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4
제454화. 이안이 간다
“좀 진정되십니까?”
진의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이안은 친히 손수건으로 물기를 훔쳐주었다.
바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으나, 두 사람이 있는 응접실은 실로 고요하기만 했다. 웅성웅성, 마치 벽 하나로 세상이 나뉜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덕에, 진은 위엄 있던 황태자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열 살배기의 어린아이의 낯을 지닐 수 있었다.
“실로 너무하오. 이안 경. 일언반구 없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오? 죽었다고 하여 모두가, 모두가 놀랐어.”
“송구합니다. 에리포니에게 걸린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제 죽음 하나로 가능할 것이라 여겼는데, 그녀에게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전하를 끌어들이고 나서야, 화살이 되돌아왔으니까요.”
“그것은 에리포니가 전쟁에서 직접 쏘았던 것인가?”
“그렇습니다. 루스웨나에서 귀화해온 마법사들 중, 자이라라는 아이를 기억하십니까? 전하와 비슷한 나이, 또래입니다.”
“안다. 검은 머리칼의 그 아이.”
“예. 자신의 남은 생명 반을 태워 이뤄낸 복수입니다. 협상을 수월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버고스와 같이 왕의 부재가 필요했습니다. 다만, 바리엘에서 직접 나설 시에는 정통성이 강한 루스웨나에서 반발할 수 있었고, 이는 효과적인 통치에 어려움을 가져오겠지요.”
이안은 잘 알아듣고 있냐는 듯, 눈썹 한쪽을 까딱거리며 연신 물기를 닦아주었다. 이제 되었다고, 진이 손을 물릴 때까지 말이다.
“자이라가 귀화하긴 하였으나, 그 출신은 루스웨나입니다. 마법을 건 시기도 그때지요. 루스웨나 마법사로 하여금 스스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쪽에서도 쉬이 항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함부로 바리엘에 반할 수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루스웨나에서 새로이 즉위한 왕이 반(反)바리엘 입장을 고수하면 어찌하려고?”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법사가 대거 이쪽으로 넘어왔고, 왕의 시신을 저희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정통성을 주장하여 왕위에 올랐다면, 에리포니 시신을 보관 중인 바리엘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조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지 않고 정통성을 부정하고 나선다면 수많은 국민을 설득해야 할 터인데, 시간도 그렇고 시기가 그리 알맞지 않아요.”
“엘더트. 아까 보니까 엘더트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예. 고민하는 것이 의외긴 했습니다만, 결국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버고스만 집중적으로 압박하여 협상을 이끌어가면 된다. 버고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곧 루스웨나에도 적용될 터.
진은 입을 잠시 달싹거리곤,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일러주었다.
“이안 경.”
“예. 전하.”
“클리포포드로 가게.”
클리포포드로 가서,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 돌아와.
진의 결심에 이안은 환히 웃었다. 아이가 결단을 내리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하지만 결국은 이리될 것, 결심을 한 것 자체가 아이의 성장을 뜻했다.
이안은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허락해주심에 실로 기쁩니다, 전하.”
“그 전에, 물어볼 것이 있다.”
“…러더포드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이지요?”
“어린 시절 접점과 이드갈을 제조한 것에 대해서는 인지했어. 하지만 주종의 관계는 전혀 예상에도 없었던 것인데.”
제국은 공식적으로 러더포드를 적이라 선언할 예정이었다. 내란에 가담한 이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바니아의 증언이 워낙 파격적인 터라 흐지부지 넘어간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바리엘 관료 모두의 뇌리에는 단단히 자리 잡았으리라.
내란에 가담한 자를 주인으로 따르는 장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에게 더더욱.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계약 마법으로 얽혀 있는 듯한데, 지금의 저는 러더포드가 아니라 바리엘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큼은 신께 맹세할 수 있지요.”
