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37
제437화. 꿈
“전하.”
이안은 자신을 부르는 나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이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하지만 별채는 계속해서 적요했고, 나움은 창문 밖 아스러지는 이름 모를 꽃들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이안은 그런 나움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모든 것을 시선에 담았다. 왜, 가끔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특별할 것 없이 일상임이 분명하건만, 그리하여 저것만큼은 뇌리에 남아 언제고 문득문득 떠오르겠다 싶은 순간.
이안은 지금이 그러한 순간이라는 걸 알았다.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수 가지 색의 꽃비와 나움의 뒷모습.
“어찌 불러.”
“전하께서는, 전하를 기억하는 문장이 어찌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까?”
훗날, 세월에 바래어 이안이 역사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 때, 후손들이 이안 베로시온을 어찌 후술하고 평가하면 좋을지를 묻는 것이었다.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인데.”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큰 의미가 있고, 지금과 같이 전하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원하시는 바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삶의 큰 부분을 차치하여, 바리엘이 추구할 미래가 될 것입니다. 어떤 문장으로 기록되고 싶으십니까?”
나움의 물음에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 그의 머릿속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던 사안이었다.
중앙 귀족의 숙청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면 좋을지, 북쪽의 전쟁 시기와 그에 따른 유목민들의 이동 경로, 겨울, 예산 편성과 요즘 계속 추문에 휩싸이는 행정부 관료 따위가 주된 생각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대는?”
“저 말입니까?”
“그래. 그대 또한 내 곁에 있어 역사에 함께 기록될 것인데. 나움, 그대는 어떤 문장으로 흔적을 남기고 싶나?”
이안은 웃으며 질문을 넘겼다. 쉽사리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혀끝으로 흩어져버릴 말이었지만, 지금 뱉어낸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아이에게 수백 개의 사탕이 쥐어졌을 때,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는 감정과 비슷했다.
나움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봤다.
“전하의 기록이 먼저인데, 어찌하여 제 것을 먼저 들으려 하십니까?”
“그래도 말해보시게나. 그대는 어떠한 바리엘을 겪고, 만들어가고 싶은지.”
“저는…….”
나움이 손끝으로 창문을 가볍게 매만졌고, 이안은 그 손짓을 따라 지문이 희미하게 남는 것을 보았다. 나움은 무언가 쑥스러운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전하의 뜻을 두고 다른 바리엘을 입에 올릴 수는 없습니다.”
이안의 뜻이 나움의 뜻일 수는 있으나, 나움의 뜻이 이안의 뜻이 될 수는 없었다. 이안은 연신 괜찮다, 서둘러 일러보라 하였으나 나움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이안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며 아름다운 단어를 하나씩 혀끝에서 굴려보았다.
모든 자가 웃고, 온전한 제 삶을 누리고 갔던 대제국 바리엘의 전성기. 가이아가 그 어느 때보다 환했던, 빛의 시대-
“이안은 소년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그때, 서늘한 나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놀란 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세상이 멈추었다. 비단 비유가 아니었다. 창문 밖으로 흘러내리던 꽃비가 멈춰있었고, 웃음 짓는 나움 역시 그대로 멈춰있었다. 다만, 그의 입만은 기괴하게 움직였다.
“이안은 소년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나움?”
“그리고 성년이 되기 전 목이 베였다.”
“나움!”
“이안은 소년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성년이 되기 전 목이 베였다! 이안은 소년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성년이 되기 전 목이 베였다!”
나움은 온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쳤고, 이안은 제 목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두 손으로 틀어막았으나, 손 틈으로 쏟아지는 붉은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이안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나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크로니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나움. 크로니는 그때와 같이 쓰러진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고, 이안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이안 베로시온. 나움이 어디에 있을까?”
* * *
“허억!”
이안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도 이만한 악몽이 없으리라. 심장은 계속 쿵쿵 울려댔고, 식은땀은 끊이질 않았다.
언제 잠들었던가? 이안은 자신의 몸짓에 흐트러진 서류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닌 걸 알지만,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현실 감각을 일깨우려 했다.
“하아.”
