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40
제440화. 홍차 한 잔
좌측에는 이안, 우측에는 진.
노아는 눈 둘 곳 없어 창밖으로 보이는 마법사들에게만 집중했다. 황태자가 마법부에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도 모르겠다. 가끔 화사한 불빛을 만들어내며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노력뿐이다.
저걸 보고 있으니, 확실히 황태자는 이안의 사임을 반대하는 입장이구나, 싶었다. 황실에서 마법부를 견제하고자 한다면, 지금과 같은 기회는 다시 없을 테니까.
‘이안의 천부적인 재능을 썩히는 건 국가적 낭비일 테니 완전한 해임은 무리겠으나… 마법부의 직무유기를 원인으로 삼아 이안을 장관에서 아래 대장직으로 경질하고, 황실 줄 잡은 적당한 자를 위로 올린다면, 견제는 물론 마법부를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기회인데…. 혹여 진 황태자가 조금이라도 매서운 자였다면 그리했을 수도 있겠다.’
황실에서 마법부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여럿 있었다. 제도적인 방식과 마력봉인석이라는 비인도적인 방식.
인간이란 악의 근원을 품고 있어, 하고자 한다면 차마 역사에 기록될 수 없는 방식으로도 마법부를 견제할 수 있다.
루스웨나의 왕, 에리포니가 그러하지 않았나? 노아 왕자는 마법사들이 일으키는 파업 물결 속에서, 그날 노인이 타들어가 죽었던 불꽃을 떠올렸다.
“노아 왕자.”
“아, 예. 전하.”
침묵을 깬 것은 진이었다. 진은 이안이 손수 내려주는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운을 뗐다.
“길을 헷갈렸나? 안내한 자가 미숙하였나 보군. 어찌 1황궁이 아닌 마법부로 왔는지. 알 수가 없어 내 묻는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노아의 대답을 대신한 건 이안이었다. 그는 고개를 아낌없이 조아리며 불손을 사과했다. 진이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아이의 기다란 상처가 함께 움직였다.
“클리포포드 균열의 진행도 확인이 시급하다 생각되어 감히 먼저 만남을 요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수업 중이시라 전해 들어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제 불찰이었나 봅니다.”
“수업 중인 걸 알고 있었나?”
“예. 보시다시피 마법부원들이 개인 사정으로 업무를 봐줄 수 없으니, 황실과 행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베릭이 전해주었습니다.”
“그래? 그럼에도 내가 이리 직접 찾아오게 하였으니, 이는 필시 이안 경의 실수다.”
화를 내기 위해, 그리하여 이안의 기세를 잡기 위해 꺼낸 말이었으나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이안이 싱긋 웃으며 인정하고 말았으니.
“예. 제 실수입니다. 그러니 사임하겠습니다.”
“아니!”
“푸읍-!”
담담한 이안의 대꾸에 메이의 기침이 터졌다. 그녀는 연신 죄송하다며 손수건을 꺼냈고, 젖은 부분을 훔쳐냈다.
“노아 왕자.”
“예. 전하.”
“마침 잘 되었소. 그대와 이안 경이 실수한 것은 분명하나, 클리포포드의 상황이 시급하니 관대하게 넘어가겠소.”
“전하의 은혜가 하해(夏海)와 같습니다.”
“균열이 일어난 건, 왕궁에서 멀지 않은 수도 지역이라 하였지? 현재 그 근처 국민들의 대피 상황은 어떠한가?”
진의 물음에 메이가 허겁지겁 가죽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갈색 봉투에 정갈히 담긴 피난민 수천 명의 일상. 왕궁 소속들은 급여 받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나라 재건에 전력을 다했고, 국민들 또한 십시일반 힘을 모아 수습에 힘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마법사들의 도움이, 아니 바리엘의 도움이 절실했다. 당장 하루에 한 끼니 제대로 먹지 못하는 자가 길가에 즐비했으니. 클리포포드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바리엘의 손길을 진정으로 바랐다.
물론 세상에 그런 건 없지만.
