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63
제463화. 러더포드가 지배하는 세계
째깍.
억겁처럼 느껴지는 일 초였다.
러더포드는 문득, 이안의 금안이 사자(獅子)와 닮아있음을 알아챘다. 호박빛을 그대로 품고 있던 연약한 눈동자가, 대체 어느 순간부터 맹수와 같아진 것일까.
째깍.
처음 일 초보다 더욱 느리게 흘러가는 일 초였다. 절대 놓지 않겠노라, 옷감이 찢어질 듯 쥐고 있는 이안의 손 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마법사들 여럿이 만들어낸 마력과는 존재감부터 다른 것이다.
그래. 저게 바로 내가 이안을 선택한 이유지.
퍼어엉!
“러더-!”
마법사들의 외침에 반응하듯 터지는 폭발.
피할 수 없다. 그들이 여기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마력의 흐름이었기에. 손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아니었다면, 인지하지도 못한 채 당했으리라.
기민한 러더포드의 부하들이 반사적으로 보호막을 펼쳤고, 몇몇은 그럴 새도 없이 손만 집어넣었다. 이안과 러더포드를 떨어트리기 위해. 그리고 주인을 지키기 위해 제 팔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촤아아악!
이안의 공격은 서넛의 팔을 베어낸 다음, 러더포드의 볼과 머리칼 따위를 스쳐 지나갔다. 공중에 뜬 채로 맞물리는 서로의 시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모조리 죽이려는 이안과 주인을 지켜내는 마법사. 그리고 낯선 금안에 정신을 빼앗긴 러더포드. 셋 모두가 피로 엮였다.
“흐아아악!”
“으윽!”
느리게 흐르던 시간은 마법사들의 비명으로 인해 깨졌다. 여기저기 주인 모를 신체 조각이 뒹굴었고, 마법사들은 단면이 드러난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다.
그러는 동안, 러더포드는 제 볼에 묻은 피를 느릿하게 닦아낼 뿐이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신음하는 마법사들은 알 바 아니라며, 숨만 골라댔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으나, 그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이안의 살벌한 눈빛.
어디 한번 말해보라.
네놈이 이르는 신의 계획에 이것이 적혀 있는가?
서자 이안에게 화분을 주었을 때부터, 의문의 마법 계약을 맺었을 때부터, 네놈은 이걸 예상했는지 듣고 싶다는 표정이다.
“…이안아.”
러더포드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연신 훔쳐내며 웃었다. 자조적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너, 누구니?”
무언가 이상하다 여기긴 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안은 무릎 꿇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그런 법 아니겠나? 어제 일마저 망각하여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하잘것없는 존재.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패착이었다.
“우리 이안이는 어디 가고, 이상한 놈이 들어앉았네?”
그러자 이안 역시 웃었다. 피와 땀으로 엉망이었으나,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러더포드와의 웃음과는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는 걸, 돌려 말하는구나. 아무래도 네놈이 따르는 신은 반쪽짜리인가?”
러더포드가 담뱃대 끝을 입에 물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계약 마법이 유효한 것으로 보아 저것이 ‘이안’임은 변동 없다.
그러니 확보하여 가져가는 계획 또한 변동 없다. 이번에는 아예 무릎 꿇리다 못해 납작 엎드리게 해야겠다, 러더포드가 그리 결심하여 입을 떼려는 순간.
스윽.
이안이 제 목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돌발 행동에 당황한 것은 러더포드만이 아니다. 어찌 돌아가는 겐가,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들 또한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세상에, 이안 님!”
“무슨 짓입니까? 그만두세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 이안의 단검은 목울대 옆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황궁 마법사들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가렸지만, 러더포드는 그저 지켜만 봤다. 말리지도, 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다는 듯 아주 애매한 낯으로 말이다.
“러더포드. 다시 한번 나를 무릎 꿇려보아라.”
“…….”
“서자 이안의 몸에 내가 들어서 있음에도 계약 마법이 유효했다는 건, 육신을 매개로 체결된 계약이라는 것. 과연 숨이 끊어져 썩기 시작한 살덩이가 너에게 도움 될지, 난 모르겠어.”
