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69
제469화. 첫걸음
“반갑구나, 비비. 보고 싶었단다.”
“네? 저를요?”
뜻밖의 인사에 비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무거운 안경이 아래로 조금 내려앉았을 정도다. 진은 소파에 앉아도 좋다는 듯 손짓했고, 아이는 어설프게나마 치마를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로만드로는 보고서 세 뭉텅이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각각, ‘성인식 진행’, ‘버고스 물자 지원’, ‘균열 정기 보고서-자이라’라는 제목을 붙인 것들이다.
“그래. 네가 비비안나와 똑 닮았다고 하여, 얼마나 그런지 궁금했다.”
“아아. 다들 그러시더라고요. 엄마만 닮아서 다행이라고. 심지어는 아빠도 그리 말하셨어요.”
“크흠, 비비.”
로만드로는 헛기침으로 예의 갖출 것을 당부했다. 마주한 자는 일개 귀족이 아니라 황족, 그것도 황제 자리에 성큼 다가선 진이었다. 로만드로가 오랜 세월 봐온 것과 별개로, 단어 선택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정작 진은 신경 안 쓰는 눈치였지만.
“비비. 사실 그 말을 제일 먼저 한 것이 나였다.”
“전하께서요?”
“그래. 하여 더더욱 궁금했지.”
“저를 보지 않으셨으면서, 어찌 엄마와 닮았다는 걸 아셨습니까?”
비비가 로만드로를 돌아보며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분도 아니고, 진 황자 전하셨다. 저를 보고자 한다면 언제든 가능하셨을 터. 게다가 저리 앞뒤 안 맞는 말을 하시다니,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무슨 뜻일까? 아, 저것이 바로 귀하신 분들만 사용한다는 화법? 듣던 대로 확실히 어렵군!
로만드로는 딸아이의 생각이 깊어지는 걸 알아채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전하. 바리엘 중앙 소학교에서 전하의 성인식을 깊이 축하하여 문집을 발행했습니다. 비비도 참여하였는데, 운 좋게 표제작으로 선정되었다지 뭡니까. 꼭 전하고 싶다 노래를 불러대어, 이리 전하께 입궁을 청하였습니다. 부디 덕담 한마디 해 주십시오.”
앗! 비비는 화들짝 놀라며 품에 든 책을 진에게 내밀었다.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도 중앙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리엘 각지에서 선물이 올라왔다. 거대한 동상, 수천 빛깔의 천, 외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음식 등등. 그런 것에 비하면 어린이들이 쓴 문집 따위, 너무 하찮지 않나?
“음.”
차락.
진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비비의 손에서 땀이 조그맣게 묻어나왔다. 혹여 노여워하신다면 아빠 탓! 아이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로만드로가 한쪽 눈을 찡긋찡긋거렸다.
“여기 있구나, 비비의 작품.”
“헉! 네! 그거예요!”
“…문체가 비비와 닮아 아주 깨끗하고, 맑다. 내 침실에 두어 시간 날 때마다 눈에 익혀두마. 다음에 오찬이라도 함께하며 얘기할까?”
아이의 입이 떡 벌어졌고, 이내 고장 난 것처럼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댔다.
체통이라고는 없는 어린 아가씨의 행동에, 로만드로는 시종에게 손짓하는 한편 아이를 타일렀다.
“비비, 이제 그만 전하께 감사 인사를 올리고, 밖에 나가서 기다리렴. 조용히, 알겠지?”
“네, 아빠.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와아아! 오예. 대박.”
“비비!”
끼이익.
분명 아이가 앉아있다 나간 것뿐인데, 집무실은 한차례 폭풍이 헤집어 놓은 분위기였다. 로만드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진에게 고개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비비가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하하. 자식 키우기가 이리 힘드네요.”
“무엇을. 이리 멋진 책을 받았는데. 딱 그 나이 대 아이 같고 보기 좋다.”
그 나이 대 아이. 로만드로는 비비의 나이만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비와 같은 나이의 진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상하네. 분명 지금의 비비와 동갑이셨는데, 그때의 진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의젓하셨을까.
“아이가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언질을 줬는데, 이제야 보여주다니. 그대도 참 모질다.”
