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1
제451화. 압도
“전하. 고민하실 일이 아닙니다.”
수상은 답답하다는 듯 지그시 콧대를 눌렀다. 다른 일에서는 사리가 분명하신 분이건만, 어찌 이럴 때만 제 나이를 드러내 보이신단 말인가?
진은 이마를 짚은 채 주위에서 떠드는 관료들의 발언을 듣고 있었다. 아니, 듣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소리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을지 모를 일.
“전하의 의중도 이해는 됩니다. 이안 경이 여러모로 미심쩍은 것은 사실이나, 바리엘에 있어서 둘도 없이 귀한 인재임엔 분명합니다. 클리포포드로 보내면 당연히 바라는 바대로 균열로 들어갈 터인데, 그리하면 귀환 일정은 물론이고 생사조차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본인이 가고 싶다 하는데 왜들 자꾸 이리 막으십니까? 인재임은 분명하지만, 자리가 비워지면 필시 그곳을 메울 사람이 또 나타날 것입니다. 마법부에 인재가 그리 없습니까? 웨슬리 전 장관 때도 그러했지요. 저만한 대마법사는 없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보십시오. 이안 경이 나타났고, 이제 바리엘은 다시금 새로운 마법사를 품을 수 있습니다.”
“다 차치하고, 클리포포드에서 내건 제안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우리가 의도하고 상정한 부분 아닙니까? 가타부타 없이 구상권을 모두 넘기겠다고 하니, 두 나라를 견제하는 데 있어 이만한 발판이 없지요.”
“예. 저도 동의합니다. 특히 전하께서는 버고스에 군사 배치 이동을 명하셨습니다. 러더포드라는 상단주에게 버고스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바리엘에서 흡수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입니다. 이드갈 따위나 만드는, 의중 모를 작자가 옆 나라에 깃발을 꽂게 생겼어요. 이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리저리 조율할 줄 알았는데, 별말 없이 넘겨준다는 걸 보니 클리포포드 내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은 듯합니다.”
“운이 따랐다고 해야 할지, 흐음. 우리 쪽에서는 상당한 호재인데요.”
“반증입니다. 균열의 심각도가 계속해서 깊어지고 있다는 반증이요. 이는 클리포포드를 넘어 바리엘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콰앙!
진은 따닥따닥 귓가로 쏘아지는 발언들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려쳤다. 항시 온화하고 유순했던지라, 이리 격정적인 감정 표현은 처음이었다.
관료들이 모두 당황하여 입을 벌린 채 멈추었고, 몇몇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들어오던 문을 그대로 뒷걸음질하여 나갔다.
“다들 주장하는 바를 잘 알고 있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단 말이오. 하지만-”
“전하.”
수상이 진의 옆에 무릎 꿇었다. 또 이전에 했던 말이나 하겠지, 진이 그리 생각하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수상의 발언이 아이의 폐부를 깊이 찔렀다.
“이해관계가 명백하거늘 이리 고민하심은, 이안 경의 존재 자체가 이미 실(失)이라는 뜻입니다.”
“…수상.”
“마법의 발전과 바리엘의 미래 그리고 가이아의 절대 패권, 다 좋습니다. 이안 경이 가져올 찬란한 세상을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이리 전하의 결단을 흩트려놓고, 명명백백한 이해관계의 진행을 가로막으니, 그 존재만으로 바리엘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된 지 오래예요.”
진을 성장시키는 존재라 여겼던 이안이, 이제는 그 성장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아끼고 또 아끼며 곁에 두고자 했던 마음이 만든 불균형.
진은 새로운 세상이 깨어지는 것과 같은 충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째서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 이안이 계속 떠나려 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바리엘의 유일 황태자께서 제국민의 미래와 단 한 명 마법사의 미래를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전하. 이것은 아니 될 일이에요.”
