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5
제435화. 정체성
“심연에서 만날 자가 있으니, 저는 제 모든 걸 내어놓고서라도 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
이안이 진에게 그리 이르는 순간, 아이는 무너졌다.
자신이 알던 이안이 맞나? 저와 같이 바리엘만을 마음에 품고서 온 일생의 목표를 함께 보고 있다 여기던, 그 이안 말이다. 언덕 위의 저곳이 저들의 쉼터라 여겼거늘, 이안은 여기서 그만하겠노라 자신의 손을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더욱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겠지. 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이안은 다정히 훔쳐주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대체 심연에 누가 있기에 그런 것인가? 이곳에는 나도 있고, 시아도 있으며, 베릭이 있다. 그들만 있나? 로만드로와 그대를 따르는 마법사들 그리고 어미인 필리아가 있어. 제국민들의 무게는 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터. 모든 자들을 뒤로할 만큼 소중한 자인가?”
이안의 손끝이 잠시 멈칫거렸다. 어찌 사람 하나하나에 무게를 매길 수 있을까?
진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이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안 될 걸 본능적으로 알았으나, 지금 진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를 두고 갈 만큼 그자가 소중하다는 걸 내게 납득시켜. 그렇지 않으면 불허하겠다. 이는 바리엘의 황태자로서 명하는 것이니.”
황태자의 불호령에 이안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이와 시선을 맞추는 녹안에는 따뜻한 빛이 감돌았다.
말없이 다정한 그와 마주 보고 있자니, 진은 더더욱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전하. 그자는 말입니다.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어 저를 이리 존재하게 하였습니다. 외람되지만, 황궁과 마법부에 온 것도 모두 그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안의 마음 한쪽,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자로구나. 진은 코를 훌쩍이며 눈을 바로 떴다.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으면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다인가?”
“물론, 이곳에 온 것은 그자를 위해서였지만, 제가 행한 모든 것은 바리엘과 전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것만큼은 제 진실한 마음이니, 알아주십시오. 그리고 전하, 전하를 비롯하여 모두가 제 마음 한쪽을 가져갔습니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일렀다. 말갛게 웃고 있었으나, 어쩐지 그의 눈동자는 젖어있는 듯했다.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막막한 진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저는 제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길목에 전하께 꺾어드릴 수 있는 꽃이 있거늘, 어찌하여 제가 맨손으로 등을 돌리겠나이까?”
“이안 경. 자네 정말 못됐네. 관료들의 말이 맞았어.”
“하하. 그렇습니까. 관료들은 저마다의 일생 동안 황궁을 위해 몸 바친 자들입니다. 필시 보는 눈이 정확하겠지요. 전하께는 그리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못됐어. 모두가 입 모아 그리 말할 것이다. 특히 필리아는 더더욱 상심하겠지. 오래전의 작은 기록 하나만 보고 몸을 내던지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혹여 그것이 참된 정보라 한들, 장장 십 년일세. 무사히 돌아온다는 보장조차 없고. 그런데도 가는 걸 원하는가? 정녕?”
“전하. 조금 더 못된 말을 해도 될까요?”
이안은 자신의 소매를 꽉 붙든 진의 손등을 토닥였다.
“반도르라는 자보다 제가 더 유능합니다. 그자는 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저는 그럴 것 없이 더욱 이르게 균열 조사를 마칠 것입니다. 이는 바리엘이란 이름 앞에 맹세할 수 있지요.”
장난스러운 이안의 말에 진이 입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황궁 내 마법부를 스쳐 지나간 반도르라는 자와 달리, 이안은 바리엘 역사에 있어서 분명 중요하게 서술될 자였기 때문이다.
천재적이고 경이로운 마법적 재능을 제외하더라도,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바리엘에 남긴 족적은 가히 여러모로 대단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클리포포드의 균열은 단순히 클리포포드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이아의 중심인 바리엘이 손수 나서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 년 후의 바리엘에서, 이안 베로시온이 아는 한 클리포포드의 균열은 없었던 일이었다.
회귀한 다몬으로 인해 일그러져버린 과거. 이안은 현재의 바리엘과 미래의 바리엘을 위하여, 그걸 수습할 의무가 있었다. 시간선을 다르게 달리는 자는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미래 바리엘의 황제였으니까.
