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1
제471화. 피가 섞인 아이, 로엘
필리아는 덜컹거리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서 먼 하늘을 바라봤다.
마차로 히엘로령을 떠나온 지 보름째 되는 아침이다. 마부의 말로는 늦은 오후 전에 입성 가능할 것이라 하는데, 어제만 해도 서둘러 당도하고 싶었던 마음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황궁으로 들어서는 것이 불편했다. 진 황태자께는 강녕하신지, 로만드로와 비비안나 그리고 마법부의 소중한 사람들이 어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모순적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라진 이안 때문이겠지.
스윽.
“필리아.”
“깨셨어요?”
“기대고 싶으면 이쪽으로 기대.”
네르사른은 필리아의 이마가 차가워질까, 손으로 다정히 감싸주었다. 자연스럽게 어깨 쪽으로 기댄 필리아가 행복하다는 듯 웃는 것도 잠시,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곧 있으면 중앙에 도착하겠죠?”
“그래.”
“…무서워요.”
네르사른은 필리아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순간에 증발하여 사라진 이안. 누군가는 죽었다 하고, 누군가는 돌아올 것이라 떠들어대는 사이, 그들은 진의 권유로 도망치듯 중앙을 떠나왔다.
진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치적 수습이었겠지만, 필리아에게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현실을 마주하기 전, 그래서 세상이 무너지기 전에 회피하고자 한 것이니.
“중앙에 가면 이안이 마중 나올 것 같아요. 오랜만에 뵙는다고, 일이 너무 바빠서 연락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그리 이를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서운했지만 이해하는 기간이었노라 이르는 거죠. 그리고 포옹한 다음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묻는 거예요.”
필리아는 머릿속에 펼쳐진 미래에 두 눈을 반짝였으나,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토록 사소한 흔들림에도 깨지는 것이 환상이라. 야속했다.
“그런데 이안이 거기 없다는 걸 확인하면, 앞으로 이런 기대조차 안고 살 수 없게 되겠지요…. 무서워요.”
“필리아.”
“미안해요, 네르사른 님. 저 참 이상하죠? 함께 가겠다고 떼 써 놓고서 이런 말이라니.”
“아니. 이상하지 않아. 그런 두려움에도 나를 따라와 주어 고마워.”
네르사른이 필리아를 안아주며 토닥였다. 이번 여정은 단순히 진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카칸티르의 명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출장. 오래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리아는 딸아이를 데리고 함께 짐을 꾸려주었다.
“네르사른 님을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카칸티르 님도 제가 함께 가 주었으면 하는 눈치셨고요.”
“아무래도 필리아가 전하와 인연이 더 깊으니, 나보단 그대를 보면 더욱 좋아하지 않으시겠어?”
“그러실까요? 사실 이안이 일과는 별개로, 꼭 전하께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긴 했어요. 영주가 없는데도 영지를 회수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사람을 보내지도 않으셨잖아요. 덕분에 계속해서 자유로이 대사막을 오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필리아가 눈가를 씩씩하게 닦으며 웃었다.
혹여 황실에서 새로운 영주를 세웠다면, 정책에 따라 다시금 천려와 벽을 세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 섞여 들어있던 히엘로와 천려족은 이안이 사라졌을 당시 굉장히 예민하게 황궁을 주시하곤 했다. 그 걱정을 잠재우듯, 중앙에서는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황궁도 필리아와 마찬가지였나?’
무관심을 가장한 외면. 이안이 중앙에 살아 있다 여겼던 필리아처럼, 중앙은 이안이 히엘로에 살아 있다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네르사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내의 손등을 붙잡았다. 부디,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끼이익.
그때, 마차 뒤 칸과 이어지는 문이 열리며, 어린 여자아이가 모습을 보였다.
대사막을 담아내는 피부에 금빛 머리칼과 녹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필리아와 똑 닮아있었다. 아이는 자다 깼음에도 칭얼거림 없이 부모의 맞은편에 앉았다.
