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46
제446화. 삐거덕
적과 적. 그리고 적.
회의장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로지 그것밖에 없을 게라. 클리포포드와 버고스 그리고 루스웨나. 한때는 동맹을 계획했었지만, 지금은 바리엘이라는 거대한 벽에 완전히 분리된 상황이었다.
소곤소곤, 각자의 세력들은 타국에 들리지 않게끔, 최대한 숨죽여 모국어로 전략을 논했다. 클리포포드 왕과 버고스의 다몬 그리고 루스웨나의 에리포니.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서로 간 꽤 떨어진 거리였으나, 날카로운 시선들은 조금도 무뎌질 기색이 없다. 서로를 의식하는 듯 안 하는 듯, 노련하게 기류를 읽을 뿐이다.
대기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사절단들이 하나둘씩 회중시계를 꺼내 들려는 참이었다.
끼이익!
바리엘 관료들이 정복을 입은 채 일렬로 입장했다.
하나같이 턱을 빳빳하게 든 노인네들. 제아무리 바리엘 입장을 대변하는 자들이라 한들, 한낱 관료라. 왕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변방 야만족의 왕도 아니고, 오랜 세월 역사 기록을 함께해온 대국(大國)들의 왕이었다.
하지만 전쟁엔, 늘 말도 안 되는 것조차 이뤄지도록 하는 힘이 담겨 있지 않던가? 엘더트가 에리포니 어깨 너머로 속닥였다.
“…전하.”
“…젠장.”
엘더트의 재촉에 에리포니는 한숨을 꾸역꾸역 삼키며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자리에서 관료들에게 숙이고 들어갈 자는 루스웨나의 에리포니, 그녀밖에 없었다. 클리포포드는 우호적인 입장이라 차치하고, 버고스는 숙이기엔 이미 허리가 잘린 것과 같았다. 알랑거리는 외교로써 되돌리기엔, 이미 한참이나 선을 넘어 버렸으니.
스윽.
에리포니가 일어나자, 루스웨나 사절단들이 함께했다. 이어서 버고스 측의 사절단. 그리고 클리포포드 사절단이 일어나 황궁식 예법으로 인사했다.
자리에 무겁게 앉아있는 클리포포드 왕과 다몬. 두 사람은 동시에 에리포니를 한심하게 힐끗거렸으나, 그녀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당장 이번 협상 결과에 따라 루스웨나의 운명이 결정되기에. 흑과 백, 그 가운데 있는 회색 지대에 어떻게든 머물러야 했다.
에리포니는 고개를 아주 살짝 숙여 관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하아.’
하지만 그럼에도, 행렬 맨 끝 마법사들과 함께 들어오는 이안을 보고야 말았다. 무덤덤한 낯으로 들어오던 이안 입매에 흰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왕의 존엄을 비웃는 게 명백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고, 소매 아래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애써 다스렸다.
“왕이시여. 바리엘을 존중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상석 바로 옆자리를 차지한 수상이 안경을 바로 쓰며 고갯짓했다. 체면을 접어두고 왕께서 관료들을 반겨주시니 감사하긴 한데,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에리포니가 자리에 앉자, 사절단들이 우르르 그녀를 따랐다. 수상은 두툼하게 쌓여있는 서류들을 힐끗거린 다음, 세 나라가 모두 참석했는지를 확인했다.
“흐음. 클리포포드와 버고스 간 전쟁 관련자들이 전부 모인 것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협상을 진행하는 데엔 무리가 없겠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모시도록 하지요.”
수상이 시종에게 진 황태자를 모시고 오라 눈짓했다. 회의장에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이는 작은 황태자가 입장할 때까지 팽팽했다.
끼이익.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상처, 은발과 벽안. 진 황태자를 처음 본 자들은 알려진 외관 묘사가 정확하다 여겼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 누가 저자를 열 살치의 아이로 본단 말인가? 이전에 황궁에서 죽은 듯 살았다는 얘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걸음걸이부터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 하나하나에 위엄이 서려 있었으니. 태어날 때부터 제왕학에 푹 잠겨있었노라 보는 게 맞을 듯싶었다.
