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3
제473화. 심연의 바다
황제 이안 베로시온은 바리엘에게 맹세했다.
여명이 터 오는 창문 앞에서, 싱그러운 나뭇잎 아래에서, 하루의 열기가 식어가는 단상 위에서, 언제나 바리엘 하나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걸 내어놓겠노라고.
한 줌의 숨결과 아스러지는 행복,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 따위를 바칠 것이니, 부디 바리엘은 그 갸륵함을 굽어살피어 온전한 채로 존재하고, 영원과 같이 굳건하게 서 있으라고.
황제 이안 베로시온은 자신이 신의 뜻이기를 바랐다. 자신은 부족하다고, 황좌에 올라서는 안 된다고 한뜻으로 외치던 자들이 아닌, 바로 자신이 신의 사자이길 바랐다. 그리하여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바리엘에 뜻되는 길이길 바랐다.
촤아아악-!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자들의 머리통이 사정없이 굴러다녔다.
붉은 융단 아래 피가 흥건하게 젖어들었고, 황제 이안 베로시온은 무력해진 몸으로 거칠게 반항하여 소리쳤다.
그만하라, 그만하라.
어찌하여 그러는가. 그만하라.
그럴수록 힘입은 반역자들은 더욱 신나게 황제 이안 베로시온의 수족을 잘라냈다.
손과 발이 잘리는 고통이었다. 누군가는 황제 이안 베로시온을 외치며 죽어갔고, 누군가는 처절한 외마디 비명만을 내지르고 죽었다.
울부짖는 자도, 초연한 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황제 이안 베로시온이 가져온 죽음은 그만을 비껴간 채 주위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폐하.”
익숙한 목소리. 이안 베로시온은 홀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나움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단정히 묶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게 꿈이었나? 크로니의 반란과 나움의 죽음 그리고 백 년 전의 바리엘로 갔던 것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나움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꿈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바리엘에게 버림받으셨어요. 그 때문에 모두가 죽고, 제가 죽고, 폐하도 이리 죽으신 것입니다.”
나움은 천천히 손을 뻗어 이안 베로시온의 목을 졸랐다. 서서히 조여오는 힘에 발버둥 치려는 것도 잠시, 이안 베로시온은 엉엉 우는 나움을 보고서 몸짓을 멈추었다.
그래, 역시나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부족한 나로 인해 삶을 도려냈으니, 울음이 무거운 게로구나. 나를 죽여서 그대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기꺼이.
“죽으십시오! 죽으십시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십시오! 그것만이 폐하께서 바리엘을 위해-!”
바리엘을 위해, 그리고 너를 위해.
친우야, 네가 나를 위해 죽는 것과 같이, 나 역시 너를 위해 죽겠다. 이안 베로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촤아아악!
무엇인가가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나면서 몸이 붕 떠올랐다. 자신을 죽이고자 울부짖으며 따라오는 나움. 백금발이 금발로 변했고, 뒤를 돌아보는 눈동자가 벽안에서 녹안으로 물들었다.
이안은 자신을 끌고 유영하는 자가 어딘지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황제이시여.”
“그대는…….”
비밀을 먹는 집시다. 노파의 볼에 팬 아가미가 끔뻑거렸고, 다리 없이 휘날리는 천은 지느러미를 연상케 했다.
문득 이안은 자신이 아주 기이한 장소에 와 있음을 알아챘다. 물속과 비슷하게 부력은 있지만 숨 쉬기에 무리가 없고, 사방은 어두운 곳. 오로지 은근히 빛나는 자신과 집시만이 깜빡깜빡 보일 뿐이다.
집시는 부드럽게 헤엄치며 웃었다.
“심연의 바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균열 아래 또 다른 세상. 우주의 비밀이 잠들어있고, 신의 힘을 어지러이 사용한 자가 갇힌다는 지옥.
이안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길이 없다. 위와 아래가 모호했고, 좌와 우가 섞여드는 미지의 공간이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러는 그대는 어찌 여기 있는가?”
“비밀을 먹고 사는 자인지라, 우주의 비밀이 잠든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없지요.”
솨아악-
집시가 앞서가자, 알게 모르게 시원한 바람이 이안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안 베로시온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서자 이안의 형상을 하고 있다. 공간의 개념만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 자체도 모호한 곳이구나.
“그러면 그대도, 그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 있겠군.”
노파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 이안은 그것이 그녀의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만날 사람이 있다.”
“심연에서 만난다라.”
“하여 함께 나갈 것이라.”
이안이 단호하게 선언하자, 노파가 멈칫거리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미 밖으로 보글보글 올라오는 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금 그것 아닙니까? 그대를 죽이려 했던 갈색 머리칼의 사내.”
“나움 오비아.”
“그래요, 그거. 보아하니 금기의 마법으로 심연에 잠긴 자 같은데, 경우가 다릅니다. 이안 그대는 직접 걸어 들어온 자요, 나움은 떨어진 자이지요. 그자를 데리고 나간다는 것은 곧 심연을 가이아로 끌어올리겠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안의 심장이 쿵쿵, 작게 요동쳤다. 할 수 있다고, 나의 세계에서는 나움을 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목이 콱 하고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노파는 이안의 주위를 맴돌며 경고했다.
“심연의 바다에는 모든 게 있습니다. 그대의 분노, 두려움, 고통, 절망, 상실. 존재했던 순간순간이 만들어냈던 모든 부정적인 게 그대를 덮칠 것입니다. 아까와 같이요.”
