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43
제443화. 바리엘로 몰려드는
“쳐죽일, 찢어 죽일…….”
에리포니는 금빛 활에 묶여있는 활대를 신경질적으로 튕기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홀로 삭일 수 없는 분노가 울컥울컥 치솟았다. 클리포포드와의 전쟁에서 망신당한 것도 난감한데, 루스웨나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마법사들이 난을 일으켜 도주했다.
“전하.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가라앉혀? 진실로 하는 말인가!?”
언제나와 같은 엘더트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리엘로 가는 길목.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른 채, 에리포니는 사방을 노려보며 악을 질러댔다.
“왕궁이 반파된 것으로도 모자라, 놈들의 가족들이 탈출했다.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거늘, 추격대는 그 그림자만 쫓다가 놓쳤다지? 바리엘의 황궁에 당도했을 거라 하니, 더 이상 우리가 어찌할까? 응?! 말해봐!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개소리할 시간에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으란 말이다!”
야수가 살기를 드러내며 포효하는 것 같았다. 8척의 거구에 안 그래도 사나워 보이는 눈매. 시종들은 달달 떨며 흙바닥에 넙죽 엎드려 자신들에게만큼은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엘더트는 고개를 숙이며 보다 차분히 아뢰었다.
“추격대가 붙기는 하였으나, 전쟁과 왕궁의 소란으로 정원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상대는 마법사. 하늘을 나는 자들인데 어찌하여 그 그림자를 밟겠습니까?”
“마차 타고 갔는데, 무슨!”
“혼란을 주기 위해 둘로 나뉘어 움직였습니다. 전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황궁에서는 마법부의 존재가 오래도록 내려온 터라, 마법사를 견제하는 것에 체계적인 방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 혹은 문화적, 정치적인 여러 방면에 걸쳐서요. 반면, 루스웨나는 왕궁이 마법사와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잖습니까. 실수가 있음은 당연합니다.”
“실수라니. 역사에서 그것이 용납 가능한 것이던가? 자국 마법사들의 반란으로 여겨질 것이다.”
에리포니는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었다. 대외적인 수난은 차치하고, 현재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영 신경 쓰였다.
루스웨나는 개국 당시부터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왕조가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확실한 근본과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는 나라였는데, 전쟁 패배와 마법사들의 반란이 겹치면서 이제껏 볼 수 없는 풍조가 만연해진 것이다.
“어찌 그리 속단하십니까.”
엘더트가 에리포니에게 포도주 한 잔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단숨에 들이켠 다음,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방금 포식을 마친 짐승처럼, 입가에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번졌다.
“뭔데. 엘더트.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확답드리기 전에는 말씀 못 드릴 것 같았는데, 전하께서 마음 쓰심이 크신 듯하여 보고드립니다. 루스웨나 마법사 중 한 명, 연락이 닿을 것 같은 자가 있습니다.”
“닿을 것 같은 자라? 아직 닿은 건 아니라는 거네?”
“회유할 수 있습니다.”
“그깟 놈 하나 돌려서 뭐 하게?”
“한 명으로는 그리하겠지요. 딱히 의미 없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걸 할 수 있습니다.”
하아, 정말 골 빠지겠네. 에리포니는 삼백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며 짜증스러운 낯을 보였다.
엘더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지금 자신들은 종전 협상을 위해 바리엘에 들어서는 것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적의 수뇌에 들어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궁에서는 문이 활짝 열릴 것이요, 그들 앞에는 꼬마 황태자가 펜을 까딱거리며 세 치 혀를 놀릴 것이라.
“…되겠어?”
황제는 현재 노쇠하여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다음은 열 살 먹은 어린 황태자 하나. 그리고 그를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관료 중 주축을 담당하는 이안. 이 둘만 처리할 수 있다면, 바리엘에 혼란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단숨에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어렵겠지만,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화살은 루스웨나로 돌아온다. 안 그래도 왕궁에서는 종전 협상 결과만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는데, 더한 부담이 주어진다면 자극하는 꼴만 돼.”
에리포니는 궐련을 어금니로 꽉 깨물었다. 눈앞으로 늙은 관료들의 면상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겉으로는 잘하고 오시라, 전하를 믿노라, 입술에 침도 안 바른 채 지껄여 댔지만, 에리포니는 그들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 포도가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여우같이, 왕권에 금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라.