“로엘. 잘 잤니?”
“…네.”
담담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한껏 잠겨있다. 필리아는 이리 오라는 듯 두 팔을 뻗었고, 로엘은 제 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지못해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곧 있으면 중앙에 도착한대. 보름 동안 고생했어, 우리 딸. 가면 푹신한 침대에서 쉬자.”
“…어머니.”
“응?”
전사의 기질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히엘로란 성을 이어받아서일까. 로엘은 또래 아이들과 달리 굉장히 차분하고, 깊었으며,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먼저 말을 걸 때면, 종종 부모와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이안 오라버니 말이에요.”
“어?”
필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방금 네르사른 님과 대화한 것을 들은 것일까? 마차의 소음이 워낙 커 들리지 않았을 터인데? 게다가 분명 방금까지 잠들었던 기색이 역력했다.
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안 오라버니요. 제 위에 계시다는.”
“미안, 엄마랑 아빠가 너무 시끄러웠지?”
“중앙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어요.”
“…로엘?”
하암. 로엘은 필리아의 품에 고개를 묻고서 작게 하품했다. 아이의 숨결이 필리아의 목덜미를 간질였으나, 그 어떠한 느낌도 나지 않았다.
로엘이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자신이 현실을 왜곡하는 바람에 딸아이에게도 영향이 간 것일까? 필리아의 머릿속에 어지러워지자, 네르사른이 끼어들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되물었다.
“로엘. 이안 오라비에 대한 것은 엄마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해 주었으면 해.”
아비의 언질에, 아이는 눈을 슬쩍 뜨며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인데요. 중앙에 가면 볼 수 있다고요. 이안 오라버니, 곧 있으면 올라오시거든요.”
“올라오다니?”
네르사른은 문득, 카칸티르의 한숨을 떠올렸다. 윈첸이 죽고 나서 비어있는 부족장 자리에 자신을 올릴까 말까 고민하던 때였다.
네르사른은 여러모로 자격이 충분했지만, 그들이 살아왔던 역사 속에서 부족장은, 특별한 능력으로 족장 그리고 천려족 전체를 지탱해야 했다.
“오라버니가 떨어진 아래에서, 위로.”
“누, 누가 그래?”
“봤어요. 제가. 눈으로.”
“……!”
윈첸이 죽으면 그다음으로 천려족을 보살피는 자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어찌 나타나지 않느냐며 걱정하던 전사들의 수군거림 또한 네르사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필리아는 다시금 침묵을 택한 로엘을 끌어안은 채 굳어버렸고, 네르사른은 당황스러움에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구릿빛 피부는 아이가 천려의 전사임을 알려주고 있으나, 금발과 녹안은 바리엘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네, 네르사른 님.”
필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남편을 조용히 불렀다. 혹여 로엘이 윈첸의 뒤를 따라 걷는다면, 아이의 마지막을 어렵지 않게 점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실라스크 존재 여부에 따라 꺾였다가 피어나길 반복하는 운명이 되겠지.
그렇다고 단순히 어린아이가 꾼 꿈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찬란하고 달콤했다. 사라진 이안이 돌아올 것이라 이르는 그 내용을, 필리아는 단호히 부정할 수 없었다.
“괜찮아. 필리아.”
네르사른도 그걸 알고 있는지라, 아이가 그저 꿈을 꾼 것이라 이르지 못했다. 정말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이라면 아버지로서는 걱정이겠으나, 천려족의 일원으로서는 한숨 놓게 되는 일이니.
네르사른은 필리아와 로엘을 함께 끌어안으며 복잡한 마음을 한숨으로 내뱉었다.
“…….”
부모의 품에 꼭 잠겨있는 로엘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덜컹이는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거대한 성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만 전해 듣던 중앙, 바리엘의 심장이었다.
* * *
진은 서류를 테이블로 가볍게 내던졌다. 털썩. 작은 소리였지만, 좌우로 정렬하여 앉아있는 관료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들렸다.
