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4
제44화. 비밀 공간
브라츠 역사상 이토록 혼란스럽고 어색한 나날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바리엘이라 여겼던 민족끼리 검을 겨눈 것도 모자라, 죽을 거라 예상했던 서자는 귀환했다. 그것도 평생의 적이라 여겼던 천려족을 등에 업고서.
“세상이, 망하려나…….”
늙수그레한 노인이 브라츠 저택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질적인 광경 아닌가? 황궁 깃발을 든 병사들과 천려의 전사들이 함께 주둔해 있다니. 그것도 저택 본관 한 곳에서 말이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리 없는 시체를 수레에 담아 치웠다.
끼익.
저택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난감한 분위기였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는 서로의 존재도 존재지만, 제일 큰 문제가 있었으니.
“메리 백작 부인과 첼의 시체가 안 보입니다.”
“머리 잘린 시체들까지 잘 본 것인가?”
“옷차림새와 손톱 끝까지 확인했지만, 귀족의 것이라 여겨질 만한 건 없었습니다. 강을 떠내려간 시체는 아직 건지지 못해서, 아마 그쪽에 섞여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에리카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데르가의 신병은 확보했으나, 그의 처와 자식인 메리와 첼은 도저히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사지가 찢긴 것들도 확인해 보라.”
“알겠습니다.”
“꼭 시체를 찾아야 한다. 저택도 꼼꼼하게 뒤져.”
죽었다면 시체까지 확인해야만 임무를 완수했노라 말할 수 있을 터다. 게다가 영지를 좀 뒤집었는가?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하면 중앙의 신임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시체를 찾는다면, 알지?”
“황궁에서 임명장이 올 때까지, 잘 숨겨두겠습니다.”
메리와 첼이 죽었다면, 데르가의 처형을 미룰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브라츠에 머물 명분도 없어지는 것. 천려족이 점령한 영지를 그녀가 다시 입성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지 않은가.
‘제기랄!’
에리카는 다시 손톱을 물었다. 잘게 짓이겨진 손톱 찌꺼기가 입안에서 마구 굴러다녔다.
한편, 복도 뒤쪽 작은 방.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리고 이안은 빙 둘러 앉아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네르사른이었다.
“이안 경. 에리카 말입니다. 아무래도 작위 임명장을 기다리는 눈치 같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사실 변경 끝자락까지 오는 강행군인지라, 조사단장으로 임명됐을 때부터 내정되어 있었을 겁니다.”
“에리카가 여기 내려온 지 보름이 다 되어 갑니다. 곧 있으면 임명장이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주둔하는 것이 곤란해집니다.”
네르사른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리카가 말했듯이 작위 임명은 황제의 소관이다. 제아무리 게일 2황자가 에리카를 밀어준다고 한들,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데르가를 체포한 것이 오늘이니, 당장 오늘 전서구를 날린다 하더라도 보름 가까이 걸릴 것입니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황제의 명은 무겁고 귀한 것인지라, 전서구를 이용할 수 없고 오로지 파발로만 내려지기 때문이다.
네르사른이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에리카가 영주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 아닌가. 천려는 이미 많은 것을 투자했네. 그런데 전부 생으로 날릴 판이야.”
이안을 밀어줌으로써 도모할 미래의 이익 그리고 데르가의 직접적인 처단 등등. 천려는 이번 계획에서 많은 것을 양보한 셈이었다.
“아니요, 카칸. 상황의 흐름이 좋습니다.”
“설명할 수 있겠나?”
“우선 메리와 첼의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좋은 거라고? 덕분에 저자들도 이 저택에 엉덩이 들이밀고 눌러앉았거늘.”
“에리카가 스스로 불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임무는 브라츠 가문의 궤멸이요,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이쯤 하자 먼저 알아차린 네르사른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다면?”
저들이 여기에 남아있는 것은 메리와 첼이 영지 안에 있을 거라는 명제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확인한다면, 그들은 의무적으로 메리와 첼을 뒤쫓아야 했다.
