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6
제456화. 전쟁 혹은 묵과
“바니아 대표, 발언하시오.”
수상은 안경을 벗으며 발언권을 허락했다.
위엄 있게 버고스 측 사절단을 내려다보고 있는 관료들. 그들은 마치 버고스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다는 낯이었다.
우선은 너무 과하다고 하겠지. 전쟁 피해 규모와 따졌을 때 말도 안 되는 처사라 반론할 것이고, 클리포포드에서 구상권을 넘기는 것에도 반대할 것이다. 모두 다른 생김새를 가졌지만 바리엘의 피가 흐르는지라, 서로 생각이 물들어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바니아는 그런 그들을 가만 올려다보다, 간단히 일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다? 건방지군.”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저들의 처지를 알고나 있는 것인지, 원. 허허.”
내용은 예상했다만, 태도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관료들은 일순간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한마디씩 던져댔다.
사절 대표라는 자가 취하는 태도치고는 상당히 불손하지 않나? 달콤한 말로 황실을 꾀어도 모자랄 판에, 저런 말투라니!
“그대들이 그럴 수 없다면, 어쩔 것인가?”
“지금 이를 터이니, 잘 새겨들으시오. 글자는 지우는 것보다 덧붙여 쓰는 것이 더 쉽소. 수정을 하려고 들면 들수록 뒤에 따라오는 것이 많아질 터. 그대들은 진실로 반성하여, 군말 없이 피해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시오!”
협상 내용에 반발하면 도리어 더한 제재를 가하겠다는 경고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니아는 별로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그걸 본 이안이 무언갈 깨닫곤, 서류 끄트머리를 톡톡 튕겨댔다.
“저기, 이안.”
속닥속닥, 로만드로의 부름에 이안이 고개를 틀었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이안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마법사들. 그 옆 베릭마저 동화되어 있는 게 보였다.
로만드로는 회의장 분위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더더욱 낮췄다.
“버고스 측의 반응이 생각보다 팔딱팔딱한데, 어찌하여 아까 루스웨나와 함께 엮지 않았어? 저쪽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지금이라도 문제 삼아서 압박해봄세. 응?”
루스웨나 왕이 이안을 죽이려 함은, 마법부 전체가 알고 있었고 증명 또한 가능했다. 버고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 정황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에리포니는 업보로 인해 앞뒤 따질 것 없이 죽어버렸고, 이안의 쓰러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책임지는 자가 없었다. 버고스에서 굽히지 않고 단단히 버틴다면, 이를 빌미로 밀어붙일 수 있을 게다.
“글쎄요. 딱히 좋은 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어째서?”
로만드로가 이안과 바니아를 힐끗, 번갈아 쳐다봤다. 마음 같아서는 본인도 마법사들과 같이 뚱한 눈빛을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중요한 공식 석상의 회의장이다. 로만드로는 보좌관이었고.
“저자들은 버고스에서 온 사절단이지만, 버고스를 위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인 입으로 밝히지 않았습니까? 러더포드를 주인으로 모신다고.”
“그, 이안.”
“그 사안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나누도록 하지요. 아무튼, 저자들이 버고스보다 우선시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또한, 버고스는 현재 수많은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상태. 러더포드가 패권의 중심을 선점한 것 같지만, 분열된 국가 여론을 수습하려면 강력한 사건이 필요합니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괜한 것을 묻지 말라는 투로,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쩔 수 없이 가만 듣던 로만드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쟁?”
“안쪽이 시끄러우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당연합니다. 게다가 버고스는 패전국이지요. 하나 군대가 궤멸하여 백기를 든 것이 아닙니다. 왕이 사로잡혔기에 반강제로 백기를 든 것이지요. 바리엘과 클리포포드에 피해 배상금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을 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쟁을 유발하여 국가 간의 결집을 도모하고, 사태를 회피하고자 하는 선택을 할 것입니다.”
“바, 바리엘이랑 저, 전쟁하면? 이길 수는 있고?”
“바리엘은 영원히 역사의 승리자입니다.”
이안이 조곤조곤 덧붙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말투. 마치 먼 미래를 직접 보고 온 사람처럼 믿음이 굳건하였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지 않는 자도 있겠지요.”
“러더포드.”
“그자에 대해 알려진 건 없지만, 제 추측으로는 버고스인이 아닐 것입니다. 하여, 버고스 안의 혼란을 이용하여 제 이익을 채우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에요.”
사실 버고스인이라고 하여 모두가 조국을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러더포드는 이드갈의 원천이다. 제국의 대귀족 혹은 왕족과 거래하는 대상단의 주인이기도 하였으며, 이쪽에서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가진 자였다. 다몬의 말에 따르면, 신과 세상을 조율하는 존재.
“상단은 마법사는 물론이고, 국가적인 차원의 무력 또한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이드갈을 쥐고 있으니, 바리엘의 마법사들 또한 상대할 만하다 여기고 있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정녕 천 년 전부터 영혼을 이어왔던 반도르라면, 속내를 짐작하기 쉽지 않을 터.
억겁에 가까운 시간. 그동안 그가 무엇을 준비했고, 어떤 감정을 품어왔으며, 서자 이안과 나누었던 대화는 무엇이고, 바리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건의 추가 얼마나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그렇군. 그런데…….”
로만드로는 이제 좀 이해했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문제가 있지 않나? 버고스 측이 전쟁을 원하고, 그것이 전쟁의 양상을 떠나서 버고스에 유리한 것이라면 바리엘에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사절 측에서 협상 거부 그리고 불손한 태도 따위로 일관한다면, 그 끝은 전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 황태자 또한 협상 초반, 버고스와 인접한 국경 근처로 이미 군대를 움직여 놓았다.