“저희가 하지 않는다면요?”
“뭐?”
“황궁에는 루스웨나 외 많은 자가 들어설 것입니다. 불모로 잡힌 다몬의 조국, 버고스에서도 사절이 올 것이며 북쪽의 소수민족들도 참석하겠지요. 아스타나, 아탄, 그리고 그밖에 전쟁에 발 들였던 모두가요. 심지어는 클리포포드도 있군요.”
“클리포포드는 바리엘과 동맹국이다. 무엇 하러?”
“이유는 만들어내기 마련입니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협상이란 무지개와 같지요. 바리엘이 클리포포드 편의를 최대한 봐준다고 한들, 그 중심은 필시 바리엘 스스로 돌아갈 것입니다. 세부적으로 충돌되는 부분이 있을 터이니, 그걸 잡아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물론 제일 쉬운 것은 버고스 쪽으로 흐름을 돌리는 것이겠지요.”
엘더트는 에리포니가 들고 있는 활대를 천천히 돌려 내어 손아귀에서 빼냈다. 다혈질에 가까운 왕의 성정이라, 손에 무언가를 들려주었다가는 시종들이 피를 보겠다 싶은 마음에서였다.
에리포니는 순순히 활대를 넘겨주었고,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간이 천막 입구 위쪽으로 수없이 많은 별들이 보였다. 숨어든다면, 저리 많은 것들 사이에 숨어든다면, 어쩌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버고스 쪽으로 흐름을 돌린다…. 그래. 버고스는 우리보다 더 궁지에 몰린 상태잖아. 루스웨나보다 더욱 바리엘의 혼란을 바라고 있을 터이니, 그쪽에서 일을 저질렀다 한들 의심이나 하겠는가? 그리고 버고스는 워낙에 음침한 것들이라.”
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버고스가 그리 나서준다면,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루스웨나 입장이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무엇이 되었든 진과 이안의 부재는 루스웨나에 호재다. 죽든 사라지든 알 바 아니고, 그저 존재하지 않으면 된다. 하여, 루스웨나로 쏟아질 관심과 시선이 내부에서 머물다가 버고스 쪽으로 터지면 더할 나위 없겠다.
“한 번에 두 놈을 어찌 처리한담. 어린것은 그렇다 쳐도, 나는 이안이가 마음에 걸려.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게 하는 짓은 꼭 두 번 산 늙은이 같단 말이지. 어쭙잖게 덤볐다가는 필시 들키고 말 것이다.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건 엘더트 너도 알잖아?”
“물론입니다. 기회는 한 번. 동시에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계가 강화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을 동시에…….”
성정 같아서는 대면하였을 때 활대를 휘두르는 것인데, 아쉽다. 활대로 그 흰 피부가 찢기도록 내려치고, 마지막에는 쓰러진 것들의 어깨를 짓밟아 심장에 화살을 꽂아 넣는 것.
에리포니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입맛을 다시자, 엘더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합니다. 주체가 누구인지 조사 끝에 밝혀지도록 해야 하니까요. 독살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바리엘 마법부는 실담물약이란 걸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진실과 거짓을 밝히는 것이라. 심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것을 여과 없이 말한단다.”
“그것은 루스웨나 마법사에게 맡기겠습니다.”
“루스웨나 것에게? 쥐새끼처럼 꼬리 자르고 도망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는 망명 신청이 진행되고 있을 터인데, 마법부 안에서 힘이나 쓰겠어?”
에리포니는 엘더트를 노려보며 핀잔을 줬다. 듣자 듣자 하니까 이거 영 못 미더운데, 싶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엘더트는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은 알겠다. 그쪽으로 손을 써봐. 우선은 황궁 들어가서 사태를 좀 살피는 게 좋겠어. 망할 것들 같으니라고. 감히 나라를 배신하고 나를 능멸하다니. 황궁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구나.”
에리포니가 연기를 후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다몬 역시 가까이 두었던 티모시라는 자가 바리엘로 망명하였다지? 잡혀들어가서 만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대제국이라는 것이 한다는 짓이…….
