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45
제445화. 나도 같이 가
이안은 커프스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따라 흐트러지는 앞머리. 시종의 손길을 받았더라면 끄떡없이 고정되어 있었을 터지만, 홀로 단장하여 엉성하기 짝이 없다.
이안은 앞머리에 바람을 가볍게 불어댔다. 공식적인 회의에서, 다른 관료도 아니고 장관직인 자가 머리를 내리는 것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성년식을 치르기 전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베릭.”
“못 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내 일 아니다. 내 대가리 빗질도 안 하는데 네 머리를 내가 어떻게 해?”
“그저 뒤로 고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요. 여차했다가는 머리카락 다 뜯어먹힌다고요. 앞머리 듬성듬성한 채로 회의하실?”
소파 등받이에 걸터앉은 베릭이 손으로 엑스 자를 그렸다. 차라리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몸으로 때우는 게 낫지, 해본 적도 없는 머리단장 따위 도왔다가 어떤 꾸지람을 들으려고?
이안은 괜찮다는 듯 머리단장 용품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혼내지 않으마.”
“아니, 너 말고 저기 바깥에서 지랄해대는 애들이 더 귀찮고 짜증 나거든요? 걍 내리고 가. 뭐 어때? 살랑살랑하니 보기 좋네.”
“누가 공식 회의에 머리를 내리고 가?”
“참나, 장관직 그만둔다, 그만둔다, 매일 주문 외우는 사람이 그런 건 또 걱정하네?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마라!”
“밖에 있는 것 다 안다. 시종 한 명을 들여라.”
“…….”
이안이 나지막이 명령하였으나, 바깥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다 듣고 있으면서도 저러는 게라. 문 벌컥 열어젖히면 놀라서 도망갈 뒷모습들이 훤했다.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머리단장을 포기하고, 웃옷을 집어 들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간간이 넘기는 서류. 손은 바삐 움직였지만, 시선은 글자를 읽는 데 여념 없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출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이안이 서류철을 덮는 순간이었다.
벌컥!
“우앗, 깜짝이야.”
“이안! 허억, 허억!”
“뭐여. 로만드로 님, 왜 왔어요?”
로만드로가 들이닥쳤다. 한쪽으로 이상하게 넘어간 머리칼과 단정치 못하게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셔츠. 그리고 대충 구겨 신은 구두까지. 급하게 달려온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숨을 골랐고, 이안은 문틈으로 보이는 마법사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베릭의 말이 옳습니다. 아가와 함께 있으셔야지요, 어찌 여기 계세요?”
“아니… 허억, 허억, 오늘 다국 간 첫 협상 자리라 하지 않았나? 대회의 때는 허억, 이안을 보필하지 못하였으니 이번에는 꼭! 꼭, 단속을, 아니지. 그, 열심히 도와주려고.”
“…그럴 것 없는데요. 자택에서 결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 됩니다.”
이안은 다 알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마법사들이 부른 것이라. 저번 대회의 때 이안의 폭주를 막아줄 자가 없었으니, 이번에는 꼭 로만드로를 동행시켜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로만드로는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을 훔쳐내더니,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골라 쉬었다.
“그럴 수는 없지! 우리 아기 성인 될 때까지 먹이고 입히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한창 바쁠 때임을 알고 있는데, 편의 봐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비비안나 님은 무탈하십니까?”
“아우, 너무 건강해서 탈이네. 예뻐 죽겠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편의 아닙니다. 로만드로 님이 당연하게 누릴 권리이지요.”
“되었어. 상관이 이런 꼴로 나가는 걸 어찌 보좌관 된 자로 가만있나? 자자, 이쪽으로.”
로만드로가 이안을 거울 앞에 앉히자, 그 동선을 따라 베릭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반(反)이안 파면서 마법사들의 부름에 후다닥 달려오다니. 알 수가 없다. 도와주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존재.
베릭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로만드로는 험한 낯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베릭. 거기 늘어져 있지 말고 서랍에서 장갑이나 가져와라.”
