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65
제465화. 나와 함께, 심연에서
이안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장이 통째로 갈리는 고통. 뜨거운 무엇인가를 끝없이 쏟아냈으나, 멈출 기미가 없다. 흰 대리석 바닥은 피로 점철되어 순백을 잃었으며, 이안 역시 숨결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만 같았다.
사태를 인지하지 못했던 마법사들이 동시에 부르짖은 건, 그가 앞으로 쓰러지는 순간.
“이, 이안 님! 피! 피가!”
“안 됩니다! 이안 님! 안 돼요!”
하나, 이안에게는 닿지 않는 울음이다. 이명(耳鳴)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으니.
이안은 숨만 겨우 헐떡인 채 바닥을 짚었다. 위대하고 숭고하며 절대적인 마법이,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이안의 목을 옥죄는 듯했다. 그 역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고, 한번 새겨진 약속에는 예외가 없다고, 온 세상이 그리 이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서자 이안은 무엇을 위하여 러더포드와 흔쾌히 계약 마법을 맺었나? 아이는 무엇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줄을 러더포드에게 넘겨주었나?
이안이 미끈거리는 바닥을 긁어내며 일어서려 하자, 러더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안.”
그저 이름을 부른 것이었으나, 계약의 우위자답게 그 효과는 굉장했다. 이안은 심장이 갈가리 찢길 것 같은 고통에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러더포드와 그 마법사들은 이안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걸 확인하고서 경계를 완화했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이안의 피가 찰박거렸다.
“하아, 하, 하아…….”
“죽을 것 같이 아파도 죽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 걱정 말라. 네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 몸만큼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서.”
러더포드는 문득, 자신과 서자 이안이 맺었던 계약을 떠올리곤 눈썹을 까딱거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영혼이 아니라 육신으로 계약을 이은 게 이렇게도 다행일 수 없다.
자신이 타인의 몸에 빙의했던 것과 같이, 서자 이안도 누군가에 의해 빙의될 수 있음을 어찌 생각지 못했을까? 아마 은연 중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육신은 죽어서나 변하지만, 영혼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걸.
러더포드는 구겨진 옷을 탁탁 털며,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물러나-!”
“러더포드 님에게 무례하다!”
지이잉! 지잉!
촤아아악!
황궁 마법사들이 덤벼들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안이 없다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낼 수 없으니. 그들은 그저 러더포드의 마법사들과 대치하여 팽팽히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보호막을 내려!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보호막을 올려라! 지원을 차단해!”
러더포드는 피로 흠뻑 젖은 발로 아이의 머리통을 지그시 밟았다. 상태가 어떤지 확인함과 동시에,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분풀이었다. 황궁 마법사들의 기함은 덤이었고.
꾸우욱.
“저, 저게 감히! 미쳤어!?”
“발 치워, 시발놈아! 뒤지고 싶지 않으면!”
“이안 님! 이안 님!”
지이잉! 퍼엉!
마법사들의 격돌이 다시금 격해졌다. 구하려는 자와, 막아서는 자들의 마력이 세찬 바람을 만들어내어 러더포드와 이안을 감쌌다.
러더포드는 무덤덤한 낯으로 쓰러진 이안의 옆모습을 내려다봤다. 역시 아무리 보아도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금빛이 사그라졌지만, 녹안은 알 수 없는 기개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으니.
“네놈이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래도, 빙의된 지 얼마 안 되었나 보지?
이제 겨우 초반이거나.
“어째서 죽어도 죽지 않고 타인의 몸으로 살아있는지, 그게 궁금하여 나를 몰아세운 것 아닌가?”
정확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결이 맞는 물음이다. 이안은 힘이 아예 안 들어가는 손끝을 까딱거리기 위해 집중했다. 신체 내부에 가해진 충격이 상당했으나, 이겨낼 수 있다. 숨이 붙어있는 한, 할 수 있다.
스윽.
러더포드는 몸을 낮추어 이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심연의 저주에 걸린 걸 축하한다.”
“……?”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삶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는 저주. 수백, 수천 번의 환생으로 본래의 내가 누구였는지 잊을 수밖에 없는 저주. 죽음의 공포를 쉴 새 없이 느끼고 느껴, 인간 본연의 감정이 무뎌지는 저주. 처음에는 혼란만이 있지. 하지만 억겁의 시간이 지나다 보면, 스스로가 죽기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아 혐오로 가득 찰 것이다.”