“…그것은 이해하네.”
“전하. 그리고 전하께서 아실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안은 시아오시 쪽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문단속을 철저히 해달라는 신호였다. 뒤로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우던 시아오시가 문 쪽으로 다가가 틈 사이를 살폈다.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깊이 논의하는 몇몇 자들이 이쪽을 신경 쓰고 있었으나, 간 크게 소리를 엿들으려는 자는 없었다. 가끔 황궁에서는 아는 것이 독이 되어 제 피를 더럽히곤 하였으니. 날카로운 바람과 같이 움직이는 이안과 진 사이, 그 누가 다가올 수 있을까.
끼이익.
“무엇인가? 이제는 그대와 대화하는 것이 두려워.”
“다몬 왕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응?”
진이 인상을 찌푸렸고, 문을 단단히 닫던 시아오시 역시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다몬이 쫓던 집시에게 들은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그 집시를 만나보셨지요?”
“그, 그랬지.”
“비밀을 먹는 자라, 다몬 왕이 지닌 비밀을 배 속에서 꺼내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다몬 역시 시인한 것이니, 이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패전하여 이미 포로가 된 몸이니, 전하께서는 사실만을 알아둔 채 크게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잠깐만. 두 번째 삶이라면, 어떤 의미인가? 내가 이해한 그것이 맞는가?”
“예. 말 그대로, 다몬 왕자였던 시절과 다몬 왕이었던 시절을 동시에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 그게 어찌 가능해?”
“세상에는 가끔 인간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모든 것이 신의 안배이니, 의미를 헤아릴 수 없음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진은 이안의 중얼거림에서 난생처음, 그의 투정과 한탄 따위를 느낀 것 같았다. 언제나 고고하여 지평선 너머만 바라보는 자였는데, 신이라는 존재 아래에서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이 여실했다.
진은 이안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르려던 문제가 무엇인가?”
“아, 다몬의 뒤에 러더포드가 있다는 것입니다.”
“러더포드면 상단인데, 어찌하여 나라의 왕 뒤에 일개 상단이 존재해?”
“일개 상단이 아닙니다. 전하. 이드갈의 근원이자, 다몬 왕의 회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집단입니다. 잠시 이것을.”
이안은 무릎 꿇었던 것을 일으켜 세워 제 자리의 보고서를 가져왔다. 다른 관료들에게는 전해주지 않은, 진만을 위한 서류였다. 거기에는 이제껏 이안이 얻은 모든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진은 급히 글자를 훑어내렸다.
차락.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지만, 다몬이 그걸 해냈습니다. 여러모로 대단한 왕입니다.”
반어적인 투가 가득했으나, 진은 대꾸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안의 보고서만 읽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번에 머릿속을 밀고 들어왔다. 이안이 변경에 있었을 때부터 은근히 인기를 얻었던 이드갈 악세사리. 다몬 왕의 재화와 형제자매들. 마리브의 내란. 전쟁…….
“러더포드라는 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안타깝게도,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행보로 보았을 때 단순히 재화나 명예, 권력 등의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번 전쟁 사태로, 바리엘을 제외한 이웃 국가들에 이드갈 유통로가 뚫렸겠지요.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터.”
이안은 손끝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러더포드. 자신은 그자를 모르지만, 그자는 자신을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서자 이안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하지만 정보의 불균형에서 오는 시야 차이는 생각보다 깊은 각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안은 그자를 볼 수 없지만, 그자는 이안을 볼 수 있는 시야의 차이.
“다몬 왕의 처단을 두고 러더포드가 어찌 나올지를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안은 그리 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시금 멀어진 이안. 진은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으며 마땅찮은 눈빛을 보냈다.
“음, 전하. 하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부탁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금방 풀어졌지만 말이다. 이안이 언제고 부탁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었나? 무엇이든 설계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냈던’ 이안이다.
“무엇인데?”
“다음으로 올 마법부 장관은 원활한 업무를 위하여 저와 다른 색을 띠게 될 것입니다. 분열된 마법부를 수습하기 위하여 강력한 내부 정책이 필요하겠지요.”
“마법부가 분열될 걸 알고 있군.”
