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
제45화. 지하
“그, 돌아가신 집사님에게는 조금 죄송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뭐가?”
“…저택 나오면서 물건을 잠깐 빌렸거든요.”
훔쳤다는 말을 예쁘게도 표현했다. 이안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쳐다봤다. 괘씸하기보다 진짜 어이없는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안 님이 당부하셨지 않습니까? 그만두라고.”
“그래그래. 내가 그러했다.”
“저택은 나가야 하지, 일자리 새로 구할 때까지 돈은 필요하지. 근데 제가 이안 님 부탁으로 몇 번 집사님 방을 들어갔었잖아요.”
그때 점찍어둔 걸 관두면서 가져왔다는 말이었다. 거참, 맹랑하기 짝이 없다. 물건이 사라지면 당연히 관둔 자를 의심할 게 분명할 텐데?
“그때 저 말고도 열댓이나 관두었습니다. 다른 이유지만, 부인께서 엄청 예민해지셨거든요. 하루가 멀다고 매질이 심해져서 저택 분위기가 엉망이었어요.”
“메리 부인이? 어쩌다가?”
“저는 맞은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모양입니다. 팔이랑 다리에 이상한 반점도 많이 나고, 아무튼 계속 붙어있다가는 매질로 죽겠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관둘 거, 사람들 틈에 섞여서 나가면 모르겠거니 싶었다. 집사의 물건 중 유일하게 자물쇠가 걸려있어서 귀한 거라 짐작하고 챙긴 것이다.
이안이 짐작하여 되물었다.
“그런데 별로였던 것 같구나. 표정이 영 안 좋아.”
“예에. 글쎄 이제껏 모아둔 서신이랑 그림 따위였습니다. 추억을 훔친 기분이지 뭐예요. 차라리 돈이었으면 이런 기분도 안 들었을 터인데.”
해나는 죄책감에 잠까지 못 이루었노라 고백했다. 그리고 동생을 내려놓은 다음, 서랍 아래 칸을 열어 종이봉투더미를 꺼내왔다.
“혹시 장례를 하실 거면, 같이 가져가서 태워주시겠어요? 저가 갖고 있다간 정말 천벌 받을 것 같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베릭에게 넘겨주었고, 베릭 역시 습관적으로 봉투 안을 열어 헤집었다. 뭐 쓸 만한 게 없나 싶은 손짓이었다.
“베릭.”
“엥? 왜? 보면 안 돼?”
“수고스럽다. 잘 넣어두거라.”
이안이 혀를 쯧, 차려고 하는데 베릭의 손가락 틈으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갓 고용된 집사가 업무를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참고한 저택 조감도였다.
“줘. 집어넣게.”
“잠깐만.”
“와. 나보고는 보지 말라고 하더만.”
“시끄럽구나. 가만있어 보아라.”
이안이 아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브라츠 저택의 조감도였다. 상세하게 층별로 나뉘어 있고, 방 한 칸의 창문과 문 위치까지 완벽했다. 그런데 왜…….
“왜 위화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위화감? 그게 뭔데?”
“뭔가 조화롭지 않다는 뜻이다.”
“어디 한번 봐요. 음음.”
이안의 말에 베릭과 해나가 고개를 들이밀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해나는 저택에서 일했던 기억을 토대로 꼼꼼하게 비교해 봤으나, 크게 다른 점을 찾진 못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는데요?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거라면 이거네. 이때는 정원이 휑했다는 거?”
“정원이 휑해?”
베릭이 짚은 것은 조감도에 그려진 나무 한 그루였다.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이었으나, 이안은 그것이 별채에서 가장 가까운 버드나무인 것을 알아챘다.
“보통 이런 조감도는 조경을 생략하곤 한다. 덤불이니 나무니 세세하게 그리다 보면 끝이…….”
이안은 말을 흐렸다. 그래, 조감도는 조경을 그리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여기에는 이 나무가 그려져 있나?