미끼가 되어주는 것이다.
“또한, 중앙에서는 절대 저를 내치지 못할 겁니다.”
“근거는?”
“카칸께서 궁금해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요.”
이안이 마력운용자라는 것. 천출이지만 감히 에리카를 밀어낼 수 있노라고, 이안은 자신 있게 주장했다.
“그래. 좋아. 이제 겨우 데르가를 잡았을 뿐이니, 더 지켜보겠네.”
“감사합니다. 카칸.”
“그러면 우리는 이제 뭘 해야 하지? 단장의 말대로 마을로 나가 시체를 뒤져봐야 하나?”
“아니요. 대신 부상자들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전투가 일단락되었으니 당분간은 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영지민의 지지 역시 변경에서는 중요한 초석 중 하나니, 그리 해주십시오.”
카칸티르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이거 보면 볼수록 깜찍한 놈 아닌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처럼 천려의 힘을 이용해서 바리엘에 온갖 도움은 다 퍼주고 있다.
고작 열여섯이라고 했나?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맘때의 아이처럼 이안은 배시시 웃으며 카칸티르의 눈빛을 받아냈다.
‘뭘 그리 보시나. 틀린 말도 아닌데.’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중앙 입장에서 변경은 세금 잘 내고, 국경을 잘 지키기만 하면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는 땅덩어리였다. 그만큼 황궁의 입김에서 독립적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무탈하게 영지를 잘 굴리려면 그만큼 능력 있고 인정받는 가주가 필요할 터. 이 경우 후자를 위한 일이라 보면 될 것 아닌가.
“그럼 경은?”
“저는 볼일이 좀 있습니다. 듣자 하니, 데르가가 별채에 불을 내고 도망쳤다 하더군요. 아마 에리카 단장이 말한 ‘메리와 첼의 실종 시점’이 바로 그때일 것입니다.”
영지 안에도 없고, 바깥으로 나간 것도 아니라면….
저택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대저택에 비밀 통로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 문제는 단서를 얻을 만한 사용인들이 죄다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베릭이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면 움직이겠습니다. 카칸께서는 전사들과 좀 쉬신 다음 내려가시죠.”
카칸티르는 포도주를 병째 마시며 이안을 돌아봤다. 여기까지 한배를 타고 온 이상, 별다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오후.
심부름을 떠났던 베릭이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쿠실레 두 마리를 몰고 있는 이안이었다.
“왔느냐?”
“뭐해? 또 나가?”
“내가 살던 곳을 알고 있겠지?”
서자 이안이 살았던 곳. 사창가 중의 사창가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주소는 몰랐다.
“알고는 있지. 근데 왜? 필리아는 숲에 잘 있더만. 혼자 먹고 자고 잘 하는지 안색도 좋아 보였어.”
“쉿. 조심하라 일렀거늘.”
“괜춘괜춘. 아무도 안 들어.”
천려족도 이안의 생모가 살아있다는 걸 몰랐다. 이제 와서 약점이 될 만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저 밝히기에도 난감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튼 거긴 왜?”
“지금부터 해나를 찾아볼 것이다.”
메리와 첼, 아무리 생각해도 저택의 비밀 통로가 의심스러웠다. 여인과 아이의 몸으로 그 혼란을 어찌 뚫었겠느냔 말이다. 죽었다면 시체도 일찌감치 발견되었을 터다.
에리카의 얄팍한 속임수일지도 모르겠으나, 우선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확인해야 했다.
타닥타닥.
“이쪽인가?”
“으흥. 아마도.”
베릭은 코를 가볍게 막으며 앞장섰다. 골목골목이 미로처럼 얽힌 뒷길이었다. 미약이 아니더라도 어수룩한 자라면 바로 주머니가 털릴 정도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여기.”
“이곳이라고?”
세상에나. 이안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혀를 찼다.