이안이 말할 때마다 움직이는 목울대 옆으로, 검날이 피에 젖어 들었다. 위협용의 협박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게다.
‘서자 이안?’
‘몸에 들어서?’
‘육신을 매개로 한 계약이라니?’
황궁 마법사들은 이해 못 할 사안을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바빴고, 러더포드는 천천히 이안에게 걸음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단검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확실히 저것의 말대로, 썩어가는 살덩이는 자신에게 의미가 없지 않나? 장장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지금에 이르렀는데, 저런 하찮은 도발에 넘어가 모든 걸 그르칠 순 없다.
“…시인했군. 그래서, 너는 누구지?”
“시인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네놈이 이해했다는 사실 자체.”
러더포드의 발걸음이 멈췄다.
“인격의 변화를 자아의 변화로 연관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북쪽, 사령술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죽은 자로 기적을 행사하는 자들이니. 나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런데 러더포드 너는, 어떻게 단숨에 서자 이안의 몸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서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을까? 서자 이안의 어미 필리아는 물론이고, 어릴 적 교류했던 멜라니아조차 쉽게 알아채지 못했거늘.
“경험으로 인한 이해인가?”
이안이 싱긋 웃었다.
“-반로드.”
“닥쳐라!”
러더포드가 처음으로 생생한 감정을 드러내며 일갈했다. 그 탓에, 전시실 안에 있던 부하들이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혹 러더포드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던 것이다. 아코렐라 역시 바닥을 기며 바깥 사태를 눈으로 담기 바빴다.
“대제국 바리엘의 마법사‘였던’ 반도르. 균열 조사를 위해 내려간 이후 역사에서는 사라졌지만, 기록에서는 간간이 모습을 보이더군. 스스로를 마법사 반도르라 주장하고, 결국에는 정신이상자의 발언으로 치부되어 고립되는 모습 말이다.”
“닥치라는 말 못 들었나?”
타앗!
“이안 님께 손댈 생각 하지 마!”
“물러서라, 이놈!”
러더포드가 흥분하여 성큼 다가가자, 황궁 마법사들이 기함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안이 단숨에 찬물과 같은 발언을 끼얹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러더포드는 이미 수차례 죽음을 겪은 자. 그로 인해 마법의 힘을 잃었으니까.”
“예?”
“저자가 지배하는 세상은 오로지 이안의 세상밖에 없다는 말이다.”
서자 이안의 세상. 계약 마법을 맺을 수 있던 것도 마력운용자인 이안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터.
자신을 삼자처럼 지칭하는 장관이 낯설었지만, 마법사들은 대충 알아듣고 러더포드를 살폈다.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풀어질 기미가 없다.
“다몬의 혀가 조각날 때 들은 사안이다.”
“…다몬 왕 말씀이신가요?”
“그래. 러더포드가 ‘마법사였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허, 하면 대체 왜들 저자를 따르는 것입니까?”
“마법과 연금술은 별개다. 그 아래 다른 이해관계가 있을 터. 신의 뜻을 자꾸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쪽으로도 밝혀지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겠지. 응? 반도르.”
목적. 그것만큼 본질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것은 없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면 이용할 수 있으며, 이용한다는 건 곧 지배를 뜻했으니.
러더포드는 한 걸음 물러서며 웃었다.
“잘난 척 떠들어대더니, 결국 아는 건 하나 없군.”
반도르라는 게 밝혀져서 문제 될 건 없다. 이미 부하 중 일부는 알고 있었고, 오히려 그것이 결집에 힘을 보탰으니까.
다만 지금 마음에 안 드는 건, 천출(賤出) 이안의 껍데기로 건방지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 내면에 든 게 무엇이든지, 처절하게 영혼을 불태우겠노라.
“그래. 하지만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이잉. 지잉.
“…네놈의 대답으로.”
이안이 눈을 감았다 뜨자, 녹안이 다시금 금안으로 변했다.