그저 작성자의 의미 없는 그림일 수도 있지만, 이건 저택 관리자에게 내려지는 문서였다. 의미를 부여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터.
“베릭.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가자.”
“왜! 나도 알려줘.”
“해나, 또 연락하겠다. 저택이 정리되는 대로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해. 가능하다면 그만두었던 사용인들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수소문해보겠습니다. 저는 당연히 좋아요. 이제 뭘 어찌 먹고 살아야 하나 했는걸요.”
이안은 해나의 말에 방긋 웃으며 소매 단추를 뜯어주었다. 화친식 때 입었던 옷이었다. 단추 하나만으로 당장 굶주림은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판국에 보석을 받아줄 만한 곳이 건재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일종의 계약금이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은 정말이지 신기하네요. 저희가 굶을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세요.”
“그게 내가 너를 만난 이유인가 보지.”
“그럼 저도 이안 님을 만날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마 마구간지기 아저씨는 안 다치신 것 같아요. 어제 지나가다 본 것 같거든요.”
“아아. 그래. 나도 그자는 보았다.”
“들어가십시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거라.”
이안은 해나와 인사를 마무리하며 저택으로 내달렸다. 말에서 내릴 생각도 없이 바로 별채로 돌아가 조감도의 나무를 찾았다.
‘저건가 보군.’
가지가 축 처진 것처럼 아래로 내려져 있는 게 특이했다. 그 아래, 천려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는 구룻잎을 태워 먹고 있었다.
“이안 님?”
“어쩐 일이십니까?”
“잠시 망을 좀 봐주겠나?”
“망이요? 야야. 네가 가봐.”
바싹 타버린 별채와 군데군데 파인 구덩이. 분명 화재로 인해 죽은 사용인들의 시체가 묻혀 있을 것이다.
음산한 기운 때문일까? 중앙군과 조사단은 별채 쪽으로 눈길도 안 줬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중앙군과 조사단이 보지 못하게 해주게.”
“으음. 알겠습니다. 여기서 일 보시나요?”
“그래. 잠시만 비켜주게.”
천려족들은 별다른 의문을 달지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고 벽을 끼고서 사주경계에 들어섰다. 베릭은 조감도를 거꾸로 든 채 나무와 그림을 계속해서 비교했다.
“여기 맞아?”
“맞아. 그러니 서 있지 말고 땅 좀 파봐라.”
“에고고. 진짜 삽질하네, 삽질해. 주인 잘~ 만났다!”
나무는 특정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분명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당최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베릭은 단검을 꺼내서 바닥을 꼼꼼히 긁어내렸다.
“근데 메리랑 첼을 찾으면 직접 죽일 거야?”
“그럴 리가. 그리 죽일 수는 없지.”
이안은 잔디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풀의 억세기가 뭔가 다르다.
“오히려 당분간은 살려두는 게 좋다.”
“무슨 뜻인데?”
“그래서 멀리, 아주 멀리 도망치게 하려고.”
가짜 잔디다.
이안은 베릭에게서 단검을 가져와 틈새에 밀어 넣었다. 지렛대처럼 들리는 땅. 멀리서 구룻잎만 씹어대던 천려들도 의아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끼익.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나선형 돌계단으로 나 있는 지하실. 바닥을 손으로 쓸어보니 축축했다. 문과 땅 사이에 이음새가 생긴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다.
즉, 최근에 누군가 여길 이용했다는 거지.
“찾았다. 베릭. 얼른 준비해라.”
“알았어, 왜 이렇게 급해?”
“한심하긴. 브라츠를 쫓는 게 우리만이 아니잖느냐.”
“또 누구? 에리카?”
“그래.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랜턴 가져와.”
* * *
메리는 타오르는 심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장과 벽을 따라 울리는 소음. 아마도 저택을 새롭게 차지한 외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편인 데르가가 자신과 아들을 데리러 왔을 테니까.