제아무리 이안의 가치가 수천 금에 달할지언정, 진의 판단을 흐트러트린다면 악(惡)이다. 수상은 그리 결단 내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황제 외, 머리 숙이는 일이 잘 없는 자였으니, 이는 진을 황제와 같이 생각한다는 뜻이요, 목숨 건 충언이라는 의미다.
“전하. 협상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있을 수도 없지요. 녹봉을 먹는 자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니, 어찌 궁에 남아있겠습니까?”
“수상!”
“결단하소서. 제 마지막 간언입니다.”
수상이 그리 나오자, 그를 따르는 수십 명의 관료 역시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반대하는 몇몇 관료들만이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
진은 시아오시를 바라봤고, 시아오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다.”
진의 입에서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클리포포드로부터 모든 구상권을 건네받고, 재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하기로.
이렇게 된 이상, 진이 할 일은 이제 정말 하나밖에 없다.
“대신, 버고스 측 합의서에 내용을 추가할 것이다.”
“어떤 내용 말씀이십니까?”
“피해 배상금에 마력석을 포함하도록. 마력석 종류는 마법부의 자문을 받아 작성할 것이며, 이에 관해서는 어떠한 의견도 듣지 않겠다. 마력석만큼은 마법부의 소관이니.”
수상은 어리둥절하게 잠시 진을 살펴보았으나, 이내 문제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분을 삭감하는 게 아니라 마력석을 추가로 받겠다 하는 것이니, 특별히 다른 부서와 조율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이는 바리엘에 무조건적인 득인지라, 반대할 연유도 없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이안 경에게 전달하라.”
“옳은 결단 내리심에, 참으로 황송합니다.”
“…그대가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각자가 할 일을 했을 뿐. 당연한 일이니 고마움은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수상은 눈짓으로 관료들에게 서둘러 움직이라 명했다.
타닥타닥!
콰앙! 쾅! 드르륵!
그때, 바깥에서 들리는 바쁜 발걸음.
수상이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자, 시종들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묻어있는 피.
단숨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채고, 시아오시가 검 손잡이를 붙들었다. 수상과 다른 관료들도 마찬가지.
“무, 무슨 소란인가?”
“크, 큰일, 큰일 났습니다! 이안 경께서……!”
“이안 경이 왜? 설마!?”
“설마 아니겠지?”
이안이 내란이라도 일으킨 것일까? 몇몇 관료들의 낯이 희게 변하며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방금까지 그의 출생과 목적 따위에 별별 추측을 더했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시종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연신 숨을 헐떡였다.
“이안 님이 각혈하며 쓰러지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연유 탓에?”
“모르겠습니다. 지금 의사들이 대거 달라붙긴 하였는데, 수, 숨을 안 쉰다고 하시어…….”
벌떡!
진은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금 회의장에서만 해도 멀쩡했던 자가, 어찌하여 각혈하며 쓰러져? 게다가 숨을 안 쉰다니? 진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시종 쪽으로 다가갔다.
“…그, 것이 어찌 된 일인가? 전쟁에서 얻은 후유증 탓이라 하던가? 아니, 숨을 안 쉰다니. 이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은 어지럽고 오한이 나며 피를 흘리는 것과 같은 증상이 아니라-
‘죽음.’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건만.
타닥타닥!
타앗!
“전하!”
시종이 아무 말 못 하고 납작 엎드리자, 진은 단번에 발돋움하여 그를 지나쳤다. 온 힘을 다하여 내달리는 복도. 관료와 시종들이 놀라서 소리쳤고, 시아오시는 기민하게 아이의 뒤를 쫓았다.
이렇게 달렸던 적이 언제였던가? 아마 진의 기억 속에 강렬히 새겨지는 순간일 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복도. 진은 누가 서 있는지 살필 틈도 없이, 오로지 소란만을 뒤쫓아 뛰었다.
그리고 그 끝에, 이안이 있었다.
“이안 님!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이, 시발 것들아! 너희 뭐 했어!?”
“잠깐, 비켜주십시오. 의사입니다! 제가, 의사예요!”