“그럼요. 수장인 제가 큰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흔들리는 자도 있으면 당연지사 나아가 우직하게 머무르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비난하고 치하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마법부는 크게 휘청이겠지만 절대 꺾이지 않고, 깨지지 않습니다. 신의 힘을 지닌 자들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내부 정책이라 하면, 별채 건설을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장관의 정치적인 입지와 무관하게, 웨슬리부터 마법부 전체가 바라던 것입니다. 예산은 책정된 상태 그대로이니, 황실에서 조금만 힘을 실어주신다면 무리 없이 진행 가능합니다.”
“내 들어줄 연유가 하나 없소.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안 경 스스로가 내 발판이 되어준다 하지 않았나? 그리 그대를 떠나보내고 나서, 마법부 별채를 용인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음이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 경이 못돼서 싫으네.”
이안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재고(再考)하여 주십시오. 마법부 별채가 완공되면, 저는 균열을 헤집는 와중에도 황궁으로 귀환할 것입니다.”
진의 귀가 쫑긋거렸다. 지금 이안이 균열 조사를 중간에 그만둘 수 있는 조건을 알려준 것이다. 물론 돌아온다고 한들, 그들의 모든 것이 이전과 같지는 않겠지만.
“차기 장관이 저를 반기지 않을 것이니, 오래 머물지는 또 모르겠습니다.”
별채가 완공되면, 그리고 균열에서 심연에 대한 단서를 얻어내면, 이안은 필시 백 년 후의 바리엘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금 떠날 터.
이안은 진에게 넌지시 단서를 주었지만, 진은 알아채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차기 장관은 헤일 아니면 아코렐라 아닌가? 어찌 그대를 반기지 않아?”
“흘러간 물은 계속 그리 흘러가야 합니다. 물이 흐름을 거스르고 되돌아왔는데, 그 누가 반기겠습니까? 또 장관이라는 자리에서는 사적인 친분은 철저히 배제하는 게 맞지요. 아, 그리고 아코렐라는 제외해 주십시오.”
“우웅. 그렇지.”
잠깐 침묵이 오갔다. 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헛기침을 해댔다. 이안에게 말려서는, 대화의 끝이 가벼워지고 말았다.
“내, 내 지금은 혼란스러워 잠시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네. 모두에게 전해 회의를 하루 미루도록 하지. 다몬 왕의 회복도 그러하고, 지금으로는 모두가 적합한 의견을 내놓지 못할 것 같네. 누구 덕분에.”
벌컥!
이제는 대놓고 면박 주는 법도 아는구나. 이안이 감탄하려는 순간, 진은 성큼성큼 걸어가 대회의실을 벗어났다. 갑자기 열린 문에 관료들이 화들짝 놀라며 진의 뒤를 따랐고, 이안은 홀로 앉아 잔 한숨을 내쉬었다.
균열, 그 뜨겁게 일렁이던 틈새 속 심연이 있다. 그러니 발걸음에 착잡한 무게를 달지 말자. 이안은 텅 빈 눈을 감으며 흐릿해지는 미래를 떠올렸다.
백 년 후의 바리엘, 자신은 황제 이안 베로시온이다.
* * *
“…이안이는 이 노래 잘 몰라?”
필리아의 떨리는 목소리에 이안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노래에 의미를 잔뜩 부여하는 모습.
이안은 브라츠 백작을 통해 전해 받았던 어미의 쪽지를 단숨에 떠올렸다. 안다고, 어머니가 어릴 적 저에게 들려주었던 추억의 선율이노라고, 이안의 혀끝에서 정석적인 대답이 맴돌았으나 그는 주저했다.
이안의 시선 끝에 필리아의 배가 들어왔다. 임신한 태가 조금 나는가? 자신이 균열로 들어가고, 미래로 돌아가면 저 여인은 또다시 아들을 잃게 된다. 서자 이안이 제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상 말이다.
“예. 익숙하긴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이안은 자신을 가리켜 ‘사랑하는 돌덩이’라 일컫던 필리아의 음성을 되새기며, 그리 일렀다.
자신은 서자 이안이 아니니, 혹여 사라진다 한들 흔들리지 말고 거센 물결을 헤쳐가시오. 역시나 혀끝에서 내뱉어지지 않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