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7
제457화. 그들이 숨긴 것
“있어? 응? 있어?”
그러면 당장 모두와 지혜를 나누는 게 맞지 않겠나?
로만드로가 흥분하여 속삭이자, 이안이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조금씩, 회의장 모두의 시선이 모여드는 걸 느낀 것이다.
“있지만 지금은 소용없습니다.”
“어째서?”
“러더포드가 버고스 내에 세력을 결집한 것처럼, 바리엘도 그리하는 방법이거든요. 전쟁으로 인한 버고스 내부의 혼란을 바깥으로 터트리려는 러더포드와 달리, 바리엘은 내부의 혼란을 그대로 짊어질 친(親)바리엘 인사를 왕으로 몰아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부에서 맞물리는 혼란으로 전쟁까지 번질 여력이 없지요. 대신, 그리하면 내전이 굉장히 심각해질 것이고, 이번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으로 인한 반사이익을 모두 취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 친바리엘 파에 속하는 버고스 측 유력 인사가 몇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버고스 왕궁은 다몬의 수족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쟁이 일어났지 않은가.
그나마 황궁에서 밀어줄 만한 자는 티모시 정도인데, 그는 이미 숙청당하여 모든 걸 잃고 귀화한 자였다. 버고스로 돌아갈 수도 없고, 간다 한들 힘들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기도 하고.’
티모시는 더 이상 버고스와 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 이대로 바리엘에 정착해야지만, 나움의 훗날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러면 어, 어찌해?”
“조금 난감합니다만, 지금으로써는-”
강경 대응이 맞는 처사였다. 패전국, 그것도 전쟁을 일으킨 침략국 주제에, 황궁에서 저리 고개 쳐들고 방종한 작태를 보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황실이 그리고 이안이 말이다.
전쟁으로 상대가 결집한다고 한들, 우선은 바리엘의 위엄을 지켜내는 게 우선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저들을 베어내 황실의 명예를 지키고, 버고스 측을 압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에는 또 전쟁이로구나. 로만드로의 낯에 망연자실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재건 전문가 출신이지 않나. 자연재해로 인한 현장이 주를 이루었지만, 드물지 않게 전쟁 피해 지역을 비비안나와 함께 누비기도 하였다.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은 그래도 남의 나라 일이라 마음이 덜 쓰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바리엘이 주도하여 나서는 형국이었다. 그것도 의문의 세력들이 결집한 서쪽 나라와 말이다.
“이안. 진 황태자 전하께서 그대를 클리포포드로 차출한다 공언하셨고, 그에 따라 마법부 인력 또한 어느 정도 함께할 것이네.”
“…많은 자를 동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아무튼, 그런데 전쟁이라니. 물론 바리엘의 전력을 못 믿는 건 아니네만. 최대한 확실하게, 출혈 없이 승리를 가져오려면 마법부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겠어?”
“저기, 트웰러 장관의 표정이 보이십니까?”
“맥심 트웰러?”
이안이 고갯짓을 가볍게 하자, 로만드로가 눈동자만 겨우 돌려 시선을 맞췄다.
진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제국방위부 장관, 맥심 트웰러. 그는 곧 다가올 전쟁의 서막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인지 만족스럽게 코를 찡긋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피를 마시며 살아가고, 울부짖음으로 강해지는 자들. 타국 간의 전쟁도 아니고 제국에서 주도하여 일어나는 전쟁이라면,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잘 차려진 밥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방위부 장관께서는 좋다 하시겠지. 전쟁 통해서 진급하는 자들이니까. 장관님 위상도 드높아질 것이고.”
“그것도 그러한데, 제가 보고 있는 것은 눈빛입니다.”
“으응? 눈빛?”
“한을 제대로 품어낸 눈빛이요.”
눈빛이 뭐 어쨌다고? 로만드로는 이안의 말에 트웰러의 눈매에 집중했다.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평생 기다린 자입니다. 마법사가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전장에서 기량을 발휘할 것입니다. 러더포드의 존재가 걸리긴 하지만, 상대는 패전국. 혹여 이번 전쟁에도 마법사가 개입하려 한다면, 트웰러 장관은 에둘러 끊어내려 할 터.”
