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42
제442화. 한배를 타다
탐독(耽讀).
자이라의 모습을 정확히 나타내는 단어였다.
이안은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와 그 위에 납작 엎으려 글자 하나하나를 상세히 파고드는 아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사막을 건너던 조난자가 오아시스에 얼굴을 처박듯, 아이는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몇 십 분째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범상치는 않다고 여겼지만, 확실히 달랐다. 아무리 총명하다고 한들, 아이가 저만한 집중력을 보여주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기록은…….”
차락.
자이라의 왼팔에 잠겨있는 족쇄가 덜거덕거렸다. 이안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다.
“아쉽게도, 그것이 다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 세월이라 하기에도 무색한 그런 시간이지. 그것이라도 발견하여 내 다행이라고 여긴다.”
“반도르라는 마법사가 부하들 이끌고 균열로 간 뒤, 아무런 보고가 없는데. 스스로를 반도르라 칭하는 자도 당시에는 처형당했고. 이때나 그때나 불신당했다는 뜻 아닌가요?”
“맞아. 자이라 네가 그러하듯, 그때의 사람들도 믿지 않았을 터라. 하지만 조금 재밌는 부분이 있어. 스스로를 반도르라 칭한 첫 번째 인물, 그 이후로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잠깐만요. 그게 뭐 이상한데요? 모방 범죄인가 보죠.”
“더욱 재밌는 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예는 없고, 불규칙한 기간을 두고서 일어났다는 것.”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반도르를 사칭하는 것이 적어도 동시대에는 한 명만 존재했다는 뜻이다. 이는 반도르 사칭이 당대 사람들에게 크게 이득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지.”
자이라는 엎드린 채 턱을 완전히 괴었다. 그러면서도 똘망똘망한 눈은 글자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 첫 번째 반도르 사칭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심연’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실체화되어 자리 잡았다. 시대가 발전하며 마법이 발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변화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생각해.”
“의미는 있습니다. 옅은 희망이라 하더라도, 어둠에서는 그것만치 밝은 게 없잖습니까.”
자이라는 슬쩍 팔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이것이 천 년 전 기록이든 이천 년 전 기록이든 사실 상관없었다. 금기의 마법 외, 심연으로 갈 방도가 있다면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불길을 걸으라면 걸을 것이요, 저 깊은 바닷물에 잠기라면 잠기리라.
“루스웨나 마법사들의 기록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지는 않아요. 특히 금기의 마법은 할머니한테 전해 듣기만 하였지, 제대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그게 정상이다. 자이라. 그러니 금기의 마법이라.”
“…잠시만요. 이거 보니까 이안 님이 바로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는 엉금엉금 기어가 집무실 구석에 놓여있는 작은 가방을 끌어당겼다. 숲에서 가족들과 자란 천방지축인지라, 이안은 자이라가 예법을 배울 필요가 있겠노라 여겼다.
남은 미래를 바리엘에 위탁한다면, 필시 언젠가 마법부의 수장에도 어울림직한 재목. 이안은 가볍게 팔짱 끼며 자이라에게 충고했다.
“자이라. 아무리 짧은 거리지만, 무릎으로 걷는 것은 건강에도 좋지 않고 예법에도 어긋난다. 앞으로는 조심하라.”
“와, 다들 걱정하던 그대로네요.”
“다들 걱정했어? 무엇을?”
“산에서 놀고먹던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황궁 밥 먹으면 체하지 않겠냐고, 몇몇 식구들이 그랬어요.”
하지만 자이라는 별로 개의치 않는지, 쪼그려 앉아서 종이를 뒤적거렸다. 틈틈이 꽃혀 있던 메모가 한밤에 첫눈 오듯 떨어졌다. 살포시. 살포시. 오랜 세월을 보여주듯, 노란 종이들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근데 이건 바리엘과 달리 작자 미상이에요. 누가 기록했는지 몰라서 쉬이 믿을 수 없어요.”
“기록되어있는 것들은 모두 그렇다. 심지어 보았다 하더라도 진실이 아닐 수 있지. 자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믿는 것밖에 없단다.”
