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5
제455화. 존재 가치
꾸준히, 하지만 급하지 않게 말고삐를 잡고 흔들던 마부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앞, 마차가 지나갈 언덕 한가운데 여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초라한 행색,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옷차림. 인가가 없다시피 한 곳인데, 숲 깊이 꽃을 따러 왔나?
거리가 꽤 있었기에, 여인이 몸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나, 마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깃발을 잡고 흔들었다.
촤악!
“왜 그러십니까?”
“저 앞에, 사람 한 명이 있다.”
“지나가겠지요.”
“계속 서 있으니까 그렇지. 마차가 쓸데없이 멈추기라도 했다간, 러더포드 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
“하긴, 맞습니다. 슬쩍 보니까 겨우 잠드신 것 같더라고요.”
“이봐, 거기! 앞에! 언덕 옆으로 내려오시오!”
혹 러더포드가 깰까, 마부는 호루라기도 불지 못하고 목청만 높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귀머거리인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부의 손을 다급하게 움직였고, 이내 여인이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헉!”
무언가 심상치 않다. 마부는 급하게 다른 쪽 깃발을 집어 들었고, 이번에는 뒤에서 따라오는 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방에 알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곧 말을 탄 기사들이 속도를 빠르게 하여 마부 앞에 나타났다.
타닥타닥!
“저 앞에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옆으로 물러설 기미가 안 보여요! 혹 함정일까요?”
“마차 속도를 늦추되, 멈추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촤아악!
히이잉! 타닥타닥!
기사들은 몸을 안장에 바짝 붙이고서 바람을 힘차게 갈랐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자신들의 주군인 러더포드는 따르는 자가 많았지만, 그만큼 적대하는 자도 많았기에. 저자처럼 길목을 가로막고 동정심을 유발하여 암살을 시도하거나, 함정을 파놓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기사들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마력을 개방했다.
지이잉!
“어? 잠깐!”
그러다 한 기사가 검을 높게 들며 동료들을 제지했다.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어딘가 기품이 묻어나고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기사의 신호에, 그들의 말 역시 걸음을 늦췄다.
여인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두 손을 좌우로 벌렸다. 자신에게 어떠한 악의가 없음을 증명하는 게다. 그리고 그것은, 마차 행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구시오?”
“러더포드 님을 뵙고자 한다.”
“그러니까, 누구인데-”
여인이 로브를 걷어내자, 기사 한 명이 중얼거렸다.
“멜라니아 하이만?”
“하이만이라는 성(姓)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요. 나는 그저 멜라니아이니, 그대의 주인에게 그리 일러주시오. 그리하면 분명 나를 보고자 할 터이니.”
멜라니아? 바리엘에서 금융업으로 자금줄을 꽉 쥐고 있던 그 하이만가의 영애? 기사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하이만은 황궁을 제외하고 바리엘에서 제일가는 자금원이었고, 상단인 러더포드에게도 꽤 중요한 손님이었으니까. 과거의 영광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하이만이라는 이름은 쉬이 잊힐 것이 아니었고, 이는 그 집안의 유일한 영애인 멜라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대가 멜라니아가 맞는다는 증거는?”
“내 존재의 절반이었던 성(姓)을 잃었는데, 어찌 그런 것까지 지니고 있을까? 그대 주군이 내 얼굴을 알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확실한 증거요.”
어쩌면 좋을까.
기사들이 말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미친 자들이야 널리고 널렸으니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차의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마차가 멈춘 후에는 필시 러더포드의 물음이 내려올 것이었다. 그리하면, 이 여인을 빌미 삼아 보고할 수밖에.
“몸수색을 할 것이오.”
“무엇이든. 나를 벗겨내어도 좋다.”
기사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저런 태도가 오히려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귀족 중의 귀족, 황족 다음 하이만이라 불렸던 대가문의 영애 아니던가? 모든 걸 잃었다 하는데 같잖은 자존심만 지니고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우스운 일.
기사는 간단히 여인의 몸수색을 한 다음, 검 끝으로 등을 겨눈 채 고갯짓했다.
“따라오시오. 우리의 주인께서는 한시라도 바삐 당도할 곳이 있어. 마차가 멈춘 것에 노여워하신다면 그대의 숨을 바치어 빌 수밖에.”
멜라니아는 기사들의 검 끝을 등줄기로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마부들은 이미 마부석 아래로 내려와 허리를 숙인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꼿꼿이 자세를 바로 한 사내. 긴 머리칼을 하나로 틀어 올린 채, 헐렁한 로브를 걸친 러더포드였다. 그는 궐련을 입에 물려다가 갑자기 등장한 낯선 여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길목에서 산짐승이라도 잡았나 했는데.”
“멜라니아 영애라 지칭하는 자입니다. 이자가 소란을 피우느라 마차가 멈췄습니다. 러더포드 님.”
“멜라니아?”
러더포드는 알고 있었다. 어지간했다면 부하들이 제 선에서 정리했을 거란 걸. 이렇게 자신의 앞으로 데려온 것은,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러더포드는 허리를 숙여 멜라니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느긋한 몸짓에, 멜라니아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가문이 건재했을 때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시선 처리였다.
멜라니아를 둔 채로 한 바퀴 돌던 러더포드가, 무언가를 알아챈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목 옆의 점이 그대로입니다,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희롱이라도 당한 것처럼 멜라니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사내임을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하이만 가문에 폭풍이 들이닥쳤다고 하던데요. 영애께서 어찌 여기에 계십니까? 아버지인 하이만 공작 옆을 지켜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반역죄로 일곱 가문이 동시에 참수당했던 사건은 바리엘 국경을 넘어 가이가 곳곳으로 전해졌다. 바리엘 중앙의 일곱 가문이라 하면, 대륙에서 제일가는 귀족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문화, 정치, 경제 등등, 다방면에서 그들이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여, 묻는 것이다. 반역죄라 하면 하이만가의 식구들은 모조리 머리가 뜯겨나가 대지의 일원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 아닌가? 어찌하여 멜라니아는 죽지 않았는지, 러더포드는 흥미로운 듯 웃었다.