균열의 틈으로 몸을 내던진 자.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 다시 살아온 자. 균열 아래 심연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
“러더포드 님! 뒤로 물러서십시오!”
사지가 멀쩡한 마법사들은 러더포드를 에워싸며 보호막을 형성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전시실 안쪽 부하들 또한 가세하여 덤벼들었다.
아코렐라도 재빠르게 황궁 마법사들에게 손짓했다.
“여기! 출입구가 여기 안쪽에 있다!”
“아코렐라 대장, 다리가!”
“닥치고 얼렁 이쪽으로 넘어와! 개새끼들. 다 뒤졌다, 진짜. 아오오!”
퍼엉! 펑!
이안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에서 빛 덩어리가 터졌다. 사르륵. 반짝이는 가루가 내려앉았고, 이안은 그 사이를 유유히 누렸다.
러더포드가 계약 마법을 발동해 이안을 저지하려고 하자, 그의 단검이 스스로 왼팔을 베어버렸다.
지금은 팔이지만, 다시 한번 수작질하려 한다면 이번에는 목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를 쥐어틀어 진실을 알 수 있다면.
촤아악!
전시실의 보물과 다몬, 버고스 사절단, 그리고 이안을 데리고 황궁을 빠져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안 님! 왼편은 제가 맡겠습니다! 앞만 보십시오!”
“예. 저도 함께합니다!”
“무슨 일인지 아직 이해 못 했지만, 이것들 밀어버리고 천천히 얘기합시다! 이안 님이 이안 님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저희와 함께한 분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마마연은 영원합니다아아!”
…아니면 러더포드 일당을 제압, 생포하여 진실에 다가설 것인가.
지이잉! 지잉!
이안이 이를 꽉 깨물며 달려들자, 그 옆으로 마법사들이 함께했다. 그들이 지나온 자리엔 금빛 잔상이 남았다. 이드갈의 호박빛보다 더욱 환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안의 흔적.
마법사들이 모조리 뛰어오르자, 러더포드는 반사적으로 계약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쿠웅!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 다시금 세상이 비틀리는 기분이다. 모든 중력이 이안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네가 일러줄 일.”
퍼어엉!
예기치 못하게 당했을 때와 다르다. 이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온정신을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퍼어엉! 펑!
촤아아악!
‘조금만…….’
소년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으나, 성년이 되기 전 지워진 존재. 역사는 그 흔적을 하찮게 여기겠지. 바리엘은 이안을 기억조차 못 할 터. 본인조차 온전한 그 이름을 내뱉지 못하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
이안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단 하나의 진리.
자신의 모든 것은 바리엘을 위함이라.
주인으로 섬기고, 기꺼이 무릎을 꿇으며, 한 올의 부끄럼 없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바리엘뿐.
파지지직!
러더포드의 마법사들과 이안의 공격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강렬한 열기와 살벌한 냉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미지의 힘이다.
“러더포드 님!”
“젠장! 그림은 아직인가?”
그림을 담당하던 마법사들이 앞뒤를 번갈아 돌아보며 발만 굴러댔다. 망할, 망할, 망할!
“천 날, 만 날 들여다봐라. X밥들. 그런다고 그림이 돌아오나.”
“닥쳐!”
퍼억!
마법사는 아코렐라의 복부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클라크! 상황 정리 좀, 앞에!”
잔잔하고 깊은 물과 같아서, 언제나 동요 없던 클라크였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안과 러더포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마법사가 등을 밀었으나, 여전히 동요가 없다.
“클라크!”
“이안 경이 어째서…….”
메렐로프에서 리엔 부인과 자신을 도와주었던 이안이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정상 바리엘을 떠나와야 했지만, 리엔 부인이 메렐로프의 주인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이안의 안배 덕분 아닌가?
“클라크!”
콰아앙!
멜라니아 역시 마찬가지. 언제나 여유 있던 이안이 저렇게 처절히 뛰어드는 게 낯설어 눈을 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흩날리는 마력에 잠겨 들었다.
“…커헉!”
이질적인 고요와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러더포드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하던 이안이, 결국 피를 한 움큼 토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