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3
제453화. 얼룩이 되다
쿠웅!
에리포니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심장에 박혔던 화살은 더더욱 깊이 몸을 꿰었고, 핏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금 현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재빠르게 눈동자만 굴려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발치뿐.
꺽꺽, 거친 숨소리가 천한 미물과 다름없으니, 바닥에 딱 붙어 죽어가는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에리포니 왕이!”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방금 화살을 쏜 자가 누구인가? 바리엘인가?”
“모르겠습니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화살을 수거하면 알 수 있겠지요. 이봐라! 에리포니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화살을 확인하라!”
“저것은, 바리엘의 화살이 아닌데요. 루스웨나에서 제작,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생사를 먼저 확인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정확히 심장 부근이라.”
“그리고, 살릴 생각이 있으세요?”
“바리엘에서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요. 크흠. 무력을 동반해 소란을 피우고, 감히 전하께 활을 겨눈 자입니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어요. 가슴 부근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맥을 짚어보아라! 저자가 살아있는지를 확인-!”
갑자기 끊어진 관료의 목소리.
에리포니는 가빠진 호흡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써대고 있었다. 온 감각에 독기(毒氣)가 스며드는 것 같다. 심장이 검은 피를 토해내고, 사지에는 힘이 빠져나갔으며, 머릿속은 죽음의 그림자로 온통 얼룩졌다.
스윽.
그런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꿇어앉는 자. 발목까지밖에 안 보이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우아함과 오만함 그리고 그에 걸맞은 기백이 흘러넘치는 자였으니.
분명 독 든 차를 마시고 쓰러졌던 이안이,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고통스러우십니까, 에리포니 왕이시여.”
“너, 너…….”
“그대가 죽인 생명들의 무게입니다.”
투욱.
이안이 화살 위에 손을 가볍게 가져다 대자,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파도처럼 에리포니를 덮쳤다.
전쟁터의 언덕 위에서 무심하게 쏘아 올렸던 금빛 화살들. 그것들이 꺾었던 무수히 많은 생명의 무게가, 그녀를 강하게 짓눌렀다.
에리포니는 바닥을 기며 고통스럽게 소리쳤다.
“아아아악!”
“그리고 이것은, 화살을 쏘아 올린 자가 지닌 분노의 무게.”
“이-! 죽일! 으아아악! 닥쳐라! 닥쳐!”
지이잉. 지잉!
화살이 미세하게 진동하자, 에리포니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무릎을 꿇는 것은 바닥 위에서 행하는 비참함이지만, 이것은 바닥 그 아래로 치닫는 비참함이었다. 에리포니의 입가로 흰 거품이 일었고, 온 의지와 기세가 깃들어 있던 삼백안은 붉게 충혈됐다.
“현요(眩耀). 대상자가 강한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 때 그 숨을 앗아가는 마법입니다. 사실상 그 성격이 저주에 가깝지요. 발동에 필요한 것은 대상자로 하여금 발생된 죽음. 에리포니 왕이시여. 이 화살은 다른 게 아니라, 그대가 쏘았던 그것이랍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왕께서는 그저 이토록, 최대한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다 죽으면 되니까요. 마법을 건 자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이안, 네가 건 것인가? 에리포니는 그리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피가 역류하여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자세를 꼿꼿이 한 채 서 있는 자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작은 두 주먹으로 꽉 쥐고 있는 옷깃. 있는 힘껏 찡그린 눈썹. 그리고 눈에 형형한 분노.
에리포니는 마법을 건 자가 자이라라는 걸 직감했다.
“네 이놈-! 커허억!”
조국을 배신한 것으로도 모자라, 왕의 심장에 화살을 꽂아? 에리포니는 자이라의 목을 비틀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바닥을 기어갔다. 그녀가 움직인 길을 따라 축축한 선혈이 길게 늘어졌으니, 실로 피 흘리며 죽어가는 뱀과 같다.
“……!”