타악. 진은 책을 덮고서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알고 있다. 어째서 로만드로가 비비를 궁에 들이지 않았는지 말이다. 지난 십 년, 황궁에는 차갑고, 무거우며, 조용한 피바람이 불었으니. 어찌 꽃처럼 귀하고 소중한 딸아이를 안으로 들일 수 있었겠나?
“보고하라.”
“예, 전하. 우선 성인식 관련한 사안입니다. 일정에는 변동이 없고,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앙 귀족 외, 바리엘 전역에서 열두 가문이 성인식에 참석하겠노라 전해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데. 즉위식도 아니고 성인식인데.”
“…히엘로도 포함해서입니다.”
보고서를 넘기던 진이 멈칫했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 자신을 가득 채운 그 이름. 잊을 수도 없었고, 잊고 싶지도 않은 그 이름은 오늘도 이렇게 진의 앞에 나타났다. 진은 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필리아와 네르사른. 그리고 이안 경의 동생이 함께 올라오나?”
“그렇습니다.”
“비비보다 한 살 어리다고 하였지.”
“예.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천려족 부족장이 사망하여 대사막에서 오 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서신으로만 얘기를 주고 받아, 직접 보는 건 저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안 경과 많이 닮았을까?”
진의 물음에 로만드로가 웃기만 했다. 자신도 필리아에게 그걸 물어보았으니까. 그 대답은-
“여자 이안이라는데요.”
“여자 이안? 외모가? 아니면, 다른 것이?”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진은 보고서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 생김새를 짐작하고자 했다. 금발과 녹안 그리고 흰 피부. 또 무엇이 있었지? 세부적인 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자, 진은 스스로 놀란 듯이 로만드로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로만드로 자네.”
“예. 전하.”
생글생글, 속도 모르고 웃어대는 탓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마치 햇빛을 등지고 선 사람처럼, 이안의 얼굴이 희미해진 것이다.
진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고는 손을 까딱거렸다. 보고를 계속 이으라는 뜻이다.
“아, 네넵! 그리고 다음은 버고스 물자 지원입니다. 왕당파에서 황실 보물로 추정되는 티아라를 확보하였다고 전언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무기를 추가 지급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검토 중입니다.”
“수도인 칼라마트를 두고 내전 중이라 하였는데, 어떤 경로로?”
십 년째 이어지는 버고스 내란.
왕당파와 반(反)왕당파 간 전쟁은, 사실상 바리엘이 조율하는 인형극이나 다름없었다. 한쪽이 열세에 처했다 싶으면 그쪽으로 지원을 밀어주고, 반대가 밀린다 싶으면 균형을 맞추도록 도와줬다. 대외적으로는 버고스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이라 했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전쟁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제 버고스에 있는 그 누구도 전쟁이 무엇 때문에 시작했고, 왜 지속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의미 없이 죽고 죽이는 굴레 속에서, 그들은 이념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서로만 노려보고 있었으니.
“여기가 수도로 우회 진입할 수 있는 외곽 지역인데, 광석 매장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하여 우선 왕당파 쪽으로 밀어주어 조사하던 차에, 매립되어 있던 상자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황실 보석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고?”
“예. 버고스의 것일 수도 있지요. 수도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보니, 조사를 끝마치는 대로 다시 폐쇄할 것입니다. 매장지가 고지대에 위치하여 전투에 유리하니, 무기 지원은 최소한으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진은 납득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재란에 서명이 그려지자, 로만드로는 조심스럽게 권했다.
“전하. 이제 슬슬 버고스를 정리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이다. 즉위식 이후에나 결정할 사안이라.”
몇 번이고 다른 관료들 또한 의견을 내왔다. 이제 그만 버고스 내란 조율을 멈추고, 아예 바리엘로 흡수하는 게 어떨지. 하지만 진의 입장은 확고했다.
“바리엘과 버고스는 오랜 세월 접경했지만, 그 역사와 문화가 확연히 다르다. 내전 중인 지금 바리엘이 전면에 나서서 정리하려 한다면, 오히려 분열된 그들을 통합하게 할 수도 있다. 버고스 국민의 반발은 확실하고.”
진은 웃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버고스에서 얻을 게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지금 정리해야 하지? 그 냉정한 미소에, 로만드로는 마른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 숙였다.
“그리고 지금 영토 확장을 하면,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업적이 되지 않나?”
제국의 실세였으나, 염연히 황제가 살아있었다. 그러니 지금 바리엘이 버고스를 점령한다면 이것은 진의 역사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사서에 기록될 일이다. 그럴 수는 없지.