“저쪽에서 저리 나오면 우리는 어찌해? 방도가 없지 않나? 협상에서 부담을 덜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방자한 태도를 묵과할 수도 없으니. 제국의 위상에 먹칠하는 것과 같아, 황실만이 아니라 모든 관료들이 참지 않을 것이네.”
“…….”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다. 파멸을 원하는 자는 무서울 것이 없기에 상대하기도 어려운 법이니.
이안은 잠시 턱을 괸 채 진을 바라봤다. 수상 역시 버고스의 전략을 알아챈 것인지, 입 모양을 손으로 가리며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이러면 일관성이 있지. 시간을 끌기 위해 문제시되는 걸 전부 부정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잘 끌어지면 전쟁 발발 없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그 또한 좋다. 문제는 협상이 불발되었을 때, 사절단들의 안전인데. 바니아는 하는 모습을 보아 러더포드에 목숨이 저당 잡혀 있는 것 같고.’
다른 자들 역시 죽음을 불사하는 건가? 그만큼 러더포드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차 있다는 뜻?
하지만 이안은 초반, 티모시가 회의장으로 들어섰을 때 그와 시선을 나누던 자를 기억했다. 티모시와 인연이 깊어 보이던데, 그런 자가 왕조를 버리고 한낱 상단주인 러더포드에 목숨을 바칠 리는 없다. 분명 목숨을 보장할 만한 무언가가 저들에게 있는 것이라.
바니아는 서류를 쓱쓱 넘겨보더니, 준비한 내용을 읊었다.
“먼저, 바리엘과 접경한 버고스 도시 다섯 개의 헌납에 관한 것입니다. 클리포포드가 입은 피해 도시는 수도 프로드호나를 제외하면 모두 작은 마을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피해가 막심하다고는 하나, 규모를 비교할 수 없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에 있어서 버고스군은 단 한 명도, 수도 장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안쪽 땅을 밟지 못하였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타앙!
듣던 메이가 목소리를 높이며 탁상을 거칠게 밀어쳤다.
“어째서 클리포포드가 나서시오? 구상권을 넘긴 것 아니십니까?”
“아직 우리의 왕께서 계약서를 검토하는 중이십니다! 그리고 명명백백 버고스의 주장에 문제가 있으니, 이리 일어설 수밖에요!”
구상권을 넘긴다는 건, 바리엘과 버고스 간의 협상에 있어서 클리포포드의 결정 권한이 일절 없다는 걸 뜻했으나, 메이는 관련 보고서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버고스군은 국경선을 침범하고,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백각을 풀었습니다. 농토를 망치는 마물이지요. 곤충류답게 번식도 엄청나, 그대들이 지나온 길목 주변으로 땅이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폭발하는 습성이 있어 일반인들이 쉬이 퇴치하지도 못하지요. 그뿐입니까? 전쟁으로 인한 궁극적인 피해는 수도에서 일어난 균열입니다!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평화로운 하루하루을 맞이하며 농익은 포도를 수확하였을 것입니다. 균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에 버고스의 책임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여, 도시 다섯 개로는 한참 부족하지요!”
“맞습니다! 우리의 나라 전체가 기울었습니다!”
“쓸 수 있는 땅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어찌 이것을 숫자로 매기겠습니까? 또한, 왕실이 입은 저주는 어찌하고요? 어림도 없습니다!”
메이의 주장에 클리포포드 사절 몇몇이 강하게 동의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수상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을 까딱였고, 메이는 바니아를 잡아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반면, 바니아는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듯 무미건조했지만.
“바리엘은 클리포포드 쪽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니, 진정하시오. 버고스. 누군가 말했지만, 내 다시 짚겠소. 이는 황태자 전하의 뜻도 함께하는 것이니, 흘려듣지 마시길.”
수상은 버고스 측의 의도를 파악하여 낮게 경고했다.
“협상이라곤 하나, 이는 바리엘과 클리포포드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패전국에게는 권한이 없어요. 그것은 바리엘을 대표하는 자들이 산정하여 내놓은 값이라, 그 이하로는 협상이라는 것 자체가 진행될 수 없습니다.”
타앙!
수상이 봉을 내려쳤다. 자신의 이름과 지위, 회의장의 신성함을 걸고 결코 변동 없을 것이라 맹세하는 손짓이었다.
“버고스 사절단. 협상이 진행되지 않으면 그대들의 존재 의미도 없지요. 바리엘에서는 내전에 가담했던 러더포드와 관련 있는 자들을 온전히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
“바리엘의 병사들은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무기를 들 것이고,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전쟁을 원하나? 하지만 그 혼란을 이용할 만큼, 바리엘은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전언이다. 의도를 파악했으니, 원하는 대로 두지 않겠다는.
바니아는 힘없이 서류를 내려놓더니, 한숨 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하면 통보를 하시지, 어찌하여 여기까지 부르셨나이까?”
“그대들이 오고 싶어 한 것 아닌가? 왕을 보고자.”
“그 전에 초청이 있었습니다.”
“초청이라고 하기에는 그 대상자가 명확하지 않았지. 지금 버고스에, 황태자 전하의 이름으로 간 전언을 받을 자가 있나?”
관료들도 조금씩 버고스 측의 전략을 눈치챘는지, 서류를 주고받으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어쨌거나 여기서 사절단이 피를 흘리면, 그것이 곧 바리엘-버고스 간 전쟁의 서막이 될 것이니.
가만 지켜보고 있던 진이 몸을 일으켜 앞쪽을 내려다봤다. 로만드로는 진의 입에서 단호한 결정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안, 전쟁이나 묵과 외, 다른 방도는 없을까?”
이안이라면 뭔가를 알 것 같은데! 로만드로가 외부 시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살짝 흔들리는 이안의 몸. 그는 가만 생각하더니, 눈썹을 까딱거렸다.
“하나 있긴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