“눼눼. 본부대로요.”
“이안, 머리는 전부 넘기면 되겠지?”
“예. 부탁드립니다.”
로만드로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듯, 아주 익숙하게 이안을 단장해주었다. 이안은 기분 좋은지 가볍게 눈을 감았고, 로만드로는 거울로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자택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긴 한데, 미안하지만 설명을 조금 더 해주었으면 해.”
“음. 크게 알아두셔야 할 건 딱히 없습니다. 북쪽 세력을 제외하고 모두 도착하였고, 노아 왕자는 저주 발현, 에리포니 왕은 루스웨나 마법사들과 대립 중이며, 버고스는…….”
이안의 눈이 살짝 떠졌다. 버고스의 사절 대표라 하였던 여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별할 것 없이 다른 자들과 함께 황궁 내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조용히 협상을 준비하고 있노라 얼마 전 보고받았다.
“버고스는 사절단에 수도 귀족이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귀족이 없었어? 아예?”
“지방에서 올라온 관리가 한 명 포함되어 있던데, 바리엘 쪽 변방인지라 길라잡이 겸 동행한 듯 보였습니다.”
귀족이 단 한 명도 함께 하지 않았다는 건, 실로 많은 걸 시사했다. 우선 현 왕조인 다몬 지지 세력 중 대부분이 흩어졌다는 걸 의미했고, 나아가 패권 다툼으로 인해 수도가 어지럽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경계를 늦출 수 없으니, 바리엘로 여정을 떠나는 짓 따위 감히 하지 못하는 게라. 뒤를 보이는 순간 다른 자에게 잡아먹힐 게 자명한데, 무너지는 왕조, 그 마지막을 지킨다고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나? 버고스는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그러면 사절의 출신이 중요한데, 사절을 정식으로 파견한 세력이 차기 왕조 주인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바리엘의 속국으로서, 직접 소통하는 자가 될 터.”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데?”
“사절 대표라는 여인, 출신이 불분명합니다.”
“으응? 사절 대표가 어찌하여?”
“공식적으로 기재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의심쩍은 부분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기재된 것과 경비병의 심문 중 다른 부분이 있었어요. 단순 실수라 정정하여 인정하긴 했지만, 보고까지 올라온 걸 보면 경비병이 보기에도 뭔가 의아하다는 것이겠지요.”
사락.
로만드로는 이안의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수많은 사절들의 이름 중 맨 위를 차지한 여인. 그는 곰곰이 이름을 되씹어보았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부분은 없었다.
“뭐.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어쭙잖은 신참이 중요한 일을 맡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니겠나? 공식 사절단이면 출신이 무엇 중요하겠어? 그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공식 사절단의 입장이지. 무어라 하던가? 다몬 왕에 관하여.”
“협상 때 발언하겠다며 말을 아끼는 모습입니다.”
“다몬 왕과 접촉은 하였고?”
“사절 대표만이 그 권한으로 일대일 면담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었고, 간단히 안부만 주고받았다네요.”
“알 수가 없네. 다몬을 버리는 쪽이었다면 굳이 면담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데.”
“저도 그것이 의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런크비스 왕조를 이어갈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쪽에서 말한 대로, 협상에서 공식 입장을 듣는 수밖에요.”
이안은 경비와 서기를 통하여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 밀담을 비롯한 어떤 비밀 신호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는 황궁의 다른 부서 장관들 또한 직접 검증하였을 것이라.
버고스의 입장에 따라 세부 정책이 변경될 터이니, 사절단 행보에 관심 기울이는 건 당연했다. 바리엘이 포식자요, 버고스가 피식자라 해도 그건 변함없는 자세다. 원래 강한 맹수일수록 상대를 잡아먹는 것에는 빈틈이 없으니까.
“자아, 되었다.”
로만드로는 다시금 머리 만지는 것에 집중하더니, 손끝으로 이안의 머리칼을 툭툭 두드렸다. 이에 이안은 고개를 기울여서 흐트러지지 않는지를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 사이에. 자, 그러면 슬슬 가보자고. 올릴 서류는 이것이 다인가?”