반지하로 내려가자 개미굴처럼 방들이 뻗어있다. 개중 하나가 이안과 필리아의 거처였던 모양이다. 쥐들이 들끓고 곰팡내가 전쟁의 냄새를 덮는 곳.
“왜? 설마 전에 살던 곳을 말하는 거였나? 거긴 나도 모르지.”
아마 이안이 브라츠 저택으로 들어가면서 이사를 했었나 보다. 필리아를 경제적으로 옥죄기 위해 데르가의 알력 행사가 있었고, 그 결과가 이곳이었다.
“쯧.”
이안은 혀를 한 번 찬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주인을 잃은 보금자리는 얻을 만한 게 없어 보였다. 그는 길목으로 나가 베릭에게 고갯짓했다.
“해나를 수소문해라.”
“내가?”
“그럼? 내가 하리?”
“…이봐, 거기 지나가는 놈팽이! 말 좀 묻지.”
베릭이 여기저기 떠돌며 사람들을 잡아 세울 때, 이안도 꼼꼼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워낙 어지럽고 처참한 광경인지라, 안타까운 것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 이쪽이래!”
동생이 총 다섯이라는 해나의 가족은 꽤 유명했다. 게다가 해나는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이었으니, 이웃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계단 올라가서 2층.”
계단에 발을 올리자마자, 아이의 울음이 들려왔다.
으애앵!
“에고. 또 왜 우니.”
“해나?”
갓난아이를 안고 어르고 있던 해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안과 베릭을 알아보고서 놀란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 베릭!”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돌아오셨군요! 이안 님도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집에 피해는 없고?”
“네. 저희야 뭐, 병사로 들어간 가족이 없어서…. 부모님께서 저택에서 나오길 천만다행이었다고 매일 밤 감사 기도 올리셔요.”
하지만 살짝 마른 얼굴로 보아 고생은 한 것 같다. 창문을 비롯해 이안이 밀고 들어온 문에도 나무판이 못질 되어 있었다. 한창 전투가 발발할 때, 밖에서 침입하지 못하게끔 한 것이다.
이안이 살짝 웃으며 아기의 손을 매만졌다.
“얘기로만 듣던 동생이구나.”
“네. 얘 말고도 많아요. 그런데…….”
해나가 봇물 터지듯 마구 말을 쏟아냈다.
“여기는 저 찾으러 오신 겁니까? 무엇보다 이리 돌아오셔도 괜찮으세요? 이안 님도 데르가 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천려족과 함께 돌아왔다는 얘기가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그래. 괜찮다. 그것보다 물어볼 게 있어.”
해나는 아기를 달래며 이안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저택 안에 은밀히 내려오는 괴담이나 소문이 있는지 궁금하다.”
“네? 갑자기요?”
“어딘가 비밀 통로가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 층 복도 끝에서 귀신이 나온다거나, 주인이 출입을 금지한 방에서 사람 말이 들린다는 것 등등. 이런 말들은 대부분 비밀 통로를 오가는 와중에서 파생되는 소문이었다.
“음. 글쎄요. 괴담 같은 것은 들어본 적 없고요. 비밀 통로나 공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당연하지. 네가 알면 그게 비밀 공간이겠어?”
“베릭 님은 여전하시네요.”
베릭과 해나가 장난스러운 시선을 나누었다. 반면 이안은 난감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집사가 있었으면 참 좋았겠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팔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중앙군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 병사에게 당한 것이었다.
도망치다가 접경지를 잘못 들어선 모양인데, 메렐로프 쪽에서는 시체 인도를 가장하여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브라츠를 들렀다 돌아갔다.
“집사님도 돌아가셨습니까?”
“아. 그래.”
해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제 동생에게 시선을 내렸다. 이안은 그 잠깐의 미묘한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네? 아니요. 그냥, 안타깝지 않습니까. 저택에서 살던 사람들 대부분 죽었다 하니…….”
그것이 정말 다인가?
이안이 날카로운 눈으로 해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해나는 정말 못 당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