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68
제468화. 10년 후
바리엘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크고 작은 역경은 언제나 존재했고, 그들은 역사를 배운 자들이었다. 하여, 지금 이 순간 또한 언제든 하나의 문장으로 새겨질 수 있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이제껏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외부인의 황궁 침입. 두 번 연속 불거진 마법부 장관의 자질 문제와 갑작스러운 부재.
바리엘이 흘러갈 역사의 길에서, 그들은 분기점에 서 있음을 느꼈다. 앞으로의 발언과 선택에 따라 바리엘의 미래가 바뀔 것이라. 나아가 가이아의 운명까지도.
끼이익.
대회의실 문이 열리자, 관료들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진은 의자까지 박차고 일어난 참이다. 회의실에 들어서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피해 보고서만 읽었던 것이 무색했다.
“전하. 클리포포드에서 온 전서구입니다.”
“무어라 적혀있는가?”
“예. 그것이…….”
시종은 금 쟁반에 쪽지를 올리면서, 한쪽에 자리한 클리포포드 왕과 왕자를 힐끔거렸다. 전서구가 가져온 전언이 그들에게 희소식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물론, 바리엘에게도 마찬가지지만.
“클리포포드의 수도, 프로드호나 상공에 검은 달이 떴다가 금세 졌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 이안 경이 정말 균열로 들어갔나 봅니다. 균열 아래 심연이라는 것이 있다면서요?”
“아이고, 정말. 이안 경도 참 무모하시지.”
“이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걸 의논하고자 모인 자리 아닙니까? 정숙하시오!”
검은 달의 좌표가 클리포포드의 균열 쪽인 것으로 밝혀졌다. 심연으로 가겠노라, 공공연하게 선언했던 이안의 발언이 이루어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동시에 더 이상 가이아 대륙 그 어디에도 그가 없음을 뜻하기도 했고.
꽈아악.
진은 쪽지를 있는 힘껏 구기며 고개 숙였다. 눈으로 보았지 않나? 이안이 검은 달로 잠기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 진을 덮치는 것 같았다. 밀어붙이고, 감당하라며 휘몰아치는 지금이 너무 어지럽다.
시종은 그런 황자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현재 클리포포드 왕궁 경비가 인근을 수색하여 흔적을 살펴보고 있다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균열로 인해 하급 마물이 생성되고, 왕궁 중심으로는 아예 접근이 불가한 상태인지라 무리가 있을 것이라 전해왔습니다.”
“조사를 도울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바리엘이 원한다면-”
가만히 앉아있던 클리포포드 왕이 대신 대답했다.
안 그래도 수도가 전쟁과 균열로 엉망이다. 이를 정리하고 수습할 목적으로 마법사를 지원받고자 바리엘에 온 것 아닌가? 개중 제일 강하고, 직접 균열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이안이 제격이었으나, 사태가 이리된 이상 다른 마법사라도 받는 게 우선이었다.
“무엇이든지, 클리포포드에서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전하, 아니 될 말입니다!”
왕의 발언에, 한 관료가 손까지 내저으며 벌떡 일어났다.
“러더포드의 침입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현재 황궁의 보안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포함해서요. 단 한 명의 마법사라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안 경이 러더포드와 함께 균열로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저 검은 달이 클리포포드에 떴다는 것만으로는 러더포드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심연으로 가는 것이 곧 죽음이라 상정하였으나, 동시에 확신하지는 않는 발언이다. 진의 심기를 거스르면서도 위로하는, 모순적인 말. 아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는 파견에 찬성합니다. 이안 경이 위대한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증언에 따르면 러더포드를 굉장히 힘겨워하지 않았습니까? 상대는 이안 경의 위에 있는 자입니다. 혹, 운 좋게 살아남았다면 그것을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 아주 악랄하고 대담한 놈이니 또 모르지요!”
“감히 황궁을 침입한 놈입니다. 후환 없게, 조사단을 꾸리시는 게 맞습니다.”
“그 의견, 저도 동의합니다. 추적해보심이 마땅합니다.”
진은 생각할 것도 없다며 손을 가로저었다. 이안이 살아있을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지.
“마법사를 파견한다. 헤일.”
“예. 전하.”
“현재 마법부 상황은?”
헤일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잠시 침묵했다. 소매에 생생히 남아있는 핏자국이 대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황궁친위대의 지원으로 전투는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지만, 그 마지막은 참으로 아쉬웠다.
“마법부를 노린 침입자들이 스스로 자폭하여, 본관의 절반 이상이 파손되었습니다. 복구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다몬 왕은? 문제가 없는가?”
“예. 그는 무사합니다. 다만, 대장직에 있는 마법사 한 명이 중상, 두 명은 경상을 입었습니다. 그 밖의 마법사 중 절반 가까운 자들이 중경상을 입은 채 회복 중입니다.”
