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8
제458화. 달을 향해 뛰다
“거기, 조심해. 부딪칠라.”
“아, 죄송합니다.”
루스웨나 사절단이 썼던 응접실.
황궁 시종들은 앞치마와 두건을 단단히 둘러맨 다음, 분주하게 응접실을 정리했다. 산산이 조각난 찻잔 세트, 피 따위로 얼룩진 카펫, 이리저리 널브러진 장식품까지. 응접실은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엉망이었다.
“급하게 떠났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라고?”
“내 말이. 대체 뭘 챙겨들 간 거람? 옷가지고 뭐고 죄다 그대로네.”
“에리포니 왕의 물건은 최대한 온전하게 전시실로 옮겨. 그쪽에서 가져간 건 황금빛 화살밖에 없다고 하니까. 나머지는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전달하신다고 하셨어.”
“알겠습니다. 이거, 담을 상자가 필요한데요.”
“이쪽에서 가져가!”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주군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황궁 곳곳을 청소하는 모습은 황실의 인원이 보아서는 안 될 일이라. 최대한 서둘러서 일을 마치는 게 중요했다.
시종장은 가느다란 막대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시종들의 움직임을 지휘했다. 마법사만이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처럼, 작은 움직임이 모이고 모여 순식간에 공간을 바꿔 놓는 것. 그것 또한 하나의 마법 아니겠는가?
“시종장님.”
똑똑.
그때, 한 시종이 열린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회의장을 담당하는 사내였다. 그는 재빨리 시종장에게 다가가 안쪽의 흐름을 일렀고, 시종장은 뜻밖의 전언이었는지 매부리코를 벅벅 긁어댔다.
“버고스 측 응접실도요?”
“예. 같이 정리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버고스 측 사절단도 사절단의 지위를 박탈당할 것 같으니, 응접실을 함께 비워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니, 대체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기에 주요 두 개 왕국의 목이 날아간단 말인가?
시종장은 궁금한 게 한가득이었지만, 애써 침묵을 유지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황궁에서의 호기심은 명은 단축하는 법. 절제해야 했다. 백발의 노인이 되도록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시종장은 몇몇 아랫것들을 데리고, 그리 멀지 않은 복도 반대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끼이이익!
쿠웅!
엉망이던 루스웨나 응접실에 비해서 모든 것이 깔끔한 버고스 측 응접실.
“우선 버고스 측 물건을 모두 전시실로 내어라.”
“예. 시종장님.”
“지금 당장 창문을 열고, 먼지 털고, 쓸고 닦도록! 전하께서 가까이 계시니, 뭉기적거리다간 부정한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라!”
타닥타닥!
시종들이 후다닥 달려가 창문을 여는 동안, 시종장은 응접실 안쪽 작은 별채 문을 열어젖혔다.
촘촘하게 쌓여있는 물건들. 대부분은 버고스 사절단의 개인 물품처럼 보였지만, 개중 흰색 천으로 덮인 것들이 눈에 띄었다.
“흐음?”
사악.
손끝으로 가볍게 잡아당기자, 힘없이 스르륵 늘어지는 흰색 천. 시종장은 천을 주섬주섬 당겨 허리춤에 끼워넣고는, 버고스의 물건들을 살펴봤다. 귀중품을 담은 고급 상자들과 장식품. 그리고 그림 몇 점.
“시종장님. 이것들도 옮길까요?”
“그래. 모두 전시실로.”
정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보아, 이것들은 버고스가 바리엘에 바치려했던 진상품이 분명해 보였다.
시종장의 고갯짓에 시종들이 조심스럽게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고, 이내 그들과 마주한 거대한 그림.
“어후, 이건 너무 큰데요. 사람을 더 불러와야겠습니다. 적어도 일곱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 가서 힘 잘 쓰는 자들로 불러와라.”
“예. 시종장님.”
시종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버고스의 그림을 쭉 훑어보았다. 마치 초원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시점. 저 멀리 둥근 언덕이 시원하게 뻗어있고, 적갈색의 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하늘은 어스름한 새벽. 마치 땅 위로 떨어질 것처럼 거대한 보름달이 능선 가까이 떴다.