진이 아니라, 바리엘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 진은 의외로 그 말에 더더욱 신뢰가 가는 기분이었다. 자신 역시 궁극적으로는 바리엘을 위하여 사는 자였으니까 말이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여기던 이안에게, 그래도 함께하는 뜻이 있구나 싶어서 그런 것일까? 진은 눈물 자국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바니아 사절 대표의 증언이 더 힘을 얻기 전에, 이안 경. 그대가 원하는 대로 떠나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히엘로령 또한 위험해져. 필리아와 그대를 따르는 자들이 온전히 살 수 있는 공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예. 전하. 마음 써 주심에 감사합니다. 잠시 클리포포드로 내려가 상황을 수습하고, 모든 걸 바로잡겠습니다. 그리하면 이곳에 돌아올 때, 웃으면서 돌아올 수 있겠지요.”
“…말했던 대로 마법부 별채를 지어놓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돌아와. 이안 경. 바리엘은 그대가 필요해.”
“저 또한 바리엘이 필요합니다.”
진과 이안은 두 손을 꼭 붙잡으며 시선을 나눴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외부에서 아무리 강한 흔들림이 있어도, 두 사람의 믿음에는 하나의 흠도 내지 못하리라. 이안은 진을 역사 그 자체로 보았고, 진은 이안을 가족으로 보았다. 하나는 거대한 물결이요, 하나는 삶을 가득 채우는 공기다.
진이 희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돌아오면-”
“예. 전하.”
“우리 다시 다 함께 궁 밖으로 놀러 가자. 베릭도, 시아도, 로만드로도. 모두 함께.”
다시 한번 형님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진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아이의 손등을 토닥였고, 이내 바깥에서 알리는 보고에 몸을 일으켰다.
똑똑.
“전하. 루스웨나 사절단이 출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 *
황궁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정확히는, 클리포포드와 버고스 사절단이 전에 없이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국의, 그것도 왕국 중에서는 대국으로 꼽히는 루스웨나 왕이 협상 쉬는 시간 중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에서부터 이어온 업보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사절단에 두려운 기운이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면, 바리엘은 바리엘대로 바니아의 발언 탓에 수군덕거렸는데, 그 누구도 쉬이 답을 내놓지 못하여 잡음만이 가득 떠돌았다.
끼이익.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협상 회의를 재개하기 위해 진이 들어서자, 대회의장이 일순 조용해졌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닌, 다른 쪽 문을 통하여 은밀히 들어오는 이안. 사람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둘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했다.
“협상을 진행하기 전,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진은 자리에 앉으라 손짓한 다음, 천천히 비보를 전했다. 드넓은 회의장, 텅 비어버린 루스웨나 측 자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에리포니 왕이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한 터라, 사절단들이 귀국하기 위해 급히 출궁했다. 협상은 차질 없이 진행될 터. 현 자리에서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거부권이 없음을, 루스웨나 사절단 전부가 동의했다. 버고스에게 적용될 사안은 루스웨나 측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니, 이점을 유념하여 각자의 입장을 주장하길 바란다. 또한, 이 자리를 빌려 분명히 이르건대, 에리포니 왕의 죽음에는 바리엘의 책임이 일절 없으며, 왕의 서거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진의 선언에 타국 사절단들이 눈을 굴려댔다. 없던 화살이 갑자기 생기고, 순식간에 그녀의 심장을 꿰었다고 하지 않았나? 주변에는 마법사들도 많았고. 그런데도 바리엘이 개입한 게 아니라니. 믿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걸 인지라도 한 듯, 수상이 말을 덧붙였다.
“혹 에리포니 왕의 죽음에 의문이 있다면 스스럼없이 거수하시오. 시신을 보여주겠소. 능력이 있다면, 에리포니 왕의 죽음이 바리엘 마법사와는 무관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니.”
클리포포드에는 마법사가 없고, 버고스 또한 당장 확인할 재간이 없었다. 기댈 만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 현장을 지키고 있던 바니아의 증언뿐.
버고스 사절단이 의아하게 묻자, 바니아는 복화술 하듯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루스웨나 왕이 이안 경을 독살하려 한 것 같습니다. 버고스를 끌어들이려 한 것 같은데,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무언가 잘못되었어요. 죽은 줄 알았던 이안 경은 죽지 않았고…….”
“독살을 하려 했다니?”