진이 등장하자, 이번에는 클리포포드의 왕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 이에 회의장의 모두가 따라 일어나, 진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다들 앉으시게.”
차악!
진이 수상을 흘깃 바라봤다. 협상을 진행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는 헛기침 몇 번으로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봉을 집어 들어 내려쳤다.
타앙! 탕!
“지금부터 클리포포드와 버고스 간의 종전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중대 사안이니만큼 각자의 입장에 모자람이 없도록 며칠에 걸쳐 진행될 것입니다. 합의한 결과에 대해서는 감히 말을 얹지 말 것이며, 모든 것을 대제국 바리엘 이름 아래 이행하십시오. 동의하지 않는 자는 자리를 나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에 관한 책임은 오롯이 져야 할 것입니다.”
수상이 잠시 뜸을 들였다. 혹여 자리를 박차고 나갈 자가 있다면 지금이 기회라는 듯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수상은 힘차게 마지막 봉을 내려쳤다.
타앙!
“자,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버고스. 다몬 왕의 심문을 통하여 일정 부분 사실 확인한 부분이 있으니 신중히 답하시오. 혹여 반대되는 발언이 있다면 불가피하게 협상 시간이 길어질 것이니. 버고스는 클리포포드를 침략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다몬 옆에 앉아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고스 사절을 제외한 모두가 그녀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신분이 모호한 자. 그리고 사절 대표를 맡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자. 물론 나이가 자리를 보장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절 대표를 맡을 정도라면 바리엘에 정보가 들어왔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도 아니고.
“신분을 밝히십시오.”
수상은 그것을 염두에 두어 그녀가 제 입으로 신원을 확실히 하도록 하였다. 이미 정문을 통과할 때 했던 것이지만, 공식 석상에서 본인 입으로 되짚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으니. 서기들이 손끝 감각에 최대한 집중한 채 그자의 발언을 기다렸다.
“저는 버고스 사절단의 사절 대표, 바니아입니다.”
“버고스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습니까?”
수상이 은근슬쩍 질문하자, 바니아는 자연스럽게 회피했다.
“말씀드렸습니다. 사절 대표를 맡고 있다고.”
“그래요. 바니아 대표. 버고스가 클리포포드를 침략한 사실에 대하여 인정합니까?”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관료들은 모두 서류로 시선을 돌린 다음, 이런저런 필기를 끄적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기 전까지.
“아니요.”
“……?”
“처음엔 입국 요청이었습니다. 버고스는 사절의 안전에 문제가 있다 여겨 이를 확인하고자 입국을 요청하였고, 클리포포드가 이를 거절했습니다. 워낙 분쟁이 많은 국경이었던지라 그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일어났고 버고스가 패한 게 사실입니다만, 그 시작점에 침략 의도는 없었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시작부터 뭐 이리 나옵니까?”
“모두가 보고 들었으며 겪었습니다! 버고스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시늉조차 안 하는군요. 그저 눈만 감을 뿐이지!”
“다몬 왕이 심문 첫 질문에서 이미 시인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어찌 부정하는 겐지, 원. 허허.”
제일 먼저 반발한 것은 클리포포드 측이었다. 그들은 바니아의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분통을 터트려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전쟁 의도부터 저리 부정하고 나서다니!
사절단이 씩씩거리며 큰소리 내자, 클리포포드 왕이 자중하라 가볍게 손짓했다. 수상 역시 봉을 두드리며 정숙을 요구했다. 진 황태자 전하께서 보고 계시니, 무엄한 작태를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그것은 버고스에게도 적용되는 사안이었다.
“시바, 시작부터 지랄들이네.”
“쉬잇. 베릭. 목소리가 크다.”
베릭 역시 중얼중얼, 입술을 떼지 않고서 복화술 하듯 읊조렸다. 마법사들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지만,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잖아. 저게 말이야, 방구야.”
“어허. 방구 같아 보이지만, 나름 말이다.”
