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59
제459화. 재회
한바탕 소란이 떠나간 황궁.
열기에 달아올랐던 모래가 식어버리는 것과 같이, 정신없이 바빴던 분위기가 한껏 차분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선포하심이 좋겠습니다.”
바리엘과 버고스의 전면전. 누구도 섣불리 이루지 못했던 그것. 한 관료가 적막을 깨고 언급하자, 여기저기서 못마땅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허튼소리라 반대하지 못했다.
“예. 전하. 루스웨나로 돌아간 사절단의 행보도 주시하시어, 버고스 측에는 강경 대응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루스웨나에서도 권력 교체가 일어날 것인데, 버고스와의 전쟁을 통하여 허튼 생각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강한 경고. 그것이 제일 효율적이겠지요.”
“루스웨나의 다음 왕위는 누가 이을 것 같습니까?”
“안타깝다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리포니 왕에게 후사가 없는지라, 적절한 후계 순위를 따져가며 정하지 않겠습니까?”
“선왕의 동생이 아직 살아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너무 노쇠하지요. 패전으로 어수선한 나라를 수습하기에는 여러모로 모자랍니다.”
“엘더트라는 그자는? 에리포니의 오른손이자, 왕의 부고를 직접 조국으로 알리는 자입니다.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루스웨나는 정통성을 제일 우선으로 합니다. 엘더트 경이 에리포니의 사촌이긴 하지만, 글쎄요. 서열로 따지면 꽤 뒷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젊었을 적 궁을 나가 대학 교수직을 하였다고 압니다.”
“아무튼 루스웨나도 그렇고, 버고스도 그렇고. 새로운 왕의 시대가 도래할 것인데 바리엘에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요.”
“버고스에는 인재가 없습니다.”
“정확히, 바리엘에서 원하는 인재가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예예. 뭐, 말을 그렇게 정확히 해야 하나 싶긴 하지만, 허허. 루스웨나는 그래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의 책임을 최대한 버고스 쪽으로 전가하려 하고 있으니. 바리엘에서 버고스를 잡아 흔든다면, 그쪽에서도 협조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안 경?”
관료들의 시선이 동시에 이안에게 쏟아졌다. 어떠한 언질도 없는 게 이상하다 여긴 것이었다. 마법부 장관이라는 직책을 떠나서, 이안은 현재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던가. 에리포니 왕의 죽음과 버고스 사절단의 심문을 담당하는 자였으니.
이안은 그저 어깨만 으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예상만으로 일을 처리할 순 없습니다. 루스웨나 측에 사람을 보내어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안 경.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속 터놓고 얘기해봅시다.”
스윽.
한 관료가 이안 쪽으로 몸을 틀어 가깝게 다가왔다.
“정말 이대로 클리포포드로 내려갈 것이오?”
“이미 끝난 사안입니다. 전하께서 그리 명하셨고, 이는 나라 간 맺은 약속입니다. 어찌하여 되물으시는지요.”
“하면 마법부 장관직은 어찌할지 궁금해서 그렇소. 버고스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데 이안 경이 없으면, 솔직히 좀 그렇지 않소? 아아, 맥심 트웰러 장관. 제국방위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네만-”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걱정은 된다, 이 말입니까?”
맥심 트웰러는 단단하고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의심과 걱정의 간격은 종이 한 장 두께보다 더 좁지 않던가?
관료들이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대답을 회피하자, 이안이 일렀다.
“맥심 트웰러 경. 노여워 마십시오. 관료들께서는 제국방위부를 의심하시는 게 아니라, 마법부를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마법부에는 저보다 더 능력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진 전하의 뜻에 가타부타 의견을 덧대지 마십시오.”
“허허, 그런 뜻이 아니래도…….”
“진 전하는? 아직도 클리포포드 왕과 독대 중이신가?”
관료들은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시종들을 재촉했다. 협상에 있어 버고스와 루스웨나가 동시게 엮여들었으니, 이에 관한 주군들끼리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라.
이안은 차를 홀짝이며 창문 바깥을 힐끔거렸다. 곧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었다. 하늘빛이 점점 짙어지고, 노을이 내려앉는.