‘잘 그리긴 했다만. 누가 그린 거지? 버고스 궁중 화가들 화풍이라 하기에는 좀 투박한데.’
시종장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 하나가 실수로 넘어진 것이다.
“이봐! 조심하지 못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꽃잎 하나까지 황태자 전하의 것이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단 말이지! 조심성이라는 게 없어! 시종장이 입을 비죽일 때, 바깥에서 그림을 옮기기 위해 장정들이 들이닥쳤다.
“생각보다 크네. 옮기겠습니다.”
“어어, 그래. 조심히-”
조심히 옮기라고, 시종장이 그리 당부하려는 순간.
그녀는 그림이 뭔가 이질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달이 저토록 능선에 가까이 있었나? 그리고 무엇보다, 능선 너머로 보이는 작은 점들은 무엇이지? 시종장이 코를 바짝 가까이 대고 살펴보려 하자, 장정들이 물었다.
“옮기지 말까요?”
“응? 아니아니, 아닐세. 옮겨야지.”
“그러면 조금 물러나 주십시오. 천도 다시 씌우겠습니다. 옮기다 흠이라도 나면 큰일이니.”
“그래. 크흠.”
다시 흰 천으로 가려지는 그림. 시종장은 허리춤에 팔을 올린 다음,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분명 찰나의 순간 동안 그림이 바뀐 것 같은데 말이지.
‘기분 탓인가?’
시종장은 현장을 지휘하면서도 연신 찜찜한 마음을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 지나가는 낯익은 자. 주황빛 눈동자가 심상치 않은 자.
“아코렐라 대장님!”
“나요?”
“예예.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세요?”
마법부의 대장 중 한 명인 아코렐라!
시종장이 소리치며 다가오자, 아코렐라는 심드렁하게 턱을 벅벅 긁으며 응했다. 지금 회의장 안쪽은 살벌했고, 마법부는 침울했으며, 실담물약 책임자인 자신은 죽을 맛이었다.
“바빠서 금방 들어가봐야 하는데.”
“아, 다른 게 아니라요. 버고스에서 들여온 진상품 중에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요.”
“특이 사항이 있다면 정문에서 걸러졌을 터인데요.”
“그렇겠지요. 그런데, 아, 이게 제가 노망이라도 난 건지 뭔지. 호호호.”
“노망이 나셨으면 제가 아니라 의사를 찾아가셔야지요?”
“그게, 그림이 좀 이상해서요. 우, 움직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럼 이만! 아코렐라가 그리 인사하고 등을 돌리려고 했으나, 이어지는 시종장의 발언에 멈칫거렸다. 그림이 움직여? 이거, 어디 많이 익숙한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잠깐 뒤돌았다가 다시 봤는데, 그림 속 풍경이 조금 바뀐 것 같더라고요. 근데 너무 순식간이라 저도 확신은 못 하겠는데…….”
아코렐라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움직이는 그림? 이거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내란에서 황제가 몸을 숨기기 위해 썼던 통로 아닌가?
내란? 러더포드? 버고스? 통로? 아코렐라의 머릿속에 의식의 흐름대로 단어들이 둥둥 떠다녔다.
“봅시다.”
“예?”
“보자고요. 마력석 섞어서 그린 그림이면 정문에서 못 걸러냈을 수도 있어요. 내가 맛 좀 봐야겠는데.”
“맛을 보다니요……?”
“됐고, 앞장섭시다. 어디로 옮겼어요? 전시실?”
“예예. 이쪽으로.”
시종장은 몸을 틀며 아코렐라를 안내했고, 이내 바삐 움직이는 시종들을 지나쳐 전시실로 달려갔다.
* * *
타닥타닥!
한편, 멜라니아는 마차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렸는데도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푸른색 능선밖에 없다.
자신이 왔던 길과 다른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러더포드의 마차를 탄 이후로는 인기척이라는 걸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왜 그러지?”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요.”
러더포드는 자신의 긴 머리칼을 하나로 휘휘 말아 올려 묶었다. 이제 슬슬 다 와간다는 걸 직감한 사람처럼 말이다.
이에 멜라니아는 아무것도 없는 바깥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곧 있으면 해가 질 터.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길? 전혀. 옳은 길로 가고 있는데.”