목이 베이던 그 찰나의 순간, 이안은 섬찟한 감각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 신경과민인 것 같노라, 이안이 젖은 머리칼을 툭툭 털며 물병을 집어 들었다. 언제나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 텅 비어있다.
‘하필이면-’
“밖에 누구 없는가?”
이안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다독이며 그리 일렀으나, 바깥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깨에 담요가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밤중에 사람이 들었다는 뜻인데, 어찌하여 물병은 비어있지?
“…밖에 아무도 없어?”
굉장히 고요했다. 문을 열고 닫는 시종들조차 반응이 없다니. 이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꿈속처럼, 모든 게 멈춰버린 게 아닐까?
끼이익!
쿠웅!
이안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혔고, 이내 아주 가관인 풍경과 마주했다.
“다들…….”
“야야, 이안 님 나오셨다. 다들 앞에 봐.”
“어라? 이안 님,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땀도 많이 흘리시고. 어디 아프십니까? 의사를-”
“아니이! 좀 닥치고 대열 정돈하라고!”
“이안아아! 이 새끼들이 나 막 묶어서 못 움직이게 했다! 근데 너, 왜 그렇게 젖었어? 안에서 세수했어?”
“이게 누가 들으면 네가 묶는다고 묶이는 줄 알겠다? 같이 끼기로 했으면서 은근슬쩍 발 빼는 거 보소? 간잽이 느낌이 많이 나는데? 베릭 제외해버려? 엉? 확!”
“아니, 묶은 건 사실이잖아!”
“네가 자꾸 집무실로 기어들어 가려 하니까!”
아까의 그 적막이 무색하게 시끄럽고 황당한 모습들이다. 이마에 붉은색 머리띠 하나씩 묶고, 마법사의 로브를 거꾸로 입은 게다.
이안은 이게 무슨 소란인지, 어이없다는 뜻으로 팔짱을 꼈다. 그가 벽에 몸을 기대자, 마법사들은 쭈뼛쭈뼛 등 뒤에 숨긴 피켓을 들어 보였다. 이리 해도 되겠지? 서로 눈치 살피는 것이 참으로 조심스러워 보였다.
“이, 이안 님께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 표하는 바입니다!”
“헤일은 어디 있지? 다들 이러고 있는 동안, 헤일은 대체 무엇 하고 있어?”
“피켓 나뭇조각 만들러 뒷마당 가셨는데요.”
“…미치겠군.”
“이안 님이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그, 계속 말해도 될까요?”
이안은 어디 해보라는 듯 오른쪽 손을 까딱거렸다. 단체로 돈 것이 아닌 이상, 이럴 수는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시위라니! 이안은 살다 살다 이런 일도 겪는구나 싶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안 님!”
“…뭐.”
“마, 마법사들의 인권과 발전하는 마법부를 위한 연대입니다. 주, 줄여서 마마연.”
“아주 다채롭게 헛짓거리들을 하는구나.”
“이안아! 이름 이상하지? 참고로 나는 반대했다.”
“베릭이 서명 제일 먼저 했습니다.”
스윽.
마법사 한 명이 이안에게 서명서를 내밀었다. 맨 위, 흡사 소고기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글씨를 쓰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게 편한 베릭의 작품이었다.
이안은 마법부 전원의 서명이 확보되었다는 걸 확인하곤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래서, 지금 다들 뭐 하자는 것인지 묻는 신호였다.
“같은 급의 공무원 중 마법사만큼 대우를 잘 받는 자들이 있던가? 임금 협상에 관한 사안은 매년 초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처우 개선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었다. 이안이 종이를 천천히 흔들자, 마법사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임금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습니다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 난 고기로 달라! 자꾸 깎여서 한 푼 못 받았다!”
“균열 조사와 같이 마법부 사활이 걸린 중대사는 이안 님의 독단적인 결정 외, 저희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진행해 주십시오!”
이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가만 눌렀다.
“그대들의 의견을 들었잖은가? 자원 받겠다고.”
“자원 받겠다 하시고 아무도 안 데려갈 생각 아니십니까? 그렇지 않고서 바로 이안 님이 가겠다고 그리 말씀하실 수는 없지요! 마법사들 자원 받기도 전에, 이미 황궁에서는 이안 님이 균열로 직접 간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숨 쉬는 것도 허투루 안 쉬시는 분이, 이게 의도한 거 아니면 대체 무엇입니까? 해명하십시오!”
