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6
제46화. 브라츠를 떠나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메리 부인은 거의 실성한 것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첼은 그런 어미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 받았는지, 침대 뒤쪽에 서서 꼼짝않고 굳어있었다. 이안은 그녀를 힐끔 보며 전사에게 전했다.
“카칸티르 족장님과 네르사른 님을 불러오라.”
“네. 이안 님.”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육신이 갈갈이 찢어 네가 세상에 나왔다는 것조차 잊혀졌으면 좋겠다.”
“어머니. 그만 좀 다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저택에는 조사단이 남아있으니까요. 혹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어머니를 넘겨야 합니다.”
그의 말에 메리가 멈칫거렸다. 머리에 피가 몰려서 그런가? 마치 이안이 자신을 살려주겠노라 말하는 것 같았다.
“이안. 우리 살려주는 거야? 아버지는?”
“첼 형님. 꼴이 말이 아니군요. 아버지는 이미 중앙군에 잡혀서 손 쓸 수가 없습니다. 챙길 짐이 있습니까?”
데르가가 중앙군에 잡혔다는 걸 듣자, 메리 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첼 역시 마찬가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충격 먹고 울먹이는 게 분명했다.
“내가, 내가 아버지를 구하겠어.”
“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 이안이 되묻기 무섭게 천려인들은 희미한 웃음만 흘려댔다. 대체 누가 누구를 구한다는 건지, 원.
“첼 형님. 정신 좀 차리십시오. 상황 파악이 그리 안 됩니까? 데오도 죽고 집사도 죽고 저택 사용인들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영지민들은 전투의 피해로 데르가 백작을 원망하고 있어요. 형님과 어머니가 브라츠에서 살아가려면 이곳, 비밀 공간밖에 없습니다.”
신랄하게 쏟아지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첼은 연신 움찔거리며 제 어머니와 어두운 방 안을 돌아봤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절대, 절대 그렇게는 못 살지.
이안은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이안 님. 카칸 님과 네르사른 님이 오셨습니다.”
“그래. 곧 나가겠네. 어머니 그리고 첼 형님.”
이안은 잠시 고민하더니, 목적지를 정했다는 듯 손을 튕겼다.
“아무래도 가실 곳은 친정밖에 없겠군요. 전사들과 함께 나갈 채비를 하세요. 새벽이 깊어지면 당장 출발할 것입니다.”
“이안 님. 저 여자 친정이 어디입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저 여자라는 호칭에 한 번 충격, 이안의 별것 아니라는 태도에 또 한 번 충격 받은 메리 부인이었다. 말문이 턱 막힌 부인 대신 첼이 대답했다.
“…포, 폰트롤.”
“폰트롤? 아아. 브라츠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곳입니다. 메렐로프를 둘러가야 하니 보름 정도 걸리겠군요. 거리도 거리지만 험한 산맥이 있어서.”
“메렐로프를 왜 돌아가? 거기에 들러서 옷이나 먹을 것 좀 얻고…….”
“메렐로프는 성문을 완전히 닫았는데요? 집사를 죽인 것도 그쪽입니다. 엮이기 싫다고 상황 정리되기까지 자체 봉쇄령을 내렸습니다.”
이안의 말에 메리 부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사실 중앙군과의 대치 상황 시 도와주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여차했다간 그들도 반역자로 엮여 들어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집사를 죽였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메렐로프가, 집사를 죽였다고……?”
“왜 그러십니까? 어머니.”
“그년이, 그게 그러면 안 되는데.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손톱을 아득아득 씹어대며 중얼거리는 꼴이 기괴하다 못해 오싹했다. 전사들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이안을 돌아봤으나, 그도 연유를 알 턱이 없다.
“…메렐로프로 들어갈 거야.”
메리는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브라츠를 떠나기 전, 본채 방에 들러야겠다.”
“정신이 어떻게 됐습니까? 어머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 하라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부인은 물러서지 않고 강력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가면 메렐로프도 우리를 쉬이 쫓아내지는 못할 거다. 가서 자금도 좀 빌리고, 이런저런 도움을…….”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뒤죽박죽 엉망인 것은 자명했다. 이안이 팔짱을 끼며 어디 개소리 좀 더 해보라는 듯 지켜봤다.
메리 부인은 문득 말을 멈추며 되물었다.
“남편은, 데르가는 아직 죽지 않았지?”
“그렇습니다. 처형식이 어머니와 첼 덕분에 미뤄졌으니까요.”
그 말에 메리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1황자 마리브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은 데르가와 메리만 알고 있었다. 황궁의 응답이 올 때까지 살아만 남으면 기회가 영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래, 그래…….”
“알았으면 서둘러 준비하십시오.”
“이안, 메렐로프로 가자! 메렐로프로……!”
“어머니. 다물지 않으면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이안은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등을 돌려버렸다. 본채에는 조사단들이 진을 치고 있지 않나. 거길 메리 부인이 어떻게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건지 원. 첼이 누굴 닮아 상황 파악이 저리 안 되나 싶었는데, 제 어미를 닮은 것이었다.
“여길 지키고 있게. 난 잠시 카칸을 뵙고 오겠네.”
“예예. 천천히 일 보십쇼.”
“어이, 거기 애새끼. 짐 정말 없어?”
“어, 어, 없는데…. 그리고 나는 첼 브라츠…다!”
뒤쪽으로 한심한 대화가 오가는 걸 들으며, 이안은 계단을 올라갔다. 연락을 듣고 달려온 카칸티르와 네르사른이 잔디로 위장한 입구를 들어주며 이안의 손을 잡아주었다.