“황실에 반한 죄인을 사사로이 풀어줄 만한 인물이 몇 없는데. 황실에서 그랬을 리는 없고. 지금 떠오르는 자는 그대의 소꿉친구뿐이로군요.”
서자 이안. 변방인 브라츠에서 구르다 황궁 마법부 장관까지 올라간 그 아이.
멜라니아는 치마를 꽉 붙잡으며 고개 숙였다.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침묵은 긍정이라, 방금 말하신 것과 같아요.”
멜라니아는 이안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향수가 있었고, 가문을 멸하게 한 원수이자, 한편으로는 목숨과 기회를 남겨준 구원자.
멜라니아가 살아있음은 이안이 황실에 반(反)했다는 증거와 같았다. 언젠가 이것이 그의 숨통을 죄일 카드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적절한 기회를 노릴 뿐.
“이쪽으로 드십시오, 영애. 갑작스레 멈춘 것이라 자리를 펴기에는 좀 그래요. 계획에 없던 것인지라.”
끼이익.
러더포드는 마차 문을 잡으며 멜라니아에게 고갯짓했다. 안으로 들라는 뜻이다. 일정이 지체되는 걸 원치 않아 하는 그의 성정이 확 느껴지는 듯했다.
멜라니아는 말라가는 입술에 침을 묻히고서,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콰앙!
문이 닫히면서, 러더포드는 부하들에게 무언의 손짓을 남겼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클라크가 검을 꺼내 들었고, 마부들은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출발을 준비했다.
“그래서,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요?”
마차 안에는 이국적인 향이 가득했다. 멜라니아는 바퀴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창문 가까이 몸을 붙였다.
“…러더포드 님을 찾았거든요. 처음에는 루스웨나 쪽에서 소식이 들려와서 그쪽으로 갔습니다.”
“그쪽에 연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하이만가는 반역죄로 사라졌어요. 루스웨나에 계신 사촌이 저를 도와줄 리 없지요. 여차했다간 대외적인 빌미를 주는 것이니.”
“흐음.”
러더포드가 긴 담뱃대에 불을 올렸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멜라니아는 마차 안 가득한 향 냄새가 바로 저것이었다는 걸 알아챘다.
“수소문 끝에 토올룬으로 가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굉장한데. 수소문에 재능이 있으십니다. 영애.”
“저 혼자 몸으로는 가기에 힘들어 어쩌나 싶었는데, 기회인지 뭔지 모르겠더군요. 전쟁 때문에 다시 돌아가시는 거죠?”
“혼자 몸 아니잖아.”
“…예?”
“떡하니 그림자 하나 붙이고 와서, 모른 척한다고?”
타악!
러더포드의 담뱃대가 멜라니아의 볼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유리창과 깨질 것 같이 부딪치는 담뱃대. 이어서 어디선가 우당탕탕, 소란이 들려왔다.
멜라니아는 놀라서 허리를 바로 세웠고,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어지러이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이안이가 영애를 놓아주면서 잘 가시라, 인사만 남겼을 것 같습니까? 영애의 뒤에 그림자를 심어두었습니다. 그대의 종적은 계속해서 보고로 올라갔을 터인데, 여기 들르기 전 마지막 마을이 어디지요?”
“고, 곧 도착합니다. 아주 작은 곳이었어요.”
멜라니아는 러더포드가 이안의 이름을 상당히 친근하게 부른 것을 영민하게 잡아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뱃대가 멜라니아의 귀 옆을 지나, 목 그리고 어깨를 매만지며 지나갔다.
“이리 나를 찾지 않아도 곧 보게 될 것인데. 이래서 천한 것들은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은혜는 곧잘 잊고, 손에 쥔 것이 본인 덕분인 줄 알아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러더포드는 말할 생각이 없는지, 빙긋 웃기만 했다.
“그래서, 아무튼. 저를 찾은 연유가 무엇입니까?”
“저를-”
“도와달라는 말 따위 하시려는 건 아니지요? 미래의 공수표는 안 받습니다. 내가 하이만 공작과 친분이 있긴 했지만, 몰락한 가문 출신 영애에게 손 내밀 연유는 하등 없어요.”
자신의 재건을 도와달라고, 하이만의 여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냐고, 그리 이르려던 멜라니아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잔인하지만,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러더포드가 연기를 한가득 입에 문 채, 침묵했다.
“…저를 드리겠습니다.”
“오, 영애.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능글맞게 거절하려는 러더포드와 좀 닥쳐달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멜라니아. 그제야 살아나는 여인의 눈빛이었다.
러더포드는 재밌다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 계속해보라며.
“나의 ‘존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러더포드 님이 버고스 측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남쪽에서 일어난 전쟁에도 지분이 꽤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당최 목적을 알 수가 없으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멜라니아는 숨을 한 번 고르며 일렀다.
“러더포드 님은 상단주시잖아요. 없는 것 빼고 다 손에 쥐길 원하시니, 현재 바리엘에서 황태자를 제외하고 제일가는 자는 이안 히엘로 장관입니다. 그자를 흔들 만한 게, 바로 저의 ‘존재’ 아닐까요?”
반역자를 살려서 보냈다는 그 사실 하나. 장관직에 자리하고 있는 이안을 흔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러더포드는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며, 멜라니아에게 연기를 후- 뱉어냈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 그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