이안과 로만드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맥심 트웰러가 이안 쪽을 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희미하게 걸리는 미소. 그는 바짝 마른 단단한 손을 가슴팍에 올리며 경외를 보였다. 마법부는 클리포포드로, 제국방위부는 버고스로 가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말이다.
로만드로 또한 어색하게 웃으며 답례했다.
“그렇네. 그렇겠어. 안 그래도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에서 마법부의 공이 크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국방위부에서 주도하여 전쟁을 치르려 하겠네. 아이고, 원.”
“지금은 황실 의견을 존중하여 따르는 게 최선일 듯합니다. 지켜보시지요.”
진은 수상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속삭이더니,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알았다는 듯이, 또 한 번은 허락한다는 듯이, 그리고 이내 모든 게 끝났다는 듯이 말이다.
바니아가 턱을 빳빳이 든 채로 그 모습을 올려다봤다. 저 어린 황태자의 명에 따라 자신과 함께 온 사절단, 나아가 버고스의 운명이 정해질 것이었다. 어찌 되든 큰 틀은 러더포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당장 닥쳐올 시련이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다.
타앙! 탕!
수상이 근엄하게 봉을 내려치며 소란스러운 회의장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버고스의 바니아 사절 대표.”
“예. 수상.”
“버고스의 사절단으로서, 그대들은 바리엘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소. 맞는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제안에는 타협이 없다는 걸, 바리엘에서는 분명히 일렀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이 현명할 터.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속내에 다른 것을 품고서 황실의 회의장을 모독하지 마시게. 마지막으로 이르겠다.”
타앙!
수앙이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일갈했다. 봉을 내려치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 있었으니, 관료들은 움찔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정면을 쳐다봤다.
“버고스 사절단은 바리엘의 제안에 응할 수 없는가?”
바니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올 것이 왔다는 듯 한숨을 삼켰다.
“예. 응할 수 없습니다.”
“저런 고얀! 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 대가를 짊어지시오! 전하, 당장 저것들을 참수하여 버고스로 경고장을 보내셔야 합니다!”
“예! 맞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무슨 수작인지 눈에 훤히 보입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맞이하는 죽음이 무엇인지, 당장 보여주어야 합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버고스 영토를 모두 점령하여 멸하는 것이!”
“다들 정숙하시오!”
콰앙! 쾅! 쾅!
수상은 봉이 마치 적의 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거칠게 내려쳤다.
난리가 난 것은 클리포포드도 마찬가지였다. 구상권을 바리엘로 넘겨주기로 하였는데, 버고스가 저리 나온다면 클리포포드의 입장은 어찌 되는 것인가?
다몬은 나른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고, 생각을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낯을 지어보였다.
“바리엘 제국 수상의 이름으로 명한다. 현재 황궁에서 자리하고 있는 버고스 사절단은 들으라. 사절단은 버고스와 바리엘의 우호적인 협상을 위해 협조하려는 자세가 없고, 이는 바리엘에 대한 모독과 같으니, 현재 자리하고 있는 자들을 사절단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처억!
수상의 명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무장한 채 들이닥쳤다. 사절단으로 들어왔던 자들이 그 자격을 박탈당했으니, 앞으로의 취급은 안 봐도 빤했다. 러더포드, 황실 내란과 관련 있는 자를 따른다 공언한 책임을 물어, 그에 준하는 대접을 받게 되리라.
루스웨나에 이어서 버고스도 이리 가는 것인가? 클리포포드 국왕은 긴장한 채로 상황을 관망했고, 버고스 사절단은 순식간에 병사들에게 둘러쌓였다.
“특히 바니아. 그대는 황실 내란에 일조한 러더포드를 주인으로 모신다 공언하였고, 제국의 장관을 러더포드와 연관 지어 모욕했다. 게다가 루스웨나의 에리포니 왕이 사달을 일으킬 때 자리했던 혐의가 아직 남아있으니, 두 발로 이 황궁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 그 뒤의 버고스인들도 들으시오!”