“안쪽에 있던가?”
“아주 잘 있습니다.”
조사단의 시선을 피해 애먼 쿠실레만 이쪽으로 옮겨대고 있었다. 마구간이 좁다는 구실이었는데, 다행히 조사단은 말을 차지할 수 있어서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당장 오늘 새벽이라도 보내면 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누가 말을 제일 잘 몰던가?”
카칸티르의 말에 전사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보내달라 요청했다.
“저입니다. 카칸.”
“맡겨만 주십시오.”
보란 듯이 중앙군을 홀려 영지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것도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서.
그뿐만 아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중앙군을 멀리 유인해야 하니, 말 모는 솜씨뿐만 아니라 상황 파악능력까지 좋아야 했다.
“슐과 나루. 둘이서 맡아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칸!”
“와아. 드디어 검 좀 드는 겁니까?”
“경거망동 말고, 최대한 멀리까지 가서 메리와 첼을 처리해. 하늘과 땅에 묻어 그 누구도 찾지 못하게 해야 한다.”
중앙군에게 둘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에리카의 공이 될 것이며, 황궁의 긍정적인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메리와 첼을 은밀하게 처리한다면?
“중앙군 놈들, 어디 몇 년이고 변방을 떠돌아 보라지.”
그들은 시체를 찾기 전에는 복귀할 수 없으리라. 메리와 첼은 반역자였기에 ‘놓쳤다’라는 이유만으로 포기할 수 없는 목표 대상이었다. 설령 작전이 중단되더라도 그들의 신뢰는 바닥을 치게 될 터이니, 일거양득도 이만한 게 없다.
“곧 해가 집니다.”
카칸티르는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와 첼을 담당할 전사들은 물과 식량 따위를 챙기며 바리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것 참 불편한데, 왜 이런 걸 입는 거야?”
“그러니까. 찢어지겠어.”
우락부락한 덩치로 인해 꽉 끼는 게 눈에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천려족의 전사임은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혹여 천려족이 연관되어 있음이 알려진다면, 반역죄로 엮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메리와 첼을 데리고 와라.”
“네. 알겠습니다.”
전사들은 지하로 내려가 두 사람을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변해버린 저택의 풍경에 충격 먹은 표정이었다. 바싹 타서 무너질 지경인 별채와 사방에는 쿠실레, 천려족들. 이곳이 정녕 브라츠가 맞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일세. 메리 부인 그리고 첼.”
카칸티르의 인사에 두 사람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메리 부인의 눈매가 표독스럽게 가늘어지며 제 아들을 끌어안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군.”
“천려는……!”
욕설을 쏘아붙이려던 메리가 한숨을 삼키며 겨우 참아냈다. 아직 데르가가 살아있지 않나. 1황자 마리브의 답신이 올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했다.
이자들이 순수한 의도로 그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 수밖에 없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잘 이해해 주리라 믿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호의라 알아두면 좋겠어.”
메리 부인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함정이 있는 것을 알고서도 발을 내미는 기분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후드로 얼굴을 가리게.”
“이쪽으로 오시오.”
“서둘러!”
이안은 말 쪽으로 움직이는 메리와 첼의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전사들은 폰트롤로 안내해 주겠지만, 그대들을 위해 목숨 바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협조하고 납작 엎드리라는 뜻이었다. 본인의 안전이 위험하다 생각되면, 언제고 두 사람을 버릴 수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메리가 이를 아득거리며 노려보자, 이안은 웃기만 했다.
“싫으시면 지금이라도 관두십시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비밀창고에서 땅거미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것인지, 아니면 조사단에 붙들려 데르가와 함께 처형될 것인지.
첼은 서둘러 움직이자는 듯 제 어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이안, 네놈은…….”
“저는 그간 부인의 따뜻한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딱히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을 것 같군요.”
“…….”
메리는 후회했다. 그냥, 존재를 알았을 때 죽여버릴걸. 아니면 팔다리를 자르고 눈과 귀를 불로 지져 천려로 보내버릴걸. 숱하게 지나온 기회 속에 후회가 이다지도 많았구나.
“자. 이제 떠나세요.”
“저, 저기 이안. 아버지는…….”
“첼!”
메리는 더 이상 이안과 말 섞지 말라는 듯 제 아들을 노려봤다. 메리와 첼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말에 올라탔다.
“조사단이 저녁 식사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이네. 정문을 열어두어라.”
“네. 알겠습니다!”
히이잉!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저택 중앙을 거세게 가로질렀다. 말 울음소리에 몇몇 병사가 반사적으로 돌아봤으나, 그뿐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오가는 게 말 아니던가.
타닥타닥!
말 두 마리는 재빨리 마을로 진입해 한적한 길을 내달렸다. 어둠 속에서 영지민 몇몇이 인영을 힐끔거렸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뭔 일이 있어서 저리 바쁘게 간담.”
“그러게요. 날도 어두워지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어둠에 묻혀서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택에 남아있던 천려족들은 말이 문제없이 내달리는 걸 보고 서둘러 뒷정리에 몰두했다.
“잔디를 자연스럽게 세워라.”
“바위라도 올려놓을까요?”
“아니. 그러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 없이 복구해.”
“네. 알겠습니다.”
한편, 이안은 불 켜진 별채 쪽을 쳐다봤다. 메리 부인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제 방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하려는 것이었다.
‘대체 뭐기에… 메렐로프가 저를 도와줄 거라 생각했을까.’
하지만 현재 그곳은 에리카 단장이 쓰고 있었으니. 조만간 메리 부인을 따라 조사단이 떠나면, 그곳을 뒤져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