“조금 더 있습니다만, 그것은 베릭을 통하여 먼저 대회의실에 보냈습니다.”
“그러지. 아차차. 그런데, 나머지는?”
“나머지요?”
“북쪽 세력들 말일세. 아까 그랬잖아. 그쪽 사람들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고. 그들 없이 협상을 진행하는 건 문제 없겠지만, 모든 게 확정되고 나서 갑자기 말을 얻으면 곤란해지지 않겠어? 지금 어디까지 왔다고, 들은 바 없나?”
“아아…….”
사실 그들의 참석 유무를 바리엘에서 중요히 여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탄족 같은 경우, 균열에 있어서 직간접적인 도움이 될 순 있겠지.
하지만 면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클리포포드가 회유할 일이었다.
“바리엘에서는 버고스와 루스웨나 지배 강화에만 초점을 두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인력이 모자라기도 하고요. 하샤에게는 종종 전서구가 날아오긴 하였는데, 글쎄요. 최근에 들어온 것은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생각 없이 불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각자 세력의 지도자들이니, 정세를 파악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특히 에프디람 그녀는…….”
이안은 고개를 돌려 멍청하니 서 있는 베릭을 쳐다봤다. 꽈악, 있는 힘껏 낀 가죽 장갑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필시 오겠지요.”
“왜 나를 보면서 말해?”
“그녀는 베릭, 너와 같은 자니까. 너를 대하듯 생각하면 답이 쉬이 나오지.”
“방금 나 욕한 것 같은데.”
“설마. 칭찬이란다.”
한번 가겠다 정한 길은 끝까지 밀고 가는 자. 곁가지를 헤아릴 필요 없이 보이는 것이 전부인 자. 깊이가 투명하여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의외로 깊어서 쉬이 발을 들일 수 없는 자.
이안은 싱긋 웃으며 베릭에게 고갯짓했다. 집무실 문을 열어 앞장서라는 신호였다.
“가자. 자리에 늦겠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뭐.”
끼이익.
문을 열자, 결연한 마법사들이 두 줄로 서서 이안을 맞이했다. 눈빛에 비장함이 감돌아 있었으니. 로만드로는 괜히 이안의 뒤편으로 숨어 숨을 골랐다.
하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집무실을 나서며 그들 앞으로 나아갔다.
“다들 있었으면서 어찌 부름에 답이 없어. 그대들은 상관이 단정치 못한 채로 공식 석상에 나서는 걸 원하는가?”
“아, 아닌데요!”
“…다들 머리에 두른 것을 목으로 내리거라. 진 황태자 전하를 뵈어야 하니,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머리에 무언가를 얹을 수 없다.”
“앗, 네넵.”
“이안 님! 이번 협상에서도 홀로 발언하시면 저희 진짜 뒤집힙니다. 예? 아시겠지요?”
“가,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정말로!”
마법사들은 이안의 지시대로 붉은 천을 목으로 내린 다음, 뒤편에 서 있는 로만드로에게 속닥였다.
‘이안 님 입단속 좀 잘 시켜주십시오!’
‘알겠네. 걱정하지 말고 눈에서 힘 좀 풀어!’
‘안 됩니다. 이것은 결의입니다!’
‘원 참. 난리들은…….’
벙긋벙긋, 마법사들은 제 딴에 은밀히 말한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입 모양이 훤한데 말이다.
이안은 마법사들 틈을 가로지르며 일렀다.
“가자.”
“예. 이안 님!”
타닥타닥!
우르르!
소년 장관을 따르는 수십 명의 마법사. 모두 목에 붉은 천을 옭아맨 것이, 꼭 이안의 사람이라 표식한 것 같았다. 서류 더미를 옆구리에 낀 베릭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천 쪼가리를 꺼내 목덜미에 감았다.
“나도 같이 가!”
제 머리칼과 같은 붉은색 천을 휘날리며, 베릭은 마법사들 틈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