요?”
“아니. 되었다. 연인 만난다고 가슴이 설렐 것인데, 무엇 하러 방해해. 나 또한 그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리엔을 만나는 클라크와, 억겁의 죽음 끝에 바리엘을 만나는 러더포드. 그가 궐련을 비벼 끄자, 부하는 다시금 마부석 창문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러더포드가 탄 마차의 후미로, 1백 대에 가까운 크고 작은 마차들이 빠르게 달라붙었다. 이어서 마차 행렬의 선두에서 길라잡이 하는 수십 마리의 흑마(黑馬).
저 창공 위, 신께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필시 제일 먼저 눈에 띌 만한 위용이었다.
* * *
“헉, 이, 이게 무슨-”
“상황 설명은 나중에 하고, 어서! 지혈을!”
“아, 예예. 다, 다몬 왕 맞으시지요? 잠깐 실례합니다. 지혈제를 가져와!”
“혀 조각은 어찌할까요?”
“붙일 수 없을 것 같은데. 어허, 혀가 잘린 자들은 몇 봤어도 이리 산산이 조각난 경우는 처음이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황궁의들이 엉망이 된 심문실을 두리번거리며 다몬을 바로 눕혔다. 처참하다는 말 외 딱히 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피범벅이었다. 입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는데, 혀가 조각난 것은 물론이고, 그 내부가 말도 못 할 정도로 끔찍했다.
의사들은 차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거렸고, 이내 치유 마법사들의 등장에 반색했다.
“기(氣)를 넣겠습니다. 곧 있을 대회의의 중요 참석인인지라, 살리는 게 우선이거든요.”
“아니, 이 꼴을 하고 어찌 증인으로 세운단 말입니까? 불가합니다. 의사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불가하다는 뜻이에요.”
“전범의 수장이고, 그 전쟁이 막 끝나 보고하는 자리입니다. 시체라도 데려다 놓는 것이 맞습니다.”
“예. 그리고 그 혀 조각, 단단히 보관하십시오. 이안 님이 다몬 왕을 함부로 대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저 혼자 폭발하여 사달이 난 것인데, 이안 님이 괜한 오해 받으면 곤란합니다.”
“거참, 혀 조각 담아둘 것을 가져오시오!”
“지혈제 여기 있습니다!”
타닥타닥!
콰앙!
계단을 오가는 자들의 바쁜 발걸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복도 끝 쪽, 로만드로는 서기들을 가로막고 그들이 작성한 것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들은 펜을 꽉 붙잡은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로만드로를 노려봤다.
“점 하나라도 찍었다가는 바로 고발할 것입니다.”
“거참,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펜은 그쪽이 들고 있잖습니까? 저 사달이 나기 전, 이안 님이 다몬과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정도는 보좌관인 내가 알고 있어야지요! 떽떽 시끄럽게 굴지 말고, 좀 가만히 있으십시오.”
“떽떽? 떽떽이라 하였습니까?”
“에잇! 자꾸 말 거니까 읽었던 부분 또 읽게 되잖아!”
로만드로가 앙탈 섞인 짜증을 부리자, 서기들은 황당하다는 낯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이내, 건드려봤자 자신들만 손해라는 걸 깨달았는지, 펜을 붙잡은 채 가만히 침묵했다.
사락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소란 속에서 들려왔다. 모두 읽어내린 로만드로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이안을 쳐다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일까, 저 경이로운 소년은.
“이안.”
로만드로의 부름에 이안이 고개를 틀었다. 로만드로는 이안의 곁에 가까이 붙어 서기들의 기록지를 툭툭 두드려댔다.
“그러니까, 러더포드가 마법사 출신이라는 건 다몬 왕의 반응으로 보아 기정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 저리 혓바닥이 산산조각 날 리 없지요.”
“좋아. 그렇다 치자고. 그런데 마법사가 마력을 잃는 게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난 들어본 적 없는데. 물론 내가 마법사는 아니니까 잘 모르지. 근데 마법은 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 죽지 않는 이상, 어찌하여 그것이 소멸돼?”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 뭐?”
“죽음이요. 죽음 외 마법사의 힘을 앗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러더포드는 이미 한 번 이상 죽었던 자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사, 사령술이랑 연관이 있을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 희박합니다. 하샤가 러더포드에 대해 특별히 언질한 것이 없었으니까요. 아스타나는 사령술 쪽에 있어서 가장 권위 있는 인재들인데, 그쪽을 제외하고서 러더포드가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드갈을 포함하여 하는 행보로 보아, 그저 죽음을 겪었던 마법사라 이르는 게 더 자연스럽겠습니다.”
“어허, 참나. 잠깐만. 난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죽었던 자가 어찌하여 멀쩡하게 살아서 저리 움직인단 말인가? 회귀와 환생에 대하여 무지한 터라, 로만드로는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안과 달리 말이다.
‘지금 이 몸은 서자 이안의 몸. 백 년 후, 바리엘의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서자 이안의 몸에 마력이 남아있다면, 그의 영혼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 죽지 않았다는 게다. 저와 다몬과 같이 어디선가 시간선을 달리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도 그럴 것이, 황제 이안이 서자 이안으로 빙의한 것은 데르가의 뒤뜰, 식사 자리에서였다. 독극물이라도 먹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서 서자 이안이 죽음을 맞이할 연유는 하등 없다.