“치유 마법사가 있지 않소?”
“그들은 전쟁 이후 마력을 회복하지 못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마력증폭제 사용을 검토하고 있지만, 그걸 담당하는 아코렐라 대장이 말씀드린 것과 같이 중상이라 쉽지 않습니다.”
“마법사들은 서로 힘을 나눠줄 수 있다는데?”
어느 관료의 말에, 헤일이 한숨 쉬었다. 윗사람들과 맞지 않는다 생각하긴 했으나, 막상 부딪쳐보니 상상 그 이상이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끌어 윽박지르고 싶은 충동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경께서는 피를 한번에 모두 뽑아낼 수 있습니까?”
“무, 무어라?”
“이미 모든 마법사들이 전력을 다해 힘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 정도를 넘어버린다면, 마법부 모두가 골골대어 침대에 눕게 되겠지요. 그리되면, 직접 오시어 보고서를 받아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이보시게! 헤일 대장!”
“조용.”
울컥한 관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진이 손을 내저으며 자중시켰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적절한 말도 아니었다.
“헤일 대장. 그대는 예의를 지켜라.”
“송구합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현재 마법부는 불능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헤일은 무거운 헛기침을 하며 이안을 입에 올렸다.
“이안 님 사태로 사기가 바닥입니다. 적지 않은 마법사들이 퇴직하겠노라 전해왔습니다.”
“퇴직이라니? 지금같이 중요한 때에, 무슨!”
“그들은 바리엘 국민이지, 노예가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럴 자유가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말려야 하는 것 아니오?”
“누가요?”
누가? 대체 누가 그들을 말린단 말인가? 마법부의 수장인 이안이 없는데.
관료들은 입을 뻐끔거리며 헤일 대장에게 삿대질했다.
“그대가!”
“말만 대장이지, 제게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우선 장관직을 맡으면 될 일 아닌가?”
“…싫습니다.”
“뭐?”
기함하는 관료들과 달리, 진은 쪽지에서 시선만 살짝 옮겼다. 허공을 응시하는 헤일의 시선이 올곧다.
“이안 님께도 계속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마법부 장관직, 맡지 않을 것입니다. 아코렐라도 저와 같은 입장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깨어난다면 다시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법부 장관직을 비워두겠다는 건가?”
“말도 안 되네! 그럴 수는 없어!”
“그럴 수 없다 한들, 방도가 없습니다.”
마법부 장관은 타 부서와 달리 그 특수성이 인정되어 내부적인 심사로 장관을 선출했다. 이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진은 논의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다. 마법부 장관 선출은 마법부 내부의 일이니, 여기서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전하.”
“지금 더욱 중요한 것은 황궁의 수습이고, 바리엘의 권위에 도전한 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오. 내 말이 틀린가?”
마법부 장관이 없다 한들, 마법사들은 황궁 소속이다.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어떠한 문제도 없다. 게다가 장관을 다시 뽑는다고 해서, 이안의 공백을 메울 만한 자가 과연 있겠는가?
진은 얼굴을 가르는 상처가 욱신거리는 걸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하. 듣자 하니, 예전 하이만가의 여식 멜라니아도 러더포드와 함께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인지요?”
“그래. 하지만 어떤 관계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전투나 보물 옮기는 것에 관여하지 않았다. 아코렐라 대장에 따르면-”
휘말린 것처럼 보였다고는 하는데, 공식 석상에서 진의 입으로 말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진은 보고서를 가볍게 두드리며 일렀다.
“…분실된 황궁 보물에 대해서는 가이아 전역에 수배를 내릴 것이다. 온전히 가져오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욕심으로 쥐고 있는 자에게는 엄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예. 전하. 버고스 쪽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쪽 자금을 대기 위한 짓으로 생각되오니, 면밀히 조사하겠습니다.”
“하면, 다몬 왕의 처분은……?”
“다몬 왕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안이 일러주었던 다몬의 비밀. 전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군주로서의 후회와 자책을 보이지 않는 건, 필시 다음 인생을 기대하고 있음이렷다. 두 번 살았으니, 세 번 못 살 것 무엇 있나?
“탑에 유폐하되 스스로 죽지 못하게끔 철저히 관리하라. 하여, 버고스 쪽 왕당파에 명분을 남겨줄 것이다. 러더포드파에 대항할 수 있게 적극 지원할 터이니, 보물 회수 또한 그쪽을 통하는 게 수월할 것이다.”
관료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 말인즉, 버고스에 내란을 일으켜 왕국 자체를 분열시키고, 바리엘의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루스웨나 쪽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에리포니 왕이 죽었고, 러더포드의 난입으로 인해 우리의 시선이 모두 버고스로 옮겨졌다. 그쪽에서는 바리엘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그들만의 내전을 치를 것이니, 주시하되 특별한 조치는 하지 않겠다.”
