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0
제450화. 독이 든 찻잔
에리포니는 응접실로 돌아오자마자 웃옷을 풀어 헤쳤다. 그녀의 침묵은 살벌했으며, 소파에 널브러진 채 삼키는 신음은 내면의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게 했다.
부하들은 엘더트 뒤쪽으로 물러나 혹시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여 고개를 바짝 숙였다. 엘더트만이 그녀가 벗어 던진 옷을 정리하며 이를 뿐.
“전하. 버고스 측 사절을 이쪽으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가능하다면 사절 대표 한 명만 데리고 오거라. 유약해 보이는데, 눈에 서린 독기가 만만치 않은 자더라. 다몬 왕의 혈육이라 하니, 필시 그 안에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터. 잘하면 대화가 쉬이 통할 수 있겠어.”
엘더트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응접실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삼십 분. 그사이 버고스 쪽을 꾀어보던가, 아니면…….
‘바리엘의 주축인 두 어린것들 모가지를 비틀어야 할 것이라. 그것만이 현 상황을 타개할 방도.’
물론 루스웨나가 전면에서 나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왕궁과 국민들이 있지 않나? 두 아이가 흘린 피는 버고스 쪽으로 흘러들어 가야 할 것이며, 바리엘의 분노 역시 그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은 바리엘의 황궁. 주위에는 루스웨나를 지켜보는 눈과 귀가 즐비했고, 그녀의 병사 대부분은 정문조차 넘지 못하여 궁 밖에서 서성일 뿐이었다.
무기는 또 어떠한가? 화살이 없다는 근거로 겨우 들일 수 있었던 금빛 활 외, 그들은 조그만 단검 하나 소지하지 못했다.
똑똑.
끼이익.
수백 근에 달하는 곰도 단 한 방울이면 즉사시킬 맹독. 그것만이 에리포니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그저 스치기만 하여도 상관없는데, 신께서 기회를 주지 않는 이상 방도가 까마득했다.
에리포니는 관자놀이를 짚은 채 사념에 빠져있느라 누군가 들어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찻잔이 테이블에 놓이고 부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정신을 겨우 차렸다.
달그락.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기에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십니까?”
“너-!”
자이라다. 방자하고 건방진 마법사 꼬맹이. 아까 자신 있게 왕을 모욕하던 그 표정 그대로, 눈앞에서 찻잔을 내려놓고 있는 것 아닌가?
에리포니가 반사적으로 자이라의 멱살을 붙잡으려 하자, 아이는 몸을 뒤로 빼내며 경고했다.
“나는 더 이상 루스웨나의 마법사가 아닌 바리엘의 마법사인데, 이리 함부로 대하셨다가는 피해 배상금에 지장 찍을 때 곡소리 좀 내셔야 할 것입니다. 저도 여기 와서 알았는데요, 마법사 몸값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찢어 죽일 것 같으니라고. 지금 누구 앞이라고 그따위 천박한 망발인가? 루스웨나는 너를, 그리고 네 잘난 할미를 낳고 길러준 조국이다. 그런데 감히 배신을 해?”
“낳고 길러준 조국이면, 죽음까지도 정할 수 있는 겁니까?”
“노인네는 스스로 죽었다. 그 자리에서 같이 보았는데, 계속 헛소리구나. 어리고 천한 것 같으니라고. 내가 다른 마법사들은 몰라도, 네놈 하나만은 반드시 루스웨나로 데려갈 것이다.”
에리포니는 자이라의 신분을 자각하여 직접 손을 뻗진 않았으나, 거대한 덩치로 천천히 상대를 압박했다.
점점 뒷걸음질 치는 아이. 루스웨나의 부하들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고, 에리포니의 거대한 그림자가 아이를 집어삼킬 듯이 덮쳤다.
투욱.
결국 자이라의 머리가 문에 닿는 순간. 아이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곤 에리포니의 팔을 밀치려 했다.
왕은 처음부터 그것을 원했는지, 아이가 손 뻗는 것을 기꺼이 기다렸다.
끼이익.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아이의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말이다.
이안이었다. 이안은 자이라의 어깨를 잡은 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에리포니와 마주했다.