네가 그러했듯 말이지.
심연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며,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를 지워내면서까지 믿는 것. 각자의 세계에 존재하는 각자의 우주, 각자의 하늘 그리고 각자의 진리에 심연을 그려 넣는 것.
자이라는 이안의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지 말아다오. 자이라. 네가 그리고 내가 이곳에 함께 있는 것은, 내가 너의 세계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동경은 언제나 현실을 바꿔.”
이안이 희게 웃으며 종이를 살펴봤다. 동그랗게 뜬 커피 자국, 번진 잉크, 낙서에 가까운 그림. 그리고 각기 다른 필체 두어 개.
-균열이 대지에서 흐르는 것과 같이 그 아래 세계 또한 흐른다. 흐르고 흘러, 대지와 가까이 있던 마물들이 흘러나온다.
-별을 바라보라.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 균열 아래 그들만의 세상도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 서로를 미지의 세계라 칭한다면, 그들의 별은 곧 우리일 터.
-들여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관념적인 것만큼 균열에 위험한 것은 없다. 인간의 시각으로 본다면 절대 알지 못하겠지.
“필담인가?”
“그런 것 같아요. 물어보니까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아마 윗대, 아니면 윗윗대에 쓰였던 쪽지 같아요.”
“상당히 난해한데. 수수께끼 같아 보이기도 하고. 한쪽이 질문, 한쪽이 답을 해주는 것과 같아 보인다.”
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 윗선대에 있어 루스웨나에 새로 들어온 자가 있나? 아니면, 들렸던 자라던가.”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그건 왜요?”
“두 명 중 하나 이상은 외부인이라 보는 게 맞다. 그렇지 않으면 루스웨나 마법사 중 한 명 이상은 이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을 터.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면, 글을 쓴 주체가 외부인이라 보는 게 자연스럽지.”
“그런가요?”
이안은 종이를 햇볕에 비추며 눈을 가늘게 떴다. 뒤로 비치는 글씨체가 어딘가 익숙했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자이라가 돌려달라는 듯 두 손을 내밀었다. 아직까지 바리엘은 바리엘, 루스웨나는 루스웨나. 그들이 가지고 온 정보는 그들이 지닌 무기다.
“조금 더 있는데, 그건 제가 들고 있지 않아요. 가족들 설득하는 방법 중 하나였거든요.”
마법사의 숲에 남아있는 것들은 온전히 나누어 지니는 것. 어느 것 하나 더 소중하거나, 누구 하나 더 필요해지는 법 없이 모두가 같아지는 것.
적군이었던 바리엘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니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더더욱 끈끈하게 뭉칠 필요가 있었다.
이안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그래? 누구?”
“지금은 못 말해요. 바리엘 국적을 모두 획득하고, 우리가 안전하다 마음 놓으면 그때 짐을 모두 풀 것입니다. 그러면 알게 되겠지요.”
아이의 새침한 말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그러려무나. 그런데 자이라, 나는 네가 보고 들었던 것과 같이 곧 있으면 장관직을 내려놓을 것이다. 제기된 문제만이 그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여 ‘이곳’ 황궁에 오래 있을 수는 없어.”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기껏 믿고 왔더니.”
“그 믿음에는 내가 응할 것이라, 다시금 약조한다. 자이라. 너와 네 식구는 바리엘에서 원하는 삶을 살게 될 터.”
이안은 자이라 손에 들린 쪽지에 시선을 고정하며 당부했다.
자신이 이곳에 없어도 자이라는 심연에 대한 연구를 독자적으로 진행해주었으면 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이이기에 그 한계가 명확하지만 말이다.
하루가 지나고 한 해가 지나 삶이 쌓이다 보면, 언제고 자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현실로 구현해낼 수 있을 게다. 심연에 빠진 마법사를 구할 수 있는 현실 말이다.
“나는 아래에서, 너는 위에서.”
“…….”
“균열 아래 심연이 있는지, 심연이 있다면 어떻게 소중한 자를 구할 것인지. 그리고 찢어진 대지를 새롭게 메울 방도가 있는지. 같은 곳을 바라보자. 자이라.”