“이 인근에는 제가 거쳐왔던 마을 하나밖에 없어요. 근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한데요.”
“누가 그러지? 우리가 마을로 향하고 있다고.”
“…누가 그러다니요? 러더포드 님. 바리엘, 아니 황궁으로 가고 계심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쪽 마을을 지나쳐-”
“쉬이.”
러더포드는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려 보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씩 늦춰지는 마차 속도. 멜라니아는 저 먼 능선 한가운데에, 사각형의 틀이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저게 뭐지?’
그저 뻥 뚫린 채 덩그러니 놓여있는 사각 틀. 뜬금 없지만,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게 분명해 보였다. 그것은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나무 그리고 길게 이어진 길을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늦지 않게 잘 왔어. 멜라니아 영애. 혹, 아까 그대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으면 곤란할 뻔했지.”
“대체 저것이…….”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나?”
멜라니아가 대답 없이 러더포드를 돌아봤다. 순간 흘렀던 낮은 음성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으니. 러더포드의 눈동자에 반짝, 달이 비쳤다.
“…있지요.”
어린 시절의 전부를 보냈던 하이만의 대저택, 환영 같은 가족의 품, 과거의 영광. 이 모두가 멜라니아가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러더포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아주 오래도록 그렸던 곳이 있지. 저것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
끼이익.
마차가 완전히 멈추고, 러더포드는 문을 손수 열고 내려 대지 위 거대한 액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홀린 듯이 움직이는 발걸음.
그러자 그의 부하들이 마차와 말을 분리했고, 각자 고삐 하나씩을 그러쥐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멜라니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앞과 뒤를 번갈아 보며 고민했다.
“러더포드 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함께 걸으십시오.”
그때, 한 사내가 멜라니아의 어깨를 툭 치며 따라오라 신호했다. 러더포드의 마차에 함께 탔던 자, 클라크였다.
멜라니아는 생각했다. 남아서 이곳을 지키는 것보다, 동행하여서 한 몫 쥐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런 그녀에게 클라크는 단검 하나를 건네준 다음, 경고했다.
“가능하다면 무리를 이탈하지 마십시오.”
“이, 이탈이라니.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갈 것입니다. 황궁으로.”
“황궁이요?”
놀란 멜라니아가 그리 되묻는 순간-
퍼어엉! 퍼엉!
지이이잉. 지잉!
촤아악!
러더포드의 마법사들이 대지에 손바닥을 붙이더니, 마력을 개방했다.
범인(凡人)이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기이한 흐름. 바람이 거세게 불며 짧은 잔디밭에 파도를 그려냈고, 구름이 흩어지며 거대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은 마치 마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했다.
“아!”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달이 기울자, 멜라니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곧 네모난 틀 안쪽으로 달이 가득 차자, 러더포드는 로브를 휘날리며 앞장섰다.
“가자. 황실의 가장 깊은 곳으로.”
“와아아!”
“각자의 맡은 바를 잊지 말라. 티그모르!”
“예. 러더포드 님.”
“너는 바니아와 다몬 왕을.”
“명심하겠습니다.”
“레온! 너는 황실의 보물을.”
“예. 문제없습니다.”
처억!
러더포드의 부하들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경례했다. 멜라니아는 곧 그것이 황궁에서 통용되는 예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안을 맞이하지.”
러더포드는 그리 이르며 달 속으로 걸어갔다. 곧 환한 빛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 부하들은 망설임 없이 뒤따라 뛰어들었고, 마지막에는 멜라니아와 클라크만이 남았다.
“잠깐!”
“…….”
“돌아오는 건 어떻게 하나요?”
“여명이 트는 그 순간까지. 문은 계속 열려있을 것입니다. 황궁에서 길을 잃지만 않으면 될 터. 보물을 손에 쥐십시오. 영애.”
그것이 곧 버고스로 흘러들어 가 바리엘과의 전쟁에 힘이 되어줄 것이고, 영애 개인의 생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니. 클라크는 짤막한 충고만을 남겨둔 채 걸음을 서둘렀고, 멜라니아는 오도 가도 못한 채 난감히 정면만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부욱!
촤아악!
클라크가 준 단검으로 치렁거리는 치맛단을 잘라버리고서 있는 힘껏, 달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