날카로운 창과 검이 그들의 목을 뚫을 것처럼 다가왔으나, 단 한 명도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이안은 그 부자연스러운 공기 흐름을 읽어냈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뒷배가 있다 한들 작은 두려움이라도 보일 법한데 그런 게 없는 것이라.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처럼.
“잠깐만.”
침묵을 지키던 이안이 손을 들며 천천히 일어났다. 진을 비롯하여 황실 관료들이 놀라서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이안 장관.”
“예. 문제는 아니고, 의혹이 있습니다.”
천천히 바니아 앞으로 다가서는 이안.
내면을 속속들이 훑는 듯한 눈빛에, 바니아는 저절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마주했다간 속내가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 작은 고갯짓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자들의 속내에 무언가 더 있습니다. 전쟁을 유도하여 스스로 죽음을 유발하고 있어요. 전하. 괜찮으시다면, 마법사들이 이자들을 잠시 심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은 정문을 들어설 때 이미 하지 않았소?”
“예. 수상. 하지만 고작 마법사 서넛으로 수십에 가까운 자들을 심문하였습니다. 그것도 클리포포드, 버고스, 루스웨나. 세 나라의 중요 인사들을 연달아서요. 혹시 몰라 드리는 간청이니 부디 살펴주십시오.”
“흐음.”
수상은 진을 힐끔 쳐다보며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다. 이미 이안의 처사에 관한 것은 결론이 났지만, 혹여 진이 또 흔들릴까 봐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혹시 모른다 하면, 어떤?”
하지만 진은 무덤덤하게 묻기만 하였다. 아까 전, 눈물을 글썽이며 이안에게 투닥거리던 아이가 아니었다.
“송구하오나 그것은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예시로…….”
이안은 바니아의 턱에 손끝을 우아하게 가져다 댔다. 그러곤 살짝 치켜올리는 손길. 이안은 바니아의 입술 안쪽을 집요하게 살폈다.
“다몬 왕과 같이 혀 밑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지-”
“놓으십시오! 무례합니다!”
“그대는 이제 버고스의 사절 대표가 아닌데, 어찌 무례를 논하는가?”
바니아가 이안의 손등을 거칠게 뿌리쳤지만, 이안은 웃음으로 응했다. 가죽 장갑 덕분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으니.
“아니면 서로 품은 저의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버고스가 주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맨 처음, 전쟁이 발발하기 전. 클리포포드에 들어온 버고스 사절단들은 자신들이 죽을 운명인 것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혹독한 상황 앞에서도 여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이자들을 보고 있자니, 그때의 기억이 납니다.”
이안이 조곤조곤 이르자, 몇몇 버고스 사절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안은 손을 튕기며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버고스 사절단이 묵었던 응접실을 조사하라.”
“예. 이안 님.”
“그리고 이자들은 잠시 마법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전하. 아니 됩니다. 이안 경이 러더포드와 연관 있다는 증언을 들으셨지 않습니까? 위험 요소는 배제하는 것이 맞습니다. 황실로 들이시지요.”
“그래도 이런 거 조사는 마법사가 제격인데…….”
“전하. 아니 됩니다. 믿음을 떠나, 대외적으로 아니 될 일이에요.”
이안의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관료들이 진의 옆으로 몰려들어 속닥였다.
깊게 고민하던 진. 이내 손을 휘휘 흔들며 사사로운 소란을 물렸다.
“바니아만 황실에서 조사하고, 나머지는 마법부에서 조사하도록 하라. 대신 황실 인력을 참관하게 할 것이다.”
“예. 전하.”
그러면 일단 협상은 중단하는 게 맞겠지? 루스웨나도 버고스도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모든 게 엎어졌으니.
이 자리에서 제 밥그릇을 찾아간 건 오로지 클리포포드밖에 없었다. 왕은 서둘러 남은 글자를 훑어본 다음, 맨 아래쪽에 서명했다.
콰앙!
클리포포드의 직인 역시 마찬가지로, 붉고 선명하게 찍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