“이안 경이 차를 마시자마자 쓰러졌거든요.”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그들은 남은 정황들로만 사태를 짐작했다. 사실 바리엘이 에리포니를 죽였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패전한 나라의 왕이다. 다몬처럼 혀가 잘리고, 족쇄를 찬 채로 바닥에 굴러도 항의할 수 없는 처지.
수상은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는 것을 확인하고서 봉을 내리쳤다.
타아앙! 탕탕!
“협상을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클리포포드의 왕이시여.”
클리포포드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옆은 여전히 메이가 지키고 있었다. 저주가 발현된 노아를 대신하여, 그녀는 왕의 오른팔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상의 발언.
“균열로 인해 입은 피해를 인지했고, 그 곤란함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마법부의 이안 히엘로 장관을 중심으로 마법을 지원하겠습니다. 더불어, 재건에 필요한 각종 재화와 물품들 또한 돌아가는 길에 함께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니. 클리포포드는 피해 구상권을 바리엘에 양도하는 것에 동의하시오?”
“동의합니다.”
클리포포드 왕의 대답을 따라, 사절단 사이에 활기가 돌았다. 이안이 온다! 클리포포드 사절단은 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어 보였다.
사실상 협상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고비를 넘은 셈이었다. 이안만 있으면, 저 천재 마법사만 있으면 균열 수습은 물론이고 이전의 포도밭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게다. 가능하다면, 저주를 만회할 방법도 알게 되겠지.
“이안 님이 클리포포드로 간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장관직을 달고 가는 거니까, 마법부에서는 안 나가시는 건가?”
“그런 것 아닐까?”
“잠깐, 이안 님이 마법부 장관직 내려놓는 게 급해, 아니면 균열로 들어가는 게 급해?”
“당연히 균열로 들어가는 게 급하지!”
“클리포포드로 가면 눈앞에 균열이 있는데, 이안 님이 가만있을까? 응?”
“아.”
황실의 결정에 제일 놀란 것은 클리포포드도, 버고스도 아니었다. 바로 마법부. 그들은 결정을 번복해달라며 한마디씩 던지려 하였으나, 단호한 이안의 눈빛에 가로막혀버렸다.
‘쉿.’
황태자 전하의 결정이시니, 그 누구도 토 달지 말거라. 이안은 그리 이르고 있었다.
이에 마법사들은 로만드로를 찾았지만, 로만드로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난감하게 이마를 짚고서 진을 바라볼 뿐. 분명히 진은 이안을 안 보낼 것 같았는데…. 역시 마법부의 입장과 황궁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나?
스윽.
수상은 마법부의 동요를 모른 척하며 한 손을 들어 지시했고, 이윽고 관료가 긴 양피지를 가져왔다.
“아래, 왕의 이름으로 서명하고 직인을 찍으십시오. 확인할 시간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한편, 그걸 보던 진은 버고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 것이 왔다. 바리엘과 클리포포드 간의 거래는 물밑에서 언급되던 사안이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할 버고스와의 거래에서는 갑과 을이 확연하게 나뉘게 된다.
“바리엘이 구상권을 청구하면, 버고스에게 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특히나 왕이 붙잡혀있고, 이를 타개할 러더포드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 버고스로는 버거운 싸움이 될 것이라.
“버고스는 전쟁을 일으킨 다몬 왕을 퇴위시키고 새로운 지도자를 즉위시켜라. 그 과정에 있어서 바리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왕위가 빈 기간 동안에는 바리엘에서 파견한 인사들로 하여금 국가 운영에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군대 해산을 공식적으로 명령하고, 바리엘과 국경이 인접한 주요 다섯 도시를 바리엘령으로 귀속하라.”
버고스 사절단은 입술 틈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상 나라 해체에 준하는 내용이라. 군대도 없고, 왕도 없으며, 영토마저 잃어 정통성이 완전히 파괴되는 수순.
이에 바니아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들었다.
“바니아 대표, 발언하시오.”
그리고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는 다몬. 그는 괜히 잘린 혀끝을 치아로 매만지며 고통을 유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을 것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