아이는 눈을 굴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대답을 바란 부탁은 아니었기에, 이안은 미련 없이 허리를 세워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자이라가 말을 이었다.
“나도 같이 갈래요.”
그걸 바라지는 않는데. 이안이 눈썹을 찌푸리자, 자이라가 놓치지 않고 한 걸음 다가왔다.
“상식적으로, 균열 조사 같이 직접 나가는 거는 제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너는 어려.”
그 말을 들은 자이라의 얼굴에 의아한 낯빛이 스쳐 지나갔다. 웃겨. 지는. 아이는 정신을 한번 가다듬은 다음, 차분하게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루스웨나인이죠. 이안 님은 바리엘 태생의 마법부 장관이시고요. 직접 가시는 것으로 보아, 그쪽에 어떤 기대가 상당하신 것 같거든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답답하게 위에서 종이 뒤적일 바에, 발로 뛰는 게 좋아요.”
“안 돼.”
“안 된다고 하니까 더 가고 싶네.”
“…생각보다 더한 말썽쟁이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요. 저, 우리 마을에서 할머니 다음으로 마력 세요. 머리띠 둘러멘 어중이떠중이들보다 훨씬 나을걸요?”
자이라는 굳게 닫힌 문을 노려봤다. 바보 같은 것들. 훔쳐 듣고 싶으면 기척이라도 좀 숨기든가.
이안과 자이라의 대화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겠지만, 그들의 마력 기척은 너무도 선명했다. 붉은 머리띠 무리가 여기 있소, 하고 선전하는 꼴이었으니.
벌컥!
우르르! 콰아앙!
“우앗! 우아아아!”
“밀지, 밀지 마!”
자이라가 성큼성큼 다가가 문을 열어젖히자, 귀를 바짝 붙이고 있던 바리엘의 마법사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이안이 꼬마 아이 한 명만 콕 집어서 집무실로 데려가는 게 의아했던 게다.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루스웨나 마법사들의 입장은 어떠하고, 그것이 파업 중인 이안 파에 무슨 영향을 끼칠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이것도 예법 중 하나인가? 잘 배우겠습니다.”
아이는 이안을 돌아보곤 능청스럽게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이미 파업 중 수차례 겪었던 일이라, 이안은 별말 없이 소파에 앉으며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다들 이리 온 것으로 보아, 드디어 내 업무를 도와줄 생각이 들었나 보구나. 할 일 없으면 처리한 보고서를 옮겨라.”
“아닌데요! 마마연은 끝까지 투쟁합니다!”
“투, 투쟁은 하는데요. 아, 아직 바리엘인도 아닌 루스웨나 마법사를 들이시니 솔직히 걱정도 되고, 궁금도 하여 이리 왔습니다.”
“그래요! 거, 걱정, 아니 궁금해서요! 자이라라고 했지? 이안 님이랑 얘기 끝났으면 우리랑도 좀 하지? 보다시피 마법사들끼리 굉장히 중대한 일을 하고 있거든.”
마법사가 붉은색 머리띠를 가리키자, 자이라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난질인지.
“싫은데.”
“엥?”
“나 신경 쓰지 말고 그 투쟁인가 뭔가, 계속하세요. 어차피 나도 곧 이안 님 따라서 궁 나갈 거니까.”
달그락.
이안이 자중하라는 뜻으로 찻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이는 발끝만 까딱까딱할 뿐, 조잘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난 솔직히 이해가 안 되네. 파업을 대체 왜 하고 있어요? 이안 님은 마법부에 계속 두고 싶은데, 균열에는 따라가기 싫어서 그런가?”
그때, 마법사들 틈을 헤치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코렐라. 그녀는 거침없이 자이라의 코끝을 부여잡으며 흔들어댔다.
“요요, 건방진 꼬맹이! 이전에 봤을 때도 범상치 않다 했어. 베릭이랑 혓바닥 재질이 똑같네? 응?”
“아!”
“이안 님이 균열 가면, 우리도 간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예의 있게 행동해, 자이라.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우리랑 한배 타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