“이안.”
로만드로는 손끝에 침을 탁탁 발라가며 기록지를 넘겨댔다. 그의 얼굴에 결연함이 가득 차 있었다.
안 그래도 황실과 연이 어쩌고저쩌고. 이드갈을 만들었네, 어쩌고저쩌고. 전쟁 영웅인 이안을 두고 별별 헛소리가 나도는 지금이었다.
다몬의 상태마저 저리된다면, 필시 의문이 새로이 증폭될 것이다. 혐의점들을 부인하고 덮기 위해, 이안이 다몬을 해하였노라고.
“변론을 꼼꼼하게 준비하는 게 좋겠어. 막 전쟁이 끝난 터라, 관료들 역시 크게 날카로이 덤벼들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이게, 하나하나 문제점들이 심상치 않아. 꼬투리 잡히지 않게, 응?”
‘서자 이안이 살아있다면,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시간선을 다르게 달리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필리아를 찾아오지 않을 리 없는데. 내가 그런 것처럼 그 역시 그럴 수 있다.’
“우선 행정부 쪽에는 내가 힘을 좀 써보겠네. 다른 부서보다 그쪽은 유대가 좀 있잖아. 여러 방면으로. 문제는 버고스 측에서 제기할 다몬 왕의 신변인데, 아직 그쪽에서도 들어온 입장이 없으니 대회의를 서둘러 치르는 것이 우리에게 좋겠네.”
‘균열 아래 있는 심연. 심연에 시공간이 없다면, 그곳에 나움이 있을까? 기록을 따지자면, 반도르는 균열 아래 다녀온 자다. 러더포드를 직접 만나 묻는 수밖에 없는데, 그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안.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니? 내 말 듣고 있어?!”
“…물론입니다.”
“내가 방금 뭐라 그랬는데?”
“꼼꼼하게 준비하자고요.”
“이봐, 이봐. 듣는 척하고 반쯤 흘리고 있었구먼!”
“아닙니다. 정말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로만드로 님. 기록지는 서기들에게 돌려주고, 황궁자료실로 좀 가보시겠습니까? 가서 반도르라는 자에 대한 기록이 더 있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그리고 균열과 심연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도 모조리 가져와 주시고요. 단 한 글자라도 좋습니다.”
“아니이! 기록지를 돌려주면 어떡해? 서기들이 황실에 무어라 쫑알댈 줄 알고?”
“그러면 저희가 계속 갖고 있게요?”
“그건 아닌데-”
“로만드로오오오! 님! 로만드로 님!”
우당탕탕!
콰앙!
그때, 계단을 구르는 누군가. 로만드로는 안 봐도 빤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황궁에서 저리 천방지축으로 움직이는 자는 베릭밖에 없었으니까.
“시끄러 이놈아! 지금 중요한 순간이란 말이다!”
“나도 중요하거든!? 비비안나 애 낳는다!”
“어?”
투욱. 기록지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로만드로. 토끼처럼 눈이 커지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애 낳는다고요. 응애응애. 비비안나 쓰러지는 거 보고 왔으니까, 빨리 가는 게 좋을 건데?”
“비, 비비안나가 왜 쓰러져?”
“몰라. 가서 직접 보세요.”
“이, 아니…….”
로만드로는 허겁지겁 종이를 주워 담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손길을 가볍게 제지하는 이안. 그는 손수 무릎 꿇으며 로만드로에게 일렀다.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서둘러 가보십시오.”
“어, 저기, 이안.”
“괜찮습니다. 대회의 혼자 참석하는 게 처음도 아니고. 아이의 시작점에 어미와 아비가 함께해야지요.”
로만드로는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 같았다면, 평소 같았다면 미안하다는 말만 냉큼 남기고 뛰어갔을 터인데 말이다.
어쩐지 이대로 이안을 홀로 대회의에 보내면, 거나한 사고를 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것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안, 그러면 내 비비안나랑 아기만 보고 금방 돌아오겠네. 응?”
“되었습니다. 서두르세요.”
“아, 거참. 그, 아무튼, 다시 봄세. 베릭!”
“마차는 밖에 있어!”
“그래. 알겠다. 고생했다! 비켜!”
타닥타닥!
로만드로는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고, 이안은 기록지를 그러모은 다음 서기들에게 건네주었다.
경계의 눈빛으로 이안을 지켜보고 있던 자들. 슬쩍 손을 뻗어 종이를 채어가듯 가져갔다.
“그대들은 이제 돌아가시게. 그리고 여기서 듣고 겪은 것들을 가감 없이 대회의에서 증언해.”
“…이르지 않아도 그리할 것입니다. 괜한 걱정이시군요.”
“원래 걱정은 괜히 하는 것 아니겠나.”
이안이 싱긋 웃자, 서기들은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마법사들을 헤치고 심문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디딘 곳마다 다몬의 피로 얼룩진 발자국이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