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0
제470화. 유언
비비는 심각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힐끗 옆을 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가, 이어서 멀리, 아주 멀리 세워져 있는 탑까지 살폈다.
황궁은 참으로 신기한 곳 아닌가? 커다란 창과 탁 트인 정원 덕에 아주 멀리까지 잘 보이는 데다, 네 개의 탑은 동서남북을 알려주는 듯했다.
구불거리는 것 없이 일직선으로 뻗은 길.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만 결정하면 되거늘, 이상하게 한 곳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돌아다니는 경비도 없고.
아아. 이런.
인정할 수밖에.
“…훗. 길 잃었다.”
비비가 손을 달달 떨며 안경을 바로 썼다. 침착하자, 침착해. 아빠가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서 도와달라고 하면 된다.
큼큼. 비비는 헛기침을 하더니,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조난당했을 때는 있는 힘껏 소리치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포부와 달리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누, 누구 없어요오……?”
후에엥. 아이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엄마와 아빠가 나누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밤만 되면 황궁에 있는 고기란 고기는 다 사라지니, 이게 걸신들린 괴물이지.’
‘안 그러다가 요즘 또 그래요?’
‘피 안 뒤집어쓰는 날이 없어. 북쪽 마물 지대로 갈까 말까 고민하더라고.’
“…….”
밤이 되기 전에 안전한 장소로 가는 게 좋겠다.
그때, 비비는 한 여자가 검과 갑옷 따위를 챙겨 들고 지나가는 걸 발견했다. 남색 중단발 머리칼에 다부진 몸.
“저, 저기요!”
비비는 손까지 좌우로 흔들며 뛰어갔지만, 여자는 알아채지 못하고 한 건물로 들어갔다.
콰앙! 쾅!
퍽! 퍼어억!
“한 번 더!”
“시발, 해 보자 이거지?”
“해 보자고 하면, 할 수나 있나?”
“아이, 재수 없는 새끼! 넌 뒤졌다!”
퍼어엉!
그리고 목격한 광경. 웃통을 벗었거나, 가볍게 입은 자들이 둥글게 모여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아. 훈련장이구나. 그런데 뭐지?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했는데?
“인마, 베릭 옆구리를 노려야지! 비어있잖아!”
“아이고, 저거 또 처맞겠네. 그러면 못 이긴다니까? 베릭한테 정면으로 덤비지 마!”
베릭 삼촌이구나!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비비가 반갑게 뛰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인파에 가려져 있던 베릭의 모습이 드러났다. 성한 곳 하나 없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상체, 피로 절어져 축 늘어진 머리카락, 평소와 다르게 살기로 넘실거리는 적안(赤眼).
꽈아악.
“애들 충고 안 들리냐? X밥이면 X밥답게 살살 옆으로 길 생각을 해야지. 무슨 자신감으로 자꾸 앞에서 덤벼?”
베릭은 이를 바득거리며, 상대 목을 한 손으로 쥐어 들어 올렸다. 이대로 목 자체를 터트려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상대방은 손아귀 힘을 풀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무력감만 느낄 뿐이었다.
베릭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흰자가 보이며, 결국에는 거품을 물고 기절하겠지. 모든 게 예상되는, 무미건조한 대결이다.
“베릭, 그만해.”
그리고 적절한 때 말리는 바르사베까지. 베릭은 반쯤 기절한 상대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웅!
“어금니가 하라면 해야지.”
“정도가 과해. 너 이런 식으로 하다간 북쪽 마물 지대로 가는 거, 제안이 아니라 명령으로 바뀔 거다.”
“아이, 시발. 잔소리 지겹다.”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그걸 누리라는 충고다!”
베릭이 물통 놓인 쪽으로 걸어가자, 인파가 좌우로 갈라졌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은 ‘또 시작’이라며 하품을 해댔고, 신입들은 긴장한 채로 바닥의 피를 닦아냈다.
“황궁 떠나기 싫어하는 거 알아. 그러니-”
“어. 나 여기 나가기 싫어. 근데 왜 싫은지 알아?”