나움이 자신을 원망하고, 나아가 저주하고 있을 것이라는 내면의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었다. 방금의 나움은, 이안이 만들어낸 허상이자 자아였으니.
이안은 도움을 바란다는 듯, 노파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찌하면 되지?”
“인간이 바다를 이기는 법 있나요? 그저 물살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파도에 밀리고 밀려, 언젠가는 섬에 닿기만을 바라십시오.”
노파가 슬쩍, 이안의 손을 내려다보며 일렀다. 이것을 놓고 바다에 빠지거라. 그리하여 매 순간 밀려오는 바닷물을 타고 고통에서 헤엄치거라.
그 뜻을 알아챈 이안이 옷자락을 놓았다.
스윽.
천천히, 노파가 멀어진다.
아래로, 더 아래로, 심연의 바닥을 향하여 이안이 잠겨 들었고, 노파는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둠에서 뻗은 수만 개의 팔이 이안을 원한다며 아우성쳤다. 찰나의 순간에 그는 하나의 죽음 이상을 겪을 것이다. 그것이 심연에서 스쳐 지나가는 거품인 것도 모른 채 동화되어, 절망으로 점철될 것이다.
“아깝구나.”
아주 맛있는 비밀을 간직한 황제라. 존재만으로 의미가 있었는데, 얼마 안 가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노파는 쉬이 떠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한참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번쩍-
이안이 잠겨 든 그곳에서, 아주 작지만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노파는 아가미를 보글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잠수했다.
* * *
심연의 바다라는 말이 아주 적합했다.
고통은 파도와 같이 계속 밀려왔고, 숨 쉴 틈 없이 아픔을 선사했다. 그것은 살이 에이고 폐부가 비틀리는 육체적 고통이자, 세상이 무너지듯 심장이 아릿해지는 정신적 고통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이안 베로시온은 나움에 의해 몇 번이고 죽었다. 베릭은 흑갑옷에 의해 찢겨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으며, 진은 아르센의 수작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결했다.
하여 제국의 번성은 끊어졌고, 대지는 갈라졌으며, 제국민들은 스스로를 부정 탄 자라 모욕했다. 로만드로와 마법부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고, 부모는 낳지 말았어야 할 아이였다며 울부짖었다.
‘끝났나? 아아, 다시 시작이로구나.’
환영이 시작되면, 완전히 동화되어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오로지 환영과 환영 사이, 심연에 빠졌다는 걸 인지하는 찰나의 순간만이 온전한 이안 베로시온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정신이 풍화되어 무너지는 순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이 시간이, 사실은 노파가 떠나지도 않은 짧은 순간임을 이안으로선 알 길이 없었지만.
스윽.
그때, 뒤에서 자신을 감싸 안는 부드러운 손길. 살의(殺意) 없는 접촉이 낯설어, 의아했다. 이안 베로시온은 팔을 붙잡은 채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마주한 것은 금빛 머리칼에 녹안을 지닌 아름다운 소년, 이안이었다. 이안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이안!”
서자 이안이다. 처음 데르가 백작저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비쩍 마른 몸 상태, 피곤으로 패인 눈밑.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초췌한 피부. 하지만 반가움에 젖어있는 미소만큼은 환하여 눈부셨다.
이안 베로시온은 당황하여 그저 아이의 얼굴만 내려다봤다.
“이안, 여기까지 와주어 고마워.”
“서자 이안인가? 그대가 왜 여기 있는 것이지?”
대답 대신 아이는 이안 베로시온의 품에 고개를 파묻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당최 알 수 없었다. 사라진 서자 이안의 영혼이 어디로 갔나 궁금한 적은 있었지만, 그게 여기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혹시 이것도 환영인가?
하지만 이 환영은 저에게 어떠한 고통도 주지 않는데?
이안 베로시온은 아이를 몸에서 떼어내며 허리를 굽혔다. 아이는 이안 베로시온의 놀란 표정을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키득거렸다. 심연의 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명하고 순수한 웃음이다.
“…너, 나를 알고 있구나.”
이안 베로시온이 멈칫하며 중얼거렸다. 아이는 자신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나아가 자신이 아이의 몸에 들어선 것도, 그리고 여기에 당도하기까지 지나왔던 모든 여정도.
“나움 오비아가 내게 물었어. 너를 살릴 길이 없는지. 하여, 나는 내 몸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끝이 정해진 곳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강물과 같이, 역사의 흐름을 옳게 가져갈 존재였는데. 너라면 나 대신 충분히 그 몫을 잘 해내겠다 판단했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계속 궁금해하는 것 같더라.”
아이는 이안 베로시온을 다시금 껴안았다. 아주 사랑스러워서 못 배기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안 베로시온은 어색했지만, 그 행위가 영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러는 동안, 고통에 깎여간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환영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고.
“내가 뭘 궁금해한다는 거지?”
“네가 신의 뜻으로 존재하는 자인지. 하여, 바리엘에 있어 옳은 선택인지.”
“나는-”
“걱정하지 말고, 존재해. 너는 내 뜻으로 시간을 거슬렀고, 이곳에 왔으며, 앞으로도 옳은 길만 걸을 것이니.”
반짝. 아이가 손바닥을 건넸다. 그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호박색 보석, 이드갈. 어서 받으라는 듯 아이가 손짓하자, 이안 베로시온이 움찔거렸다.
“그 말은…….”
이안의 손에 닿은 이드갈은 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보기 좋다며 환하게 웃는 아이. 이안 베로시온은 조금씩 희미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가 신이라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