이안은 러더포드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단 걸 알아챘다. 그는 반도르. 금기의 마법이 아닌, 살아서 스스로 심연으로 걸어간 자. 그로 인해 얻은 대가가 끝없는 죽음이었나 보다.
그렇다면 자신은? 황제 이안 베로시온 말이다.
‘금기의 마법을 쓴 건 내가 아니라 나움. 나 또한 심연으로 간 적 없다.’
이안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까딱거렸다. 아니다. 자신이 서자 이안의 몸으로 빙의된 것은 저주가 아니다.
“나는 대제국 바리엘의 명령으로 균열에 잡아먹혔다.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그리 되었을까?”
러더포드가 이안의 머리칼을 쥐어 당겼다. 고개가 들리자, 턱선을 타고 흐르는 피. 러더포드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분노? 아니, 고통? 그것도 아니다. 저것은-
“…절망하고 있구나.”
“뭐?”
“균열에 잡아먹힌 뒤, 너는 절망했어.”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드디어 모든 걸 끝낼 수 있으니까. 바로 네놈이 들어앉아 있는, 이안 덕분에.”
이안은 시선을 내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으로 봐서 반도르는 균열로 들어섰다가 심연을 만난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심연의 저주’를 입에 올린 것이겠지.
그 저주라 하면, 죽지 못하여 영혼이 풍화되는 것.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러더포드의 몸으로 벗어날 기회를 잡았고, 그 도움으로 서자 이안이 있는 게라.
“…나는 심연에 간 적이 없다.”
그리고 은연중에 보이는 바리엘에 대한 적개심. 내란 개입부터 하여,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제국에 위협적이었다.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풍화된 영혼이 위로받기 위해 저지른 일인지 모를 일.
“뭐?”
“심연에 간 적 없다고 하였다. 너는 저주받았지만, 나는 기회를 얻은 것이거든.”
러더포드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이안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답해주면, 나 또한 이를 수 있는 걸 최선으로 일러주마.”
“저주가 아니면, 대체 어찌?”
“심연에 간 마법사들은 어찌 되었나?”
둘의 질문이 동시에 맞물렸다.
잠깐의 침묵. 서로에게 꼭 필요한 물음이었으나, 각자가 생각하는 무게는 남달랐다. 러더포드에게 환생은 저주이자 과거였으나, 이안에게 환생은 기회이자 미래와 연관 있는 것이었으니. 러더포드, 즉 작은 것을 가진 자가 먼저 내어줄 수밖에 없다.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내가 여기서 끝없는 죽음을 겪었듯이, 심연에 빠진 자들도 각자가 겪었던 죽음을 끝없이 겪고 있다. 묶여버린 시간의 굴레 속에서, 비참했던 그 마지막을 겪고 또 겪고, 다시금 겪으면서.”
이안의 눈이 커졌다. 묶인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죽어간다니?
그렇다면 나움은? 지하 감옥 그곳에서, 자신에게 도망치라 이르던 그 순간에 갇혀 끝없이 불타고 있는 건가? 이안 베로시온의 옆을 영원히 지키어, 죽고, 죽고, 또…….
꽈악.
이안은 울컥 솟구치는 울음에 볼 안쪽을 짓씹었다. 나움에게 자아가 남아있다면, 필시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희미하게 지워질 이안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을 위하여, 자신이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 있노라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네놈이 대답할 차례다.”
러더포드는 이안이 동요하고 있음을 느끼고, 머리채를 가볍게 흔들었다. 정신 차린 다음 자신이 원하는 답을 내놓으라, 재촉하는 손길이었다.
색이 바래버린 녹안. 이안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러더포드를 쳐다봤다.
‘나움은 심연에 있고, 서자 이안의 몸으로는 러더포드에게 제대로 대적할 수 없다. 이자가 바라는 세상에서 바리엘은 필시 빛을 잃겠지.’