“하여, 당장 지원 가능한 곡물과 옷가지 그리고 그 밖의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바리엘에서 클리포포드로, 조금만 고개를 기울이시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곡물 같은 경우는 루스웨나에 요청하면 되겠군.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곡류 수천 가마를 일부 먼저 내라 제안하겠다. 하지만 협상이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 바리엘에서 먼저 내주는 대신, 그 권리를 우리가 갖는 건 어떤가?”
진은 행정부와 함께 회의했던 것을 토대로 노아에게 제안했다. 루스웨나는 잘못을 일부 시인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들 또한 피해자라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전쟁배상금에 대한 이해관계를 ‘맞추기’ 위해서는, 바리엘이 대부분의 권리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편했다. 분산하지 않으면, 맞출 수밖에 없으니.
“자세한 것은 클리포포드의 왕이신 제 아버지가 결정 내릴 사안이지만, 저는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굶은 자들의 수명이 타오르고 있으니, 급하게 꺼트릴 것이 필요합니다.”
“좋다. 행정부에게 일러서 내줄 수 있는 곡류 양을 정확히 계산하여 오늘 저녁까지 일러주겠노라. 시아.”
“예. 전하.”
시아오시는 진의 명령을 받아적으며 아래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모두가 정해진 위치가 있다는 듯,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노아는 식어버린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와 왕, 제국과 왕국의 격차가 이다지도 여실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의 클리포포드가 참으로 통탄하다 여겨졌지만, 어쩌겠나. 자신이 조아리면, 백성들이 산다.
“바로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클리포포드는 농사를 주력으로 하는 나라라. 이번에 피해가 좀 큽니다. 버고스 측에서 토지를 죽이는 마물까지 풀었지요. 당장 돌아올 겨울이 먼 것 같아도, 눈 깜짝할 사이 아니겠습니까.”
기근을 걱정하는 노아의 말에, 이안이 뭔가 떠오른 것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
“…굴라, 라고 아십니까?”
변경에서 중앙으로 올라왔을 때, 이안은 굴라의 식용 가능성을 함께 품고 왔다.
하지만 많은 사건‧사고 그리고 온 대지가 기지개 켜는 봄과 여름을 맞이하며, 기근에 대한 황궁의 걱정은 자연스레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하게도 황궁의 사정이 풍족했다.
내란을 겪으며 예산에 무리가 가는 듯하였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만한 분기점이 없다. 세력을 겨루며 에너지를 소모하던 마리브와 게일이 스러지지 않았나? 황제는 앓아누웠고, 그의 후궁 딜라이나를 비롯하여 황실 예산을 배정받을 자는 전부 사라졌다.
‘게다가 중앙 귀족 숙청으로 인해 아래에 있던 귀족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고. 이는 하이만 가문 곳간을 풀었더니 인근의 숲과 짐승들이 살찌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마디로, 황실이 풍족하여 굴라에 관한 인식이 사라지다시피 했던 게다. 이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노아에게 싱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요.”
여러모로 좋은 사례가 되겠다. 굴라의 역사적 첫 등장이요, 클리포포드에서 이를 통해 기근이 해소된다면 자연스레 타국과 바리엘에도 선전을 가져올 수 있다.
“왜? 지금 하지.”
“아닙니다. 현 사안에서는 논외인지라.”
진이 이안에게 눈을 흘겼으나, 이안은 미소를 계속 유지한 채 입을 다물었다. 토닥토닥이라 할까, 당최 파업을 저변으로 둔 황태자와 장관의 알력 다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노아와 메이가 눈치를 보자, 시아오시가 헛기침했다. 진에게 대화를 계속 이어가라는 격식 어린 신호였다.
“급한 것은 우선 그것이고, 흐음. 그래. 의료를 비롯해 생활 유지에 있어 필요한 것들도 함께 보내겠다. 그중 일부는 바리엘의 은혜요, 나머지는 역시 루스웨나에게 달아둘 빚이라 여기면 되겠네. 그것이 그대들도 마음 편할 터. 응당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니까.”
“예. 전하. 무엇이든, 저희가 흘린 피를 침략자들의 피로 채울 것입니다.”