“해명하세요!”
“뭔들 알아서 해라! 나는 고기만 있으면 된다!”
와다다 쏘아붙이는 마법사들의 채근에 이안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법부의 인력 손실을 우려한 진과 같이, 이안도 균열 조사에 많은 ‘바리엘’ 마법사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루스웨나나 북쪽 자원자들로도 충분히 조사가 진행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물론, 자신이 중심이라는 전제하에.
“그래서, 무엇을 원하길래 이래? 다들 겁도 없이, 황궁 내에서 붉은 머리띠를 찬단 말인가.”
이안은 혀를 끌끌 차며 가장 가까이 선 마법사의 머리띠를 벗겨주려 했다.
하지만 단호한 손짓으로 이를 거부하는 마법사. 손대지 말라며 슬쩍 상체를 뒤쪽으로 기울였다.
“이안 님만 보라고 본관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건데요.”
“예. 저희 파업입니다. 마법부 일 아무것도 안 하려고요. 심지어는 물 따라주는 시종조차 보기 힘드실 겁니다.”
“물병을 비운 연유가 그것인가?”
“몰라요. 아무튼, 저희가 요구하는 바는 계속됩니다! 자, 첫 번째가 의견 수용. 그리고 두 번째는 사임 금지!”
“사임 금지!”
“이안 님 가면 누가 마법부 돌봅니까? 안 그래도 전쟁 여파로 다친 마법사들이 한 무더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단단히 중심 잡으셔서 마법부 보셔야지요! 이안 님 아니면 헤일 대장, 아코렐라 대장밖에 없는데 우리 다 죽이실 셈이세요?”
“아코렐라 취임 반대!”
베릭이 크게 소리치자, 다들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며 뒤로 물러섰다. 저런 구호는 짠 적이 없는데?
이안은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아주 농성에 독기가 탁, 하고 빠진 것이 오합지졸들이다. 마법사들인지라 마법만 부릴 줄 알지, 뭐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게라. 이안은 황제였던 시절, 영지 독립을 위해, 제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붉은 천을 옭아맸던 자들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거부를 거부하겠다는 손짓으로 기어코 한 명의 머리띠를 벗겼다.
“…이드갈의 발명에 내가 관여되어 있음을, 모두가 알지 않나?”
마법사의 안위를 흔든 자가 어찌 마법부 장관이라는 직책에 앉아있을 수 있을까?
“내가 내려오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다.”
“아아악! 첫 번째 요구 사안 위반입니다. 의견 수용! 모두를 위한 일이면 모두의 생각도 한번 들어보시죠?”
마법사들은 서로 팔짱을 단단히 끼더니 복도를 빈틈없이 채웠다. 이 부분은 일사불란한 것으로 보아, 나름 연습을 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못 나가십니다.”
“차라리 저희를 죽-! 죽이지는 마시고, 적당히 밟고 가십시오!”
“곧 있으면 클리포포드랑 다른 나라에서 사절단이 올 것인데, 마법사들이 이러고 있으면 참으로 보기 좋다 하시겠지요? 예?”
황실 눈 걱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은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다. 하긴, 제아무리 마법사들이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해도 붉은 머리띠의 의미를 모를 리가.
아니지, 잠깐.
“아.”
“왜요? 이제 좀 대화할 마음이 생기십니까?”
이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작게 탄성을 내며 중얼거렸다. 모를 수도 있겠구나. 이안의 시대와 이곳은 백 년이라는 시간적 틈이 존재했으니까.
“클리포포드와 다른 나라에 사절단 일정을 전달하였다 하던가?”
“알고 싶으십니까? 업무 전해주는 시종이 없어서 모르시겠지요? 궁금하시지요?”
마법사들은 맑은 눈을 번뜩이며 더더욱 팔짱을 견고히 했다. 다른 어떤 협박보다 이안에게 아주 잘 먹힐 만한 부분이다.
“일하고 싶으시면, ‘마마연’이랑 합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