베릭은 비워낸 물통을 대충 뒤로 던지며, 웃옷을 집어 들었다.
“북쪽 마물 지대에는 아탄족이 있고, 거기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게 망할 트웰러 영감탱이라서. 이거, 시발. 어디서 본 그림이거든.”
“…베릭.”
“이번에도 갔다가 문제 생기면, 나 진짜 다 죽여.”
“말조심해! 트웰러 장관님이시다!”
“장관이고 나발이고. 지랄.”
바르사베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클리포포드 균열로 바리엘 마법사들이 파견되어 그 힘을 억제, 연구 중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파헤치는 것에는 진전이 없었지만, 균열 억제만큼은 꽤 효과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모순적이게도, 이드갈을 통하여.
“그래서, 마법부 별채 지어질 때까지 보류한 거야? 이안 님 돌아오실까 봐?”
“돌아온다 했으니 돌아오겠지.”
“너, 그걸…….”
믿어? 정말, 아직까지?
바르사베의 뒷말을 알아챈 베릭이 살벌하게 노려봤다. 실수한 것을 깨달은 그녀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사과했다.
“미안.”
“황태자 전하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알겠다고, 미안.”
“시발, 또 생각하니까 빡치네. 그때 네가 나보고 아탄족 맡으라 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안이가-”
“알았다니까?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해? 징글징글한 새끼, 10년 동안 미안하다고 했으면 됐지!”
“아직 멀었어. 뒤질 때까지 계속 사과해.”
“어디가!?”
베릭은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등을 돌렸다. 운동으로 힘 뺐으니, 다시 고기로 힘 채워 넣을 시간이다.
먹고, 싸우고, 자고, 다시 싸우고. 지난 10년 동안 베릭은 이안과 진의 뜻대로 제 할 일을 해왔다. 들리는 말로는 올해 안에 별채가 완성된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오래도 걸렸다. 진짜.’
건물 하나 짓는 거,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긴, 그런 게 있었으면 이안이 사라지지도 않았겠지.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랑 같이 심연으로 들어갔든가.
끼이익.
“엥.”
문을 젖히자, 톡 하고 부딪히는 무언가. 베릭이 슬쩍 내려다보자, 돌처럼 굳어버린 비비가 눈망울을 일렁이고 있었다.
“뭐여. 비비, 네가 왜 여깄어?”
“흐, 흐윽.”
“에엥? 왜, 왜 울어?”
“으아아아앙!”
자신이 알던 베릭 삼촌이 아니라고, 사람을 그렇게 때리면 어떡하냐고, 나쁜 말 쓰면 혼난다고, 비비는 베릭의 허리춤에 매달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베릭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위를 둘러봤고, 다들 어린애 하나에 쩔쩔매는 베릭이 신기하다는 듯 구경했다.
“야, 그만 울어. 로만드로 님은?”
“흐윽, 흑…….”
“비~비!”
귀신이구만, 귀신. 베릭은 저 멀리서 뚱땅뚱땅 뛰어오는 로만드로에게 웃옷을 흔들어 젖혔다. 점차 가까워지던 로만드로가 우는 딸아이를 보고 기함했다.
“비비! 왜 울어?!”
“베릭, 베릭 삼촌이…….”
“베릭이? 이놈, 너 비비한테 뭐 했어?!”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어? 비비! 말은 끝까지 또박또박해야지.”
“사, 삼촌이… 후에엥-!”
“짜식이, 내 딸을!”
“아악!”
따악!
꿀밤 날리는 로만드로와, 툭 부어오른 이마를 연신 문지르며 짜증 내는 베릭. 그리고 엉엉 울어 젖히는 아이까지 아주 볼만한 그림이다.
바르사베는 턱을 괸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월이 지나서 변하는 게 있는가 하면, 저렇게 변치 않는 것도 있다는 게 은근히 위로되는 순간이다.
* * *
“오셨습니까, 전하.”
진이 황제의 처소에 들어서자, 미리 도착해있던 수상과 제이럿이 그를 맞이했다. 젊음이라는 꽃이 만발한 진과 달리, 수상은 노쇠하여 긴 겨울을 맞이하는 나뭇가지와 같았다.