그리고 클리포포드만큼 기민하게 반응하는 루스웨나 측. 예상과 다른 버고스의 대처 방식에 혼란이 온 것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건만, 어찌하여 저런 막무가내식의 발언을 하는 것이지?
게다가 저들은 현재 패전국의 입장이었다. 바리엘과 클리포포드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를 통째로 잡아먹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게다. 지도자가 없는 나라만큼이나 혼란스럽고 탐스러운 게 또 있을까?
“무슨 의도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사절단들이 가만있는 것으로 보아, 합의된 발언인 것 같은데…….”
“상당히 위험하고 무모한 것 아닌가?”
“맞습니다. 바리엘 측에서 어찌 나올지…….”
에리포니는 바로 옆에 앉은 엘더트와 귓속말을 나누면서도 바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결연하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탁자를 짚은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듯했다.
에리포니는 눈썹을 찌푸렸고, 이내 바리엘 관료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저들이 귓속말하듯, 그들도 귓속말로 무언가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다. 아마 강경파 쪽에서는 저들의 방자한 태도를 빌미 삼을 수 있으니 되려 반기는 듯 보였고, 온건파 쪽에서는 난감하여 사태를 어찌 풀면 좋을지 의논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안은?
“…를…해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마법사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안의 명을 받은 자는 바로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자세를 바로 했다.
수상이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봉을 가볍게 내려쳤다.
타앙!
“모두들 정숙하시오. 버고스 사절 대표, 바니아. 다몬 왕의 심문을 미리 언질 주었는데도 상충하는 내용을 발언하는군. 이를 어찌 해석하면 좋단 말인가?”
“사절 대표와 다몬 왕의 의견이 다르니, 저자의 말을 버고스의 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왕실 존중 따위 필요 없음이라, 당장 무릎을 꿇리도록 하지요.”
“어허, 진정 좀 하십시오. 이제 시작인데, 다들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버고스 사절단 전체의 의견이 맞소? 다몬 왕, 그대가 말해보시오. 심문에서 증언했던 것과 지금 사절단이 증언하는 게 상이하니, 그대의 의견을 다시 들어봄이 옳으리라.”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다몬. 자신이 언급되자 눈썹을 까딱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보란 듯이, 다시금 잘린 혀를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덧붙이고 싶어도 혀가 잘렸으니, 그 어찌하겠나?
관료 한 명이 화를 버럭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 무례한! 진 황태자 전하 앞에서 무슨! 혀가 잘렸다고 한들 손까지 잘렸는가? 필담으로라도 그대 입장을 밝혀라!”
끼이익.
그때, 밖으로 나갔던 마법사가 조용히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워낙 소란스러운 터라, 그가 오가는 걸 누구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버고스 측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러자 내내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던 다몬의 낯이 확연하게 굳었는데, 마법사 뒤를 따르는 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왔는가, 티모시.”
“예. 이안 님.”
“저기, 저쪽.”
티모시는 무릎 꿇어 이안의 대각선 뒤쪽에 자리하곤, 그의 고갯짓을 따라 바니아를 천천히 훑었다. 이어서 속삭이는 목소리.
“다몬 왕의 배다른 여동생입니다.”
“확실한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거의 확실합니다. 꽤 오래전,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저이와 비슷한 아이를 ‘확보’하여 러더포드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래?”
이안은 사태 돌아가는 꼴을 좀 알겠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다몬은 바니아를 보자마자 알았을 것이다. 러더포드에게 보냈던 자신의 반쪽짜리 혈육이 왔다는 걸. 그러니 어떠한 수신호 없이도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겠지.
‘러더포드에게 보냈던 자가 버고스 사절 대표가 되었다? 버고스 내부, 귀족들의 의견 조율이 러더포드 영향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눈에 띌 위험을 감수하고도 대표로 올려보낸 것은, 면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이겠지. 흐음.’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러더포드와 다몬 그리고 바니아. 협상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발언까지.
‘협상을 지연시키려는 의도인가?’
어째서? 지연이 무엇 가치가 있기에?
‘…러더포드가 이쪽으로 오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