“자이라.”
“이, 이안 님.”
“이안 경.”
이안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힐끔 보더니,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했다. 아이의 치기다. 가슴에 남아있던 원망을 쏟아내고자 왕을 직접 만나러 온 것이니.
이안은 에리포니에게 가볍게 경례하여 예를 표했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그대가 실례할 것이 무엇 있나?”
“자이라는 이제 바리엘의 마법부 소속이니, 제 부하입니다. 부하가 실수하였으니 사과를 드리는 게 옳지요. 아직 어린것이라, 과거의 슬픔을 쉬이 잊지 못하나 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자이라는 이안의 소매를 꽉 붙들며 반항적인 눈빛으로 에리포니를 노려보았다.
이해는 한다만, 공감할 필요까지는 없지. 에리포니는 허리를 살짝 굽혀 문틀에 팔꿈치를 기댔다.
“참으로 신기하군. 루스웨나의 마법사가 단 며칠 만에 바리엘의 마법사로 변하였으니 말이야.”
“고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국적은 선택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좋아. 그대 부하의 실수로 인하여 이리 마주하게 된 것도 기회인데, 잠깐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지? 나눌 얘기도 좀 있고.”
오히려 잘 되었구나. 에리포니는 그 생각과 함께 등을 돌렸다. 이안은 창문으로 그녀의 미소를 보았고, 잠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척했다.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하시면 회의장에서 하십시오. 그때는 시간이 많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나? 누군가를 만나기에 충분한 시간인데.”
에리포니는 자신이 타국과 접선할 수도 있음을 은근히 흘리며 이안을 자극했다.
원래 휴정 중에는 각국이 독립적으로 대기하게끔 방과 방을 멀리 떨어트려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갑작스러운 휴정이었고, 바리엘 측은 클리포포드와 만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경비병들 또한 충분히 주의를 돌릴 수 있는 수준.
에리포니가 이를 지적하자, 이안은 복도 좌우를 살핀 다음 응접실로 한 발 들어섰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무릇 대화가 성립되려면 서로에게 가치가 있어야 할 텐데요. 루스웨나의 일방적인 발언이라면, 대화라기보다는 부탁이라 하는 게 맞겠습니다.”
빤하지 않나. 피해 배상금을 덜어달라, 루스웨나에서 넘어간 마법사들을 인도하지 말아달라, 등등. 대화 대부분이 루스웨나가 바리엘에게, 정확히는 에리포니가 이안에게 선처를 구하는 내용일 터였다.
그럼에도 빳빳하게 쳐든 고개라. 이안은 가히 재밌다는 낯으로 웃었다.
스윽.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대거 이동하여, 마법부에서는 축제겠어.”
에리포니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손수 차를 다려냈다. 주위를 경계하며 서성이는 이안이었지만, 마주하고 앉아있지 않았기에 틈이 만들어졌다. 에리포니는 마른 잎에 독을 톡톡 떨어트리고서, 잠시 숨을 골랐다.
‘엘더트가 곧 있으면 버고스 측 사절을 데리고 올 것이다.’
그때 맞춰서 물을 부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거사를 앞두고 있어서 긴장한 것이 아니다. 원래 성정대로라면 심장에 화살을 꿰고 목을 뚫어버리는 게 맞건만, 이리 조심조심 행동을 자제하려 하니 감질나서 그런 것이다. 에리포니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찻잔을 내렸다.
타악.
그 소리에 맞춰 뒤를 돌아보는 이안. 에리포니는 그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하였으나, 이안은 탁상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낄 뿐이다.
“하실 말씀, 하십시오. 여기서도 잘 들립니다. 협상을 앞두고 잡음이 들리지 않았으면 해서요.”
“이미 방에 들어온 것 자체가 바리엘 관료들에게는 잡음거리일 터인데?”
“천방지축 부하를 데리러 온 것뿐이니, 이해를 구하기 어렵진 않겠지요. 특별히 할 말 없으면 이만 나가겠습니다.”
“바리엘 행정부에서 산정한 것인가?”
이안이 몸을 돌리려 하자, 에리포니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무엇을요?”