“오래 기다렸는가?”
“아닙니다. 기다림마저 소중한 지금 아닙니까.”
“…들어가지. 시아, 너는 여기서 대기하라.”
수상과 제이럿은 진의 뒤를 따라 처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차갑고, 적막한 공간이다. 그 끝이 다가왔음을 알고 있기에,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만.
“제이럿.”
“예. 전하.”
“내가 즉위하게 되면 바리엘 인근국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환영하는 자들과 달리,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들 또한 많으니까.”
특히 버고스. 왕당파와 반왕당파가 내란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지만, 황제가 서거하고 진이 즉위하면 동시에 이쪽을 바라볼 것이다.
혈기 넘치는 황제가 위업을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 있겠는가? 바로 정복. 내란으로 기울어진 버고스가 그 먹잇감으로 제격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황제의 타계를 공표함과 동시에 버고스 쪽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보라는 지시다. 제이럿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들겠노라 답했다.
끼이익.
처소 문이 열리자, 복숭아 향이 훅 끼쳐왔다. 공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끔. 진은 정원에 꼿꼿이 서 있는 복숭아나무를 바라보았고, 이안을 떠올렸다. 게일과의 약조이니 저것만큼은 두어라, 이르던 목소리를.
‘아, 역시 희미하다.’
그리 생각하며, 진은 반듯하게 누워있는 황제의 곁에 무릎 꿇었다. 처음 아버지의 동결을 보았던, 그 어린 날의 자신도 이러했지.
“아버지.”
역시나 몸이 차다. 아물지 않는 옆구리의 상처는 방금 베인 것처럼 피가 묻어있었다. 썩지 않기 위해 아물 수 없는 상처라. 진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으며 일렀다.
“드디어 제가 성인식을 앞두고 있습니다.”
황제의 그늘을 방패 삼아 나섰던 진 베로시온이 아닙니다. 이제는 햇빛 속으로 스스로 나아가 저만의 바리엘을 세울 시간입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했고, 그 아버지 또한 그러했듯이, 아버지 역시 이제는 역사 속에 잠기세요. 베로시온의 이름으로, 바리엘의 벽을 이루십시오.
스윽.
진은 동결 해제 물약을 황제 입에 흘려보냈다.
살아남과 동시에 죽을 시간이다. 황제의 몸이 점점 따뜻해지고, 희미했던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수상과 제이럿은 납작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폐하, 수상입니다. 바리엘에 새로운 역사가 도래할 시간입니다.”
“황궁친위대의 명예를 걸고, 황실을 지키겠습니다. 감히 맹세합니다. 그러니 부디, 편히 잠드소서.”
마지막 인사였다. 오랜 세월 함께 궁을 이끌었던 군신 관계이자, 어쩌면 동료의 관계. 황제의 흰 속눈썹이 파들거리며 흔들렸고, 그 옆으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진 역시 아버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아버지. 황제이시기 전에 저의 아버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제가 다음을 걷겠습니다. 훗날, 다시 뵙겠습니다.”
“…아.”
“예, 아버지.”
침대에 드디어 혈흔이 스며들었다. 얼었던 상처와 피가 녹아버린 탓이다. 진은 황제의 입가에 귀를 바짝 대었다. 선황의 유언이 흘러나왔다.
“잘했다. 내가, 죽는 것과 같이 너 또한, 언젠가 바리엘을 위해… 죽으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네 손으로, 아비의 숨을 끊은 것과 같이, 그, 그 무엇이든 바리엘을 위하여, 망설임 없이, 베어라…….”
솨아아아.
바람이 크게 불어나 복숭아나무를 흔들었다.
‘베어라, 그 무엇이든.’
진은 이파리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만 바라보았다. 금빛과 같은 머리칼. 그리고 싱그러운 녹안. 그는 더워졌다 다시 차가워지는 아비의 몸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맹세합니다. 아버지. 베로시온의 이름으로, 제 바리엘을 위해 저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