클리포포드 왕이 멈칫거렸으나, 그뿐이다. 그들이 받을 전쟁 피해 배상금에 대한 권리는 이미 바리엘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를 받아내었으니, 거기서 만족할 수밖에.
“더 나눌 의견 있는가?”
“…….”
제일 중요한 게 남았다.
“…저기, 전하.”
“쉿! 쉿쉿!”
바로 이안에 대한 마무리다.
누군가 안건을 올리려 하자, 좌우로 앉아있던 관료들이 팔까지 붙잡고서 쉬쉬거렸다. 이드갈 제조에 관한 죄를 묻는 게 옳지만, 여기서 그 얘기를 꺼냈다간 진의 분노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죽은 자가 아니던가. 사자(死者)의 명예를 잘라낸다고 한들, 당장 오는 이득이 무엇 있겠나?
“의견 있는가?”
“…없습니다. 추후 생기는 사안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보고하여 회의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모두 움직이시게. 밤이 짧아.”
“예. 전하.”
끼이익.
진은 그렇게 이르고,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따르는 시아오시와 제이럿 대장. 침실이 아닌 정반대 방향이었지만, 두 사람은 침묵한 채 걸었다. 진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닥.
“…아직 이러고 있니.”
“오셨습니까, 전하.”
“베릭. 일어나.”
이안이 사라진 그곳. 검은 달이 내려앉았다 사라진 그곳. 여전히 핏자국이 낭자한 그곳에, 베릭이 멍하니 앉아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창밖으로 떠오르는 흰 달만 올려다보며.
로만드로 역시 베릭을 혼자 둘 수 없는지라, 그 옆에 자리하여 몇 시간째 함께하는 중이었다.
“일어나라. 베릭.”
“…….”
“할 일이 많아.”
“내가 뭘 해야 하는데요.”
주인이 없는데, 내가 뭘.
“…시발. 나 데리고 가라니까. 진짜. 말 존나 안 듣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이럴 때 보면 데르가 자식 맞는다니까.”
“베릭. 나를 봐.”
진은 베릭 앞에 쪼그려 앉아, 빛바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힘 있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안 경은 돌아온다.”
작별하지는 못했지만, 약속했다.
“심연으로 간다 한들, 언젠가 돌아온다고 하였다. 내게 직접 일러주었어. 별채를 지으면, 더더욱 이르게 올 수 있다 하였지.”
“…정말이요?”
“정말. 내 모든 걸 걸고.”
그러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너는 너의 일을 하자. 진이 어루만지니, 베릭은 눈가를 있는 힘껏 문지르며 소리쳤다.
“죽여! 진짜 이안 히엘로, 시발!”
허공에 대고 지르는 울림이 건물 밖 정원까지 울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이안을 부르짖는 소리는 희미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았다.
열 번의 봄이 찾아올 때까지.
* *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로만드로는 두꺼운 안경을 쓴 여자아이 손을 붙잡고 황궁 복도를 걸었다. 열 살쯤 되었을까? 갈래머리를 곱게 딴 채로, 품에는 두꺼운 책을 안고 있다. 로만드로는 한껏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에. 그건 아빠보다 비비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학교에서 대충 배우긴 했지만, 아빠가 더 잘 알잖아요. 정작 정말 중요한 것들은 알려주지 않는걸요.”
로만드로의 딸, 비비는 아빠 앞을 가로막으며 팔을 뻗었다.
“그러니까, 알려줘요. 왜 마법부만 장관이 없는지! 아빠는 상관도 없으면서 왜 맨날 바쁜지!”
“아이고, 아가씨. 조용히 한다는 조건으로 황궁 구경시켜 주는 거라 했는데? 응? 전하 뵙고 싶다 하지 않았어?”
비비는 콧잔등에 겨우 걸쳐진 안경을 삐쭉 들어 올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곤 어서 앞장서 걸으라며, 아비의 옆구리를 밀어댔다.
“로만드로 님!”
“오, 그래.”
“이쪽이 따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비비일세. 안에 전하 계신가? 곧 있을 성인식 관련하여 말씀드릴 게 있는데. 아, 물론 딸아이도 함께 오는 걸 알고 계셔.”
비비는 아버지 옆구리에 딱 붙어서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환한 황궁과 달리, 생각보다 내부가 어둡다. 응접실 한쪽 벽에는 성인식을 기념하는 황태자의 초상화가 바닥에 놓여있었다. 은발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깊은 상처. 듣던 대로다.
“로만드로. 왔군.”
“전하.”
끼이익.
그리고 그 순간, 중문이 열리고 황태자가 모습을 보였다. 진 베로시온. 현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가까운 미래의 황제. 진은 비비를 내려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