“다들 입궁 시기는 비슷하게 받았을 것입니다. 버고스와 북쪽 세력이 당도하기 전,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작전을 짜보시지요.”
“그래. 활대 독이 줄어들지 않으니, 한 번쯤 비울 때가 되긴 되었다.”
엘더트는 에리포니의 금 활대 안쪽, 작은 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냥 도중 만만치 않은 놈이다 싶으면 화살촉에 바를 수 있게끔 준비되어있는 독.
엘더트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왕의 평안한 밤을 기렸다.
“푹 쉬십시오, 전하. 내일부터는 마차 속도를 재촉하겠나이다.”
“그래. 아, 그런데 그쪽은 어떻게 됐지?”
“그쪽이라 하시면?”
“알레나라, 귀여운 영애.”
“아.”
새롭게 재기하고자 사병까지 이끌며 클리포포드로 내려왔지만, 이른 종전 탓에 뒷수습에만 배치되어 허탕을 쳤던 자.
오라비인 세르오는 전면에 남아 고생하는 것으로 아는데, 알레나라는 그 뒤로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쪽을 신경 쓸 만큼 에리포니가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영애가 중앙으로 올라가 전하를 맞이한다 하지 않았나요? 특별한 전서구가 없었으니, 그리하고 있겠지요. 사실 몰락을 앞둔 하급 귀족인지라, 그쪽은 신경 안 쓰셔도 될 것입니다. 거사에 하등 문제없는 자입니다. 솔직히 말하여서요.”
“흐음.”
그렇긴 하지. 에리포니는 발코니에서 자신의 부채를 품에 안고 눈 반짝이던 알레나라를 떠올렸다. 엘더트 말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적군의 소굴로 기어들어 가는 와중 단 한 명이라도 길을 터놓으면, 훗날을 대비할 수 있지 않겠나?
에리포니는 손을 딱딱 튕기며 명령했다.
“종이와 펜 그리고 전서구를 준비하라.”
* * *
바리엘의 새벽. 이른 아침, 장사 준비하는 자들 외 모두가 잠든 시각이었다.
중앙 길을 무겁게 내달리는 마차 행렬. 밤중 고인 물을 버리고 앞길을 쓸던 사람들이 눈 비비며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타닥타닥!
히이잉!
“뭔 놈의 마차들이 이 시간부터 움직여?”
“하아암. 그러게. 밖에서 들어오는 것 같은데.”
“황궁 깃발은 없어. 외부 사절인가?”
그들은 심드렁하게 비질하며 마차에 달린 깃발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의아하다. 신원을 밝히는 어떠한 깃발도 달려 있지 않은 게다. 허가되지 않은 마차가 중앙 길을 밟는 건 중죄. 분명 중앙 문지기들이 길을 터주었고, 통행을 안내해주었을 텐데? 그렇지 않고서는 저 기다란 마차 행렬이 바리엘 중앙 길로 들어서지는 못했으리라.
“아아. 거기인가 보네.”
“어디?”
“왜에. 이번에 쫄딱 망한 곳!”
카악, 퉤! 정체를 눈치챈 누군가가 재수 없다는 듯 침을 뱉어댔다. 그러자 몇몇 역시 알겠노라, 따라서 인상을 찌푸리고 마차 뒤쪽에 욕설을 뱉어댔다.
“패전국 버고스 사절인가 보지?”
“왕도 다 죽어가는 마당에, 뭐 대단하다고 마차가 저리 줄줄이 들어와? 침략국 주제에! 기어서 가라, 이놈들아! 너희 때문에 얼마간 동안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그래! 기어서 가라! 가서 왕이랑 같이 머리 박아!”
“쯧쯧! 하여간, 난 쟤들이 어두컴컴한 옷 위주로 입을 때 알아봤어. 심성이 이상한 것들이라니까!”
“뭐 할 게 있다고 왔어? 황궁 밥이나 축내겠구먼!”
타악!
제국민들이 작은 돌멩이를 집어던졌고, 그중 하나가 마차 옆 몸체에 명중했다.
작은 울림을 느낀 자가 커튼을 걷고서 바깥을 살폈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흰 피부. 그리고 보랏빛이 감도는 남색 머리칼의 여인이, 눈만 굴려 바리엘 거리를 눈으로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