“곧 성인식이 다가오니, 관료들에게 재촉하지 말라 전하라. 계속 그대에게 전언한다면 지배정책 담당관으로 선별해 버고스로 보내버리겠다 전하고.”
“…예. 전하.”
“마법부 별채 건설에 필요한 마력석은?”
“이번 계절까지 추가로 열 상자 들어올 예정입니다.”
“쯧. 더뎌. 더뎌도 너무 더디구나.”
버고스의 내란이 가져온 유일한 단점이었다. 마법부 별채 건설에 필요한 마력석이 버고스에 매장되어 있건만, 그것이 정식으로 수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채굴 인원 자체가 없고, 있다 한들 주로 저들끼리의 내전에 우선 사용되기 때문이다. 바리엘에서 사람을 보낼까 고민했지만, 온 나라가 전쟁 통인지라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거의 마무리 중이니, 너무 심려치 마소서, 전하. 올해 안으로 완공될 것 같습니다.”
…올해. 마법부 별채가 완성되면, 정말로 이안 경이 돌아올까?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떠한 흔적도, 울림도 없이 지하에 잠겨버린 그가, 정말 돌아올까?
진은 턱을 괸 채 침묵했다. 돌아올 것이라던 이안의 목소리마저 빛이 바랬다. 열 살의 자신은 너무 어려서, 열 밤 자고 오겠다는 부모의 거짓말을 의심 없이 믿어버린 것은 아닐까?
“전하.”
로만드로는 한껏 심각해져 있는 진을 상기시켰다. 아직 볼 서류가 남아있었다.
“클리포포드에서 올라온 정기 보고서입니다.”
“…….”
절반이 떠나간 마법부에서, 다시 그 절반이 클리포포드의 균열로 차출되었다. 마법사들은 균열을 억제하고, 조사하며, 근원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성과는 없었다. 근 10년 동안이나.
“특별한 사안이 있던가?”
“아니요. 언제나와 같습니다.”
-이상 소견 없음. 발견 사항 없음. 보고 사항 없음.
진은 가끔, 지난 모든 기억이 자신의 환상이 아니었을까 의심했다. 그토록 찬란하던 이안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그래. 납득할 수 없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가능했다.
그런데 러더포드는 아니다. 일당들과 함께 검은 달로 잠겨 들긴 했지만, 의아할 정도로 다른 움직임이 없다. 버고스를 장악하려 하고, 꽤 크게 상단을 움직였던 것치고는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재 반왕당파 역시 러더포드와 관련이 있었지만, 지금은 세월에 씻겨 낌새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똑똑.
“아코렐라입니다. 전하. 말씀하신 거 만들어 왔는데요!”
“들어오라.”
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아코렐라가 한쪽 발을 절뚝이며 들어왔다. 환상이었나, 하고 의심할 때면 현실 세계는 영락없이 소리쳤다. 아니라고. 그날의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오래 안 걸렸죠?”
“…목발은?”
“귀찮아서요. 없어도 잘~ 걷습니다.”
“또 실험하다가 날려먹은 거 아녀?”
“내가 베릭인 줄 아세요? 뭐만 하면 날려먹게.”
아코렐라의 발목은 러더포드 일당에 의해 완전히 으스러졌다. 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는지라, 그녀는 예전보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집무실에 들어섰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그래. 수고했다. 둘은 이만 퇴근하여라. 로만드로, 비비가 기다리겠어.”
“어? 비비 왔어요? 밖에 안 보이던데?”
“뭐!? 아이고, 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여!”
“시아.”
끼이익.
진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아오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준비하겠노라, 답하는 게다. 진은 아코렐라가 만들어준 물약을 품에 넣고서 집무실을 나섰다.
“근데 아코렐라. 전하가 무엇을 지시하셨나? 난 들은 게 없는데.”
“별거 아니에요. 저기, 동결 해제하는 물약.”
“동결?”
“몰라요. 어디 쓰실 데가 있나 보죠. 비비나 찾아보세요, 저는 갑니당!”
아버지인 황제의 동결 해제.
자연스러운 죽음.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황위 계승.
진정한 황제가 되기 위하여, 역사에 한 발 다가서기 위하여, 그래서 언젠가 이안과 마주하기 위하여. 진이 행해야 할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