“피해 배상금. 현재 루스웨나에는 그걸 상환할 능력이 없다. 누구들 덕분에 왕궁이 엉망인 터라, 더더욱.”
에리포니의 삼백안이 자이라를 쭉 훑었다. 아이는 이안 곁에 바짝 붙었고, 이내 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로 쏘아붙였다.
“왕궁 창고라도 터십시오. 내가 다 보았습니다. 온갖 금은보화와 귀물들이 가득하던데. 그런 걸 쌓아두고 돈이 없다 합니까?”
“입 다물라.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왕궁의 보물들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었다. 하나같이 역사가 깃들어있는 것들인데, 그것을 팔아넘긴다는 것은 곧 에리포니 스스로 왕실 정체성을 끊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 받아주는 바리엘 측에서 값어치를 올바르게 측정해줄 리 만무했고 말이다.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조국을 버리고 바리엘로 간 것엔 그들의 자유가 작용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이 루스웨나 왕궁을 엉망으로 만든 걸 짚지 않을 수 없지. 이제는 그대가 ‘저것’의 상관이라 하였지?”
클리포포드가 피해 배상금을 받는 것과 같이, 루스웨나도 그걸 받을 권리가 있었다. 마법사들의 책임자가 현재는 마법부의 이안이었으니,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엄밀히 따지자면,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반역자이자 왕궁을 파손시킨 범죄자들이다. 이를 면책하지 않고서 바리엘로 넘길 수는 없으니, 혹여 이안 그대가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협상 이후 루스웨나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네. 안 그래도 창고가 비는데, 마법사들이라도 데리고 와야 나라가 돌아가지 않겠나? 응?”
에리포니가 싱긋 웃으며 자이라와 눈을 마주쳤다. 아가, 보았지? 아직 너희를 데려올 수 있는 길이 있단다. 너를 루스웨나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그리한다면 네 목에 마력봉인석을 평생 채워놓고 죽는 그 순간까지 루스웨나만을 위해 일하도록 하마.
속으로 되뇌는 저주가 들리는 것일까. 자이라는 다시금 이안의 뒤로 슬며시 숨어들었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 엘더트였다. 버고스 측의 사절단을 데리고 온 것이라. 에리포니는 서둘러 들어오라 명하였고, 엘더트는 안에 들어서 있는 이안과 자이라를 보고서 멈칫거렸다.
뜻밖의 상황. 그는 자신의 주군과 눈빛을 짧게 주고받는 것으로 사태를 파악했고, 이내 자연스레 바니아를 안내했다.
“버고스의 바니아 사절 대표입니다.”
“아.”
그녀 역시 이안의 존재를 보고 당황한 듯 보였다. 이안은 이것 보라며, 눈을 가늘 게 뜨고서 에리포니와 바니아를 번갈아 봤다.
“나눌 것이 많으신가 봅니다. 쉬는 시간에도 참지 못한 채 이리 온 것으로 보아.”
“이리 앉으시오. 바니아 대표.”
달그락.
에리포니가 찻잔을 달그락거리자, 바니아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에리포니는 미리 담아두었던 자신의 차를 홀짝였다.
남은 두 찻잔에는 마른 잎만이 담겨있다.
“장관께서도 앉으시지요. 모두가 앉아있는데, 그리 서 있는 것이 바리엘의 법도는 아니겠지요?”
바니아가 자리에 앉았으나, 시종들은 찻물을 따라주지 않았다. 앞에는 일국의 왕이고, 옆에는 제국의 장관이라. 시중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다 여겼는지, 바니아는 스스로 주전자를 잡아 물을 따랐다.
그걸 본 이안이 바니아 옆에 앉았으며, 에리포니는 자연스레 독이 퍼진 차를 이안에게 권했다.
‘차는 자이라가 가져온 것이고, 이안은 스스로 걸어들어왔다. 물 또한 바니아가 따랐어. 정문에서 몸수색을 철저히 하였으니, 독 주머니만 은밀히 처리하면 루스웨나를 이 사태와 엮을 수 없으리라.’
보란 듯이, 에리포니가 먼저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모락모락, 김 올라오는 것을 보고만 있는 바니아와 이안. 이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망설임 없이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