에리포니의 손끝이 자이라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왕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라.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바닥에 바라보며 죽어버린 루스웨나의 왕, 에리포니. 이안은 천천히 무릎 꿇어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루스웨나 사절은 들으라.”
그리고 루스웨나에게, 정확히는 그 자리의 타국인 모두에게 일렀다.
“루스웨나의 에리포니 왕이 서거했다. 이는 스스로 쏜 화살에 스스로 죽은 것이니,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으리라. 눈으로 본 자들은 모두 알 터. 사절단은 협상을 위해 남을 것인지, 아니면 루스웨나로 돌아갈 것인지 결정하길 바란다. 바리엘에서는 에리포니 왕의 죽음에 깊이 애도하겠지만, 딱 거기까지. 협상은 늦출 수 없고, 편의를 봐줄 수 없으며, 동정을 베풀지도 않을 것이라.”
스스로 쏜 화살에 스스로 죽었다.
납득할 수 없지만, 눈으로 본 것으로는 그러했기에 사절단은 무어라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곳은 황궁.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무력을 통한 소란을 일으켰고, 에리포니는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 이리된 마당에, 참수된다 한들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선택적으로 침묵하며 엘더트를 돌아봤다. 왕이 죽었으니, 그 결정 권한은 이제 그에게 있지 않나?
“아…….”
엘더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은, 그의 낯에서 보이는 감정이다. 모시는 주군이 죽었는데, 어찌 슬픔이나 분노보다 놀라움이 먼저 떠올라 있는가.
이안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대답을 종용했다. 쉬는 시간은 고작 삼십 분, 초침은 쉼 없이 움직였고, 남은 여유는 별로 없었다.
“엘더트. 결정하라. 루스웨나로 돌아간다고 하면, 병사들이 겨눈 창을 거두고 길을 터주겠다. 대신 왕의 시체는 여기 두고 가야 할 것이며, 협상에서 결정된 모든 사안에 의견 더하는 일 없이 조건 없는 수용을 해야 할 터. 황태자 전하께 활을 겨눈 대가는 왕의 목숨으로 치렀다 생각하라. 혹-”
자이라는 에리포니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허리를 깊게 숙여 그녀를 내려다봤다. 숲속에서 평화로이 살아가던 자신들을 어지러이 흔든 왕.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 것은 할머니의 의지였지만, 그 등을 떠민 것은 바로 이 왕이었다. 버린 조국의 왕이자, 제 생명을 깎으면서까지 죽이고 싶었던 원수.
이안은 그런 자이라를 힐끔거린 다음 말을 이었다.
“혹 협상 자리에 계속 참여하겠다 하면 그 또한 존중하겠다. 다만 황실 중앙에서 소란을 피운 죄는 따로 물을 것이니, 일정이 끝난 뒤 자유로이 황궁을 떠날 수 없음을 인지하라. 이에 관한 전언은 바리엘의 공식 성명으로써 전령을 통해 전파할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지금 바리엘을 떠나면 루스웨나로 돌아가 왕의 죽음을 알리고 차기 국정을 논할 수 있겠지만, 협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불리해진다. 참여하지 않은 나라의 편의를 봐줄 만큼, 클리포포드와 버고스 그리고 바리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한편, 협상에 계속 참여하여 자리한다면? 루스웨나로 왕의 죽음 소식이 전달될 것이고, 반역이 시도될 수 있다. 전쟁에서 패한 왕이 밖에서 죽어 돌아오지 않으니, 왕궁은 주인을 잃고 비어버린 집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고 협상에 참여한다 한들,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엘더트가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자, 이안은 조금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엘더트. 그리 고민할 일인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왕실의 일원이라 하지만, 그대는…….”
이안은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엘더트 내면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짐작한 것이다.
에리포니와 엘더트는 사촌지간. 하지만 정통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루스웨나에서, 엘더트가 왕위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은 극히 드물었다. 가능성이 있었더라면, 궁을 나가 대학 교수직을 지내지는 않았겠지.
에리포니의 부름으로 다시 돌아가긴 하였으나, 어쨌거나 엘더트 외 루스웨나를 이을 자들은 엄연히 따로 존재했다.