빛 한줄기, 바람 한숨 들어오지 않는 땅굴에서, 메리 부인은 인생 최악의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 나 배고파.”
“육포라도 먹어.”
“여긴 이것밖에 없어?”
첼은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투정을 부려댔다. 그럴 나이가 아니면서도, 어찌 저딴 말밖에 못 하는 건지! 메리 부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아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뒤쪽 문이라도 옮겨볼까?”
“쇳물을 들이부어 막은 것이다. 괜히 손 다칠 일 하지 말고 앉아있어. 체력이라도 남겨둬야지.”
지하 감옥과 비슷한 공간. 외부로 통하는 비밀 문은 침입 경로로 이용될 경우를 대비, 데르가의 아비가 막아버리고 말았다. 그때는 천려족과 분위기가 워낙 안 좋았으니 이해는 한다만, 자충수도 이런 자충수가 따로 없지 않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조금만 더 기다리자. 며칠 내로 기회가 있을 거니까. 폰트롤로 돌아가면 푹 쉴 수 있으니, 참아.”
메리는 메렐로프 영지를 거쳐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반역죄인이라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겠지만, 가족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메리는 손톱에 붙은 보석을 하나씩 떼어내며 드레스에 문질렀다. 싸구려로 치부했던 보석들이 귀한 노잣돈으로 쓰일 줄이야.
저벅저벅.
그때였다. 별안간 환청처럼 발소리가 들렸다. 메리는 반사적으로 등불을 껐고, 첼은 침대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저 멀리서 어렴풋이 누런 빛이 흔들렸다.
“허억!”
누군가 온 것이다! 저택의 비밀 공간을 알아채고, 그들의 흔적을 쫓기 위해! 메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꾹 쥔 채 숨 쉬는 것도 멈추었다.
‘데르가, 당신인가요? 빨리, 빨리…….’
당신이라면 신호를 보내줘요.
하지만 메리의 절절한 바람에도 불구,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고도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돌벽 위로 그림자가 질게 늘어졌다.
“거기 있습니까? 어머니, 첼 형님.”
“…네, 네가 여길 어떻게!”
두어 달 만에 듣긴 했지만,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안이었다.
이안은 비밀 공간을 둘러보며 놀랍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내들은 붉은 안료를 얼굴에 칠한… 천려족!
“이, 이게 대체 어떻게…….”
“이야, 땅굴을 파놓고 있었네. 데르가도 참 대단해.”
“원래 제국 귀족들은 이렇게 개구멍 하나쯤은 만들어 놓는다지 않나. 싸우다 죽을 바에는 도망가는 족속들이니까.”
“근데 뒤쪽에 나가는 길이 없어 보이는데?”
“어어. 그러게.”
메리는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분명 저택에 주둔하고 있는 건 조사단과 중앙군이라 짐작했는데 말이다. 이안과 천려족이 어찌 나타난 것인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아아아안!”
쉬이이익!
메리는 반사적으로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몰린과 접선하여 데르가를 고발한 것도 이안이었고, 천려족을 꾀어 동맹을 파기한 것도 이안이라 믿는 그녀였다.
여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천려의 전사가 서둘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아악! 아파!”
손을 쳐내려는 듯 발버둥 쳤지만, 우악스러운 전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전사는 가볍게 단검을 뺏어 던져 버렸고 메리 부인을 결박하며 벽에 짓눌렀다.
쿵!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천한 것들! 근본도 없는 것들!”
“어머니. 과격해지셨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하십니다?”
“닥쳐! 닥쳐!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이안은 랜턴을 들어 메리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퀭해진 눈 밑, 거무죽죽해진 피부, 핏줄이 잔뜩 선 누런 눈동자. 게다가 각질로 엉망인 입술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반면 첼은 살이 좀 빠지고 먼지를 뒤집어쓴 것 외에는 별달리 달라진 게 없었다.
‘…왜 이러지?’
이안은 메리 부인의 변화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