황태자의 심기가 상당히 안 좋다는 걸 인지한 자들이 모두 탁자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럴 때 눈 마주치면 괜히 고생인 것이라.
“건의를 올린 게 누구인가?”
“저, 접니다. 전하.”
“마법부 별채 건설을 중단하라고?”
톡톡, 진은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느릿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행정부의 장관, 퀸타나가 새로이 키우고 있는 인재라 전해 듣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아주 퀸타나 젊었을 적 하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어째서?”
“어, 예, 옙! 그, 보고서에 기재했습니다만, 마법부 별채에 들어가는 공사 대금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건축이라는 것이, 공기(工期)에 비례하여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완공을 앞두고는 있으나 버고스에서 들어오는 마력석 양이 점점 줄어드니, 일단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적절한 시기에 재개하심이 타당하다 판단됩니다.”
“그래?”
“예, 전하. 무엇보다 이번 해에는 전하의 성인식 등 큰 행사가 몰려있는지라…….”
“예산은 10년 전, 착공할 때부터 넉넉히 나누어 배정하였다. 물가가 올라가면서 일부분 변동이 있을 순 있겠으나, 크게 무리되는 부분은 아닐 것인데?”
“아, 그것이-”
“안 그래도 부족한 마법사 수가 반 토막 난 지 어느덧 10년째라. 별채 지어주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가?”
“전하. 아닙니다!”
“그래? 아니구나. 그러면 혹여 이안 경이 다시 돌아오는 게 불편한 자들의 입김인가 보군.”
관료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오래전부터 자리했던 자들은 침묵을 택한 채 숨죽였고, 그사이 새로 부임한 자들은 지지의 뜻을 보내왔다.
황태자가 별채 건설의 뜻을 굽히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마법부 장관과 연관되어 있다더니, 진짜였나 보다. 사라진 지 오래된 자인데 기약도 없이 이 대체 무슨 짓인가? 막상 직접 보니 허황한 꿈에 매달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 맞았다.
어수선하게 섞인 뜻 사이에서, 진은 천천히 미간을 눌러댔다.
“대체 몇 년 주기로 이러는지, 원.”
“저, 전하?”
“이 정도면 기존 관료들 뜻도 마법부 별채에 반대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군. 새로운 자가 들어올 때마다 등을 떠밀어 대신 발언하게 하니, 떠드는 자는 달라져도 그 내용이 같아 신물 난다.”
“크흠. 아닙니다. 전하.”
“예. 오해이시옵니다.”
“10년 동안 마법부 별채 터를 보면서 어찌들 견디셨소? 대단들 하시오. 내 그것만은 칭찬하지.”
마법부 별채 건설이 지니는 타당성은 10년 동안 꾸준히 감소했다. 이안이 있었던 당시에도 반대가 극심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 뜻을 찾을 수 없는 게라.
오로지 황실의 권한으로 밀어붙이길 10년. 이제 그 끝을 볼 때가 되었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진은 단호했다.
“기각하오.”
“전하. 하지만 버고스-”
“성인식을 치르고 난 뒤, 내가 버고스로 직접 갈 것이다.”
진은 조용히 하라 일갈하며 천명했다.
버고스로 직접 간다는 게 무슨 뜻인가? 버고스를 바리엘의 휘하에 끌어오겠다는 것이요, 이는 진이 역사에 직접 등장할 때라는 것이고, 나아가 황제의 죽음을 시사했다.
오래도록 누워계시던 황제 폐하의 마지막이 보이는구나. 관료들이 수군거리며 눈빛을 나눌 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전하, 급서입니다.”
“이르라.”
진은 당연히, 황제인 아버지의 죽음 소식일 것이라 예상했다. 시아오시에게 일러, 회의 중간에 비보를 알리게끔 하였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다른 내용이 들려왔다.
“버고스에서 러더포드란 이름을 쓰는 자가 포착되었다는, 트웰러 장관의 급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