쿠웅!
그때,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진동.
이안이 멈칫거리며 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무도 느끼지 못한 것인가? 관료들은 여전히 회의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는데, 오로지 맥심 트웰러 장관만이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쿠구웅!
스윽.
“왜, 왜 그러시오?”
착각인가 싶었는데, 역시나 아니다.
둘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료들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이안은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대답하지 못했고, 트웰러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무언인지 생각하느라 침묵했다. 이윽고 옆구리의 검으로 옮겨지는 트웰러의 손.
관료들은 기겁했다.
“장관! 무엇 하시오!?”
“쉬잇. 다들 조용히.”
“조용히는 무슨, 여긴 황궁입니다! 황궁!”
“예예, 무, 무기를 섣불리 쥐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아요. 복도 건너편에 전하가 계시거늘. 허허.”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무슨 문제가 있다고 검을 뽑으려 드십니까? 정문에서 전언이 온 것도 아니고, 사방에 황궁 병사가 경계를 단단히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더 의아한 것 아닙니까. 황궁에서 폭발음이라.”
“포, 폭발음?”
“혹시 마법부에서 뭐, 실험 잘못한 거 아닙니까?”
“…아니요. 기운이 다릅니다.”
이안이 온 감각을 곤두세우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의아하고, 뭔가 이상했다. 바깥에서 침입이 있었더라면 바로 정문 경비병과 마법사들에 의해 저지되어 보고가 올라왔을 터.
그렇다고 해서 내부의 문제라 하기에는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버고스인들의 반항? 모두 범인(凡人)이었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마력봉인석 족쇄까지 채워두었다.
그렇다면, 그 어디에도 이만한 폭발을 일으킬 세력이 없지 않나?
‘남은 외부 세력은 클리포포드인데, 그자들은 절대 그럴 명분도, 이유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바리엘이 물자를 지원해줄 것이며, 이안과 마법사들이 균열 수습을 위해 나설 것인데. 어찌 소란을 만들겠나?
“트웰러 장관.”
이안은 손수 문손잡이를 돌리며 트웰러를 불렀다. 다른 마법사들 역시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당황한 낯으로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로지 로만드로만이 갑작스러운 분위기 흐름을 읽지 못하고 눈만 깜빡깜빡일 뿐.
“전하를 잘 호위해주세요.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리하겠소.”
“이안아아아! 방금 느꼈지? 뭔가 퍼엉!”
“베릭. 쉬이.”
“나 어디서 났는지 좀 알 것 같아. 왼쪽! 왼쪽에서 났다!”
이안은 베릭에게 따라오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밀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허둥지둥 따르는 마법사들과 로만드로.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트웰러 장관은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반대편, 진 황태자가 자리하고 있는 응접실로 달려갔다.
타닥타닥!
“아니, 다들 이거 나 속이려고 장난치는 거 아니지? 폭발음은 무슨 폭발? 하나도 못 들었는데.”
“그걸 못 들었어요? 졸라 크게 콰앙! 했는디. 혹시 서서 존 거 아니에요? 눈 뜨고 잤나 보네!”
“베릭 이놈, 말하는 것하고는! 내가 얼마나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못 들었으면 귀에 문제가 있는 거다. 캬캬.”
베릭은 로만드로를 놀려대며 한발 앞서 달려나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안과 함께 다 같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운 듯하니, 문제를 확인하러 간다는 자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타닥타닥!
“이쪽인가?”
“아, 모르겠습니다.”
“황궁 창고 쪽인 것 같긴 한데…….”
딱 두 번, 희미하게 느껴진 충격. 이안은 황궁 안 경비들의 움직임이 일정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저들 역시 폭발음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그때, 잘 달리던 베릭이 우뚝 멈춰셨다.
“아.”
킁킁. 그러더니 허공에 턱을 치켜든 다음 미간을 찌푸렸다. 로만드로가 발을 동동 굴리며 그런 베릭을 돌아봤다.
“왜 그래?”
“피 냄새 난다.”
“피? 어디?”
“이쪽. 이안아! 이쪽!”
“저거 믿어도 돼?”