그때, 답을 찾은 이안의 녹안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착각인가? 러더포드가 의아하게 눈을 들여다봤지만, 단순한 빛 반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품고 있는 내면의 단단한 무엇인가가 반짝여 흘러나오는 기백이다.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러더포드가 머리채를 놓으려고 하자, 이안이 그 손목을 꽉 붙들었다.
“그래. 이제는 내가 답할 차례라.”
꽈아악.
“어째서, 저주가 아님에도 내가 이안의 몸에서 깨어났는지 말이다. 사실 나도 잘 몰랐어. 네놈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거-”
각혈하여 쓰러진 게 무색할 정도다. 어디서 힘이 솟는지 모를 정도로, 이안은 러더포드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냈다.
“러더포드 님! 그림이 열렸습니다! 좌표는 확실하지 않지만 황궁을 나갈 순 있습니다! 최대한 북쪽으로 설정하여 우선 바리엘을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2황궁으로 간 애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선 이안 먼저 옮기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여기 있는 마법사들도 대충 정리해서 수 좀 줄여놓고요.”
“전시실만 열면, 사실 다몬 왕이 그렇게 필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밖에서 지원군이 들어오기 전에 물러서심이 옳아보입니다.”
끼이이익! 콰앙!
전시실 안에서 그림을 붙잡고 있던 러더포드의 마법사들이 동시에 알려왔다. 퇴각할 수 있는 출입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게 정확히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황궁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터.
“다들 물건 옮기고 있어. 2황궁 인원들을 잠시 기다린다.”
“예! 이봐! 쟤들 정리 좀 도와라!”
출입 통로 문제를 해결한지라, 다들 한숨 놓는 기색이었다. 전시실 안쪽 마법사들은 한결 편안해진 낯으로 소매를 걷었다.
지이잉! 지잉!
순식간에 앞뒤로 포위당한 황궁 마법사들. 마법 보호막은 물린 지 오래였지만, 러더포드 마법사들은 그 힘을 이어받아 보호막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바깥을 속임과 동시에 고립되기 위함이다. 추가 지원군이 들이닥친다면, 전시실에 남아있는 보석들을 손쉽게 옮기지 못할 것 아닌가?
“인장 꼭 챙기고, 저거저거. 황실 보물이니 두고 가서는 아니 된다.”
러더포드 쪽 마법사의 지시에, 황궁 마법사들은 단체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건방져도 분수가 있지. 이곳은 뒷골목 보석 가게가 아니라, 대제국 바리엘의 황궁 전시실이다. 이곳에 침입한 걸로도 부족해서, 보물에 손을 대겠다고?
마법사들이 이를 꽉 깨물며 공격하려 하자, 러더포드 쪽 마법사들 또한 동시에 뛰어올랐다.
지이이잉! 퍼엉!
길게 늘어지는 마법사들의 그림자. 개중 몇몇의 배와 옆구리가 꿰였고, 또 몇몇은 사지에 부상을 입고 나뒹굴었다.
이안은 그 그림자들이 모두 황실 마법사들의 것임을 알아챘다. 머리에 묶은 띠가 휘날렸기 때문이다.
“커억!”
“윽…….”
귀에 익은 신음들이 들려왔으나, 이안은 애써 쳐다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한계다. 동료들의 부상과 죽음을 본다면, 더는 버틸 수 없을지도.
지이잉. 지잉.
이안은 눈을 차분히 감고서, 자신의 모든 마력을 솎아냈다. 마지막이다. 이것이 정녕 마지막…….
“또 시작인가.”
러더포드가 멈칫거렸으나, 그뿐이다. 자신의 부하들이 옆에서 단단히 지키고 있었으며, 더 이상 이안은 위협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심장을 옥죄면 될 일. 피를 쏟고 또 쏟게 하여 영혼을 죽이리라.
게다가 이안은 마력만 계속 쏟아내고 있지, 특별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러더포드는 마법사들에게 주위를 정리하라는 뜻으로 고갯짓했다.
“발악하는군.”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그래. 어디 한번 돌아가서-”
돌아가서 듣자고, 그리 이르려는 순간.
러더포드는 목도했다. 창문 밖으로 떠오르는 ‘검은 달’을 말이다. 마치 주인의 부름을 받고 이 세계에 떨어진 것처럼 점점 거대해지는 검은 달.
이안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들어보아라. 나와 함께, 심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