“걱정 놓아두시라. 그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한데, 하나 여쭙습니다. 식량과 의료 모두 클리포포드에는 한 줄기 빛과 같은 도움인데, 사실 중요한 것은 균열 자체가 소멸하여 클리포포드가 본래의 모습을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노아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하여, 마법사들의 도움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어찌하여 제일 중요한 마법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나? 이안 경을 클리포포드로 보내지 않고 싶어 하는 건 알고 있으나, 그렇다면 다른 마법사들의 지원이라도 먼저 약속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달각.
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네. 아직 클리포포드에는 바리엘의 마법사들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들 하나하나가 신에 버금가는 자들이라, 클리포포드에 큰 도움이겠지. 버고스, 루스웨나 협상 단계에서 그들의 마법사 차출을 요구할 것이네.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클리포포드를 위한 구호 인력으로 쓰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합리적이고, 클리포포드에 도움 되는 제안 같았다. 내용을 곰곰이 곱씹은 노아와 메이가 빈틈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전하. 송구하오나 마법부의 지원 사항 역시 다른 목록처럼 미리 내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마법사들은 식량이나 생필품과 달리 살아있는 사람이요, 기용 가능한 수가 많지 않다. 그리고 보지 않았나? 마법부의 어떤 사안 때문에 파업 중인 자들이 꽤 많아. 이를 황명으로 강제 지원하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 그것이…….”
노아가 소매 속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루스웨나와 버고스의 마법사를 이쪽으로 돌린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본다면 바리엘의 마법부원 수보다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루스웨나와 버고스 마법사들은, 협상이 체결되기 전 국적을 포기하거나 포기하는 척 집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자신이 왕이라면 응당 그리했을 것이다. 귀한 마법사를 타국으로 보낼 바, 차라리 없노라 기록하고 뒤에서 은밀히 운용하는 게 낫지 않나?
“버고스와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클리포포드를 파괴한 주범입니다. 국민들 사이에서 함께하며 균열을 수습하기에는 정서상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게 계산되지는 않으니.”
“패전국의 병사들은 모두 차출되어 영토 재건에 투입된다. 그것과 다를 바가 있나? 마법사보다 많은 수가 동원되지만, 결국에는 해내지 않나? 전범국의 주범들이네. 피해국 백성들의 원성을 받아낼 책임 또한 그들에겐 있는 법이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노아 왕자. 나는 이것에 대해 타협할 생각이 없네. 이미 내부 회의에서 정해진 것이라, 더한 덧붙임은 정중히 사양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이 없잖은가.
노아는 그리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미소로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가만 지켜보던 이안이 마찬가지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전하.”
지난 일주일. 제1황궁에 수많은 자가 밤낮없이 오간 걸 알고 있다. 클리포포드가 취할 루스웨나 구상권을 완전히 가져오면서 결집력을 갖춘다는 전략 같은데…….
“제가 감히 덧붙이자면, 마법에 대한 구상권도 넘겨받는 것이 조금 더 낫다 여겨집니다. 마법사는 이동 수단이 확실하여 클리포포드를 오가는 것에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습니다. 마법은 무게를 달 수도, 수를 헤아릴 수도 없으니 마법사 자체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리엘 마법사를 미리 내어주고, 훗날 버고스와 루스웨나 측 마법사 또한 바리엘을 위해 흡수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사임한다는 장관께서 하실 말인가?”
“무엇보다, 시일이 지날수록 균열은 더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지금보다 나중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바리엘 마법사를 아끼시려면, 그때 보낼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합니다.”
이안이 또박또박 말하자, 진이 아랫입술을 흡, 깨물었다.
“그리고 노아 왕자는 협상 과정에서 제외될 마법사들을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 아무래도요. 특히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국가 소속이 아니라 저들끼리 무리 지어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징집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사임하면 더 이상 마법부 장관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그들도 나라를 포기하고 사라진다면 아무리 바리엘이라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안은 진과 노아 왕자의 찻잔에 새로이 차를 따라주며 웃었다. 따뜻한 김이 올라왔지만, 진의 기운 탓인가. 어쩐지 춥다고, 메이는 괜히 손등을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