“방향 감각은 엉망인데,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으니 믿을 수밖에! 베릭! 같이 가!”
마법사들이 내달리는 쪽은 황궁의 재화와 보물을 보관하는 전시실. 폭발이 일어날 일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공간이었다.
이안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깨달은 순간이었다. 모퉁이를 돌아섰던 마법사들이 앞서 걷지 못하고 우뚝, 제자리에 멈춰섰다.
“…이, 이안 님.”
“이거 뭐, 뭐, 뭐가 어떻게…….”
흰색 대리석 바닥에 사정없이 찍혀있는 핏자국.
경비병들은 뒤에서 급습당했는지 두 눈을 그대로 뜬 채 죽어있었다. 스멀스멀, 굳게 닫힌 문틈으로 피가 잔뜩 흘러나왔다.
지이잉! 지잉!
전시실이다. 바리엘의 온갖 귀중품이 그득하다 보니, 마법부의 결계는 물론이고 허가받은 자들만 오갈 수 있는 공간.
이안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발견하자마자 마력을 개방했다. 덩달아 반사적으로 힘을 끌어올리는 마법사들.
“로만드로 님은 서둘러 황궁에 긴급 상황임을 알리고, 전하의 안전을 도모하십시오.”
“아, 그, 아, 알겠네! 내 당장 사람들을 불러오지!”
“조심하십시오. 베릭! 네가 로만드로 님을 호위해라.”
“내가? 왜? 앞에 적이 있는데.”
베릭이 인상을 찌푸리자, 로만드로가 그의 귀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짜식아, 나 죽는 거 보고 싶어? 폭발음이 있었는데 어떠한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황궁 안에 괴한들이 존재하는 것이라. 저 시체를 보아. 눈 감고 죽지도 못했으니, 그 솜씨가 어마어마하지?”
“아쒸, 진짜. 그러면 이안이 두고 가?”
“내가 죽는 게 빠를까? 이안이 죽는 게 빠를까? 됐고, 빨리 호위해라! 베릭! 중대한 상황이다!”
경비들이 문제를 알릴 새 없이 처리당했다. 무엇이 목적인지는 모르겠으나, 황태자의 신변이 위험한 것만은 분명했다.
로만드로에겐 서둘러 황궁의 경비대장에게, 친위대에게, 그리고 제국방위부를 비롯한 모든 바리엘인에게 이 사실을 알릴 의무가 있었다.
“어서!”
로만드로가 베릭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왔던 길을 돌아갔고, 이안은 천천히 전시실로 다가갔다. 무언가 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적어도 다섯.
아니, 그 이상.
스윽.
마법사들이 마력을 개방한 채 문 옆, 좌우로 흩어졌다. 대체 이 괴한들이 어떻게 황실 안으로 뚝 떨어졌을까. 그것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이곳에…….
‘공간이동을 돕는 물건이 있었나?’
황실에? 아니면 최근에 들어온 무언가 중에? 루스웨나나 버고스 쪽에서 진상한 물건이 무엇 있더라?
이안이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전시실 문이 천천히 열리며,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
비틀비틀, 바닥을 짚으며 겨우 기어나오는 한 여인. 피에 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이안과 마법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코렐라!’
마법사들이 놀라서 달려들려고 하자, 이안이 저지했다. 아코렐라의 뒤로 또 다른 누군가가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는 아코렐라의 발목을 거칠게 쥐어잡으며 잡아당겼다. 마치 사냥한 짐승을 질질 끄는 것처럼.
“이봐. 어딜가? 네가 일으킨 문제는 해결해줘야지.”
“아, 으, 시발…….”
“오른쪽 다리도 부러지고 싶어? 응?”
“꺼져, 꺼-”
지이이잉! 지잉!
퍼어엉!
아코렐라가 저항하듯 마력을 한데 모아 터트렸고, 그 덕에 전시실 안쪽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 찰나, 이안은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볼 수 있었는데, 순간 놀랍게도 본능적인 인지가 깨어났다.
처음 보지만, 어쩐지 기억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은 자. 흑표범을 연상하게 하는 자. 온몸의 피 칠갑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자.
‘러더포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