“궁 안에 있는 루스웨나인과 버고스인들을 모두 잡아들여야 합니다! 이자들과 차를 마신 후에 이리되셨어요!”
“치유 마법사들은 아직입니까?”
“그것이, 전쟁에서 겪은 이드갈로 인해 마력이 불안정합니다.”
“다들 이리 붙어! 이안 님한테 모두 마력 넣어!”
“우리는 결백하오! 차를 마시라 권하긴 했지만, 이를 들고 온 것은 마법부요. 그리고 이안 경이 스스로 찾아왔고! 자칫 우리의 왕께서도 변을 당하실 뻔하였소이다!”
“닥쳐라!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주둥이? 하! 이것 보시오!”
시장 바닥과 다름없었다. 마법사들은 한데 우글우글 모여들어 바삐 무언가를 소리쳤고, 바리엘 경비병과 루스웨나 그리고 버고스가 동시에 결백을 주장했다.
그 와중 마법사들 틈으로 새어 나오는 환한 빛. 마력이 모여 이안에게 스며드는 중이었다. 진이 다가서자, 경비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길을 터주었다.
“저, 전하.”
“진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길을 트시오!”
“전하, 보시면 아니 됩니다. 잠시 물러나심이……!”
“비켜라!”
아이라 걱정되는 마음에 진의 눈앞을 가리던 경비병. 벼락같은 호령에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진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안의 형상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안 경?”
힘없이 늘어진 머리칼. 그리고 피로 잔뜩 물든 흰색 셔츠. 영롱하던 녹안은 볼 수 없었고, 항상 곧던 허리 역시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진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
놀랍도록 차가운 살결. 사람의 손이라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뻣뻣했다.
진은 그제야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하는 듯했다. 당황스럽고, 허망하며,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무, 무엇들 하는가. 서둘러… 마력을 계속 넣어.”
“저기, 진 전하.”
“뭣들 하느냐고!”
진이 거칠게 마법사의 팔을 잡아 흔들자, 붙들린 이는 당황한 듯 멈칫거렸다.
그때, 진의 시야에 들어온 한 사람. 저 먼발치에서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는 에리포니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버고스의 사절인 바니아.
두 여인은 소란을 틈타 무언가를 속닥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게나 수상해 보일 수 없었다.
“에리포니!”
“…예. 전하.”
깜짝이야, 에리포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진을 흘깃거렸다. 그런 그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진. 워낙에 체격 차이가 크게 나는 터라, 에리포니에게 위압감은 없었다.
“이안 경이 그대와 차를 마시다 저리되었다고?”
“정말 당황스러워 어쩔 방도가 없었습니다. 마법부에서 내온 차를 마셨는데, 저리 쓰러지더군요. 차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차했다간 국가 간에 오해가 생길 뻔했어요.”
에리포니 자신이 마셨으면 큰일이었다는 뉘앙스다. 그 말인즉, 루스웨나는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걸 주장하는 것인데, 진이 보기에는 저 능청맞은 표정과 태도가 영 수상쩍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이 저리되었는데 잘잘못을 가리고 있을 필요 있나?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잘못이다. 이안을 죽게 만든 죄. 이안 대신 죽지 않은 죄.
그래서 황태자는, 책임을 묻기로 했다.
뻔뻔한 낯짝으로 감히 저지른 대죄에 대한 책임을.
“…꿇어라.”
“예?”
“…무릎을 꿇으라 하였다.”
진은 에리포니를 올려다보며 그리 명령했고, 왕의 입매는 보기 좋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제아무리 바리엘의 황태자라 한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니? 아무리 정세가 불리하다 해도 일국의 왕이었다. 어떠한 명분도, 증거도 없이 이럴 수는 없는 게다!
왕의 뜻을 감지한 엘더트가 항의하기 위해 다가왔지만, 시아오시의 검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하!”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에리포니가 노골적으로 분개해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릴 뿐.
“…지금 꿇지 않으면 무릎 아래를 자르겠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말로써 하는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