‘에리포니의 자문관이자 최측근으로서, 왕이 죽었다면 그에 따라 요직에 있던 이들이 모두 교체되어 물러나야 함이 정석이거늘. 이리 고민하는 것 자체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게다. 왕실 정통성을 위해 행동한다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먼저 돌아가, 다음 후계자에게 사태를 알리는 게 맞지 않나? 바리엘의 전령이 아닌, 루스웨나의 전령으로.’
협상에서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되겠지만, 정통성이 흔들리는 것보다야 차라리 그게 낫다. 대외적인 문제는 나라의 문제라 모두가 함께 해결할 수 있지만, 내부적인 문제는 왕궁의 문제. 해결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안은 회중시계를 꺼내 딸깍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십 분. 결정하여 알리시오. 모두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라.”
“예. 이안 님.”
“에리포니 왕의 시신을 먼저 옮기겠습니다.”
“마법으로 안전하게 옮길 것이니 길만 트십시오.”
“비켜요, 비켜!”
마법사들은 죽었던 이안의 등장에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명을 받들었다. 그 외, 다른 자들은 모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쓰러져 있는 이안의 시체와 살아있는 이안을 번갈아 보았지만.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안은 옷깃을 정리하더니 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는 촉촉한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혹 귀신은 아닌가 싶어서.
“이게,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저기 그대의 시신이 그대로 누워있다.”
“마법부의 눈속임입니다. 전하. 하늘을 날고 대지를 가르는 자들인데, 어찌 시신 하나 만들지 못하겠나이까.”
“하면, 죽지 않았어? 살아있어?”
“예.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를 위험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현요 마법 조건 때문에 상황을 잠시 꾸민 것인데, 놀라게 해드렸군요. 전하께서 이리 달려오실 줄을 몰랐습니다.”
“당연히…….”
이안 그대가 죽었다고 하는데 당연히, 당연히 한걸음에 달려오지 않겠나? 진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이안 경!”
“송구합니다, 전하.”
“그대는… 바보다!”
“…예?”
뜻밖의 말에 이안도 당황하고, 상황을 수습하던 마법사들 역시 멈칫거렸다. 아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입을 크게 비죽이며 소리쳤다.
“헛똑똑이라!”
“전하.”
“…미친. 방금 들었냐?”
“…못 들은 척해. 죽고 싶어?”
“와, 저걸 어떻게 못 들은 척해? 쉽지 않은데.”
바로 전까지 일국의 왕에게 무릎 꿇으라, 그리하지 않으면 그 아래를 잘라버리겠다 폭언한 아이라기엔 너무나 상이한 모습이지 않나.
이안이 진을 연신 달래는 동안, 자이라는 마법사 가족에게 안겨 있었다.
타오르던 복수의 불씨가 그 끝을 맞이하여 말끔히 바스러졌으니. 그 잿더미는 매캐했고, 차가웠으며, 얼룩졌다. 복수심이 타오를 땐 모든 것을 지워버릴 것처럼 강렬했건만, 그 끝엔 어찌하여 진한 얼룩이 남는 것인지.
“자이라, 괜찮니?”
“…응.”
“몸은?”
자이라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없어. 아직.”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너는 아직 어리지만, 그만큼 많은 시간을 버렸어.”
자이라는 알고 있었다. 저주에 가까운 마법, 현요의 대가는 주어진 수명의 절반이라는 것.
수명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기에, 죽음의 문턱이 어디까지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짐작으로, 삼십 년에서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증발했다고 여길 수밖에.
“전하, 이러지 마시고 자리를 옮기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이안이 진을 부축하여 가까운 응접실로 들어서자, 두 주군이 사라진 복도는 온갖 말들로 가득 찼다. 바리엘이 클리포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소식부터 하여, 앞으로 루스웨나는 어떻게 될 것인지, 협상 전략을 수정하는 게 좋겠다는 수군거림 등등.
자이라는 균열로 나아갈 길을 가슴에 품으며,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