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4
제474화. 신과 나눈 대화
신(神)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대가 보는 하늘의 구름 한 점과 노인의 미소, 밟혀 죽어가는 개미, 윽박지르는 누군가의 괴성, 심지어는 전쟁의 핏물 속에도.
신(神)은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옳게 이끌 수 없었다. 하늘의 구름 한 점을 밀기 위해 바람이 되어야 했고, 노인의 미소가 되기 위해 아이의 미소가 되어야 했으며, 죽어가는 개미가 되기 위해 누군가의 발자국이 되어야 했다.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있는 것인데, 신(神)은 세상 모든 것이 되어갈수록 스스로를 잃었다.
하여, 신(神)은 모든 것이 되지 않되, 모든 것을 조율할 수 있는 작은 부분들이 되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존재하여 의지를 가진 채 살아가는 너였다. 그대가 지니는 선과 악은 조화롭게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흘러가, 세상을 옳게 만들었다.
서자 이안의 존재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안 베로시온.”
아이는 이안 베로시온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그 숨결이 따뜻하고 부드러워, 황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뻔했다.
“네가 나를 신이라 부른다면 나는 신이 될 것이고, 그저 변방의 작은 아이라 부른다면 작은 아이가 되겠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이든 간에 너의 존재가 의미 있고 당연하다는 사실이야. 이는 바뀌지 않는다. 나의 뜻을 잇는 바리엘의 황제야.”
분명히 역사에서 지워질 존재라 여겼다. 황제에 올랐지만, 그 어떤 발자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질 운명이라 여겼거늘. 신의 음성으로써 딛고 있는 이 세계가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물었다.
“정녕, 제 존재가 의미 있다면, 제가 무슨 결정을 내리고 행하든 바리엘에 이롭겠습니까? 신의 뜻 아래, 그대가 옳다 여기는 그 선에서.”
“물론이다.”
“그렇다면 옳은 것은 무엇입니까?”
“자연스러운 것이지.”
“…무너질 것 같으면 그대를 원망하며 짐을 내려놓아도 되겠습니까?”
“원망하되, 희망하라.”
아이가 톡, 하고 이안 베로시온의 볼을 두드렸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눈길이다. 저것을 어디에서 보았더라? 아아, 필리아가 자신을 보았던 것과 다르지 않은 사랑이구나.
이안 베로시온은 아이의 손등을 성스럽게 감싸며 그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점점 형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신께서 저를 떠나가시려는 게라. 이안 베로시온은 서두르며 질문했다.
“러더포드는 스스로를 신과 조율하는 자라 이르고 있습니다. 그자 역시 그대의 뜻입니까?”
“아아.”
아이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난감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퍽 재밌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이안 베로시온은 흔들림 없이 아이를 바라봤다.
“아니. 내 뜻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너에게 그림자가 있듯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나를 해치지 못하지만, 언제나 발치에 서성이며 존재하지. 내가 될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한심스러우면서도 가여운 것들.”
이안은 문득 마력확인식에서의 아르센을 떠올렸다. 신탁의 빛으로 완전히 지워진 악마의 그림자. 평소 그림자로 머무는 것들인지라, 성스러운 빛 앞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잃었던 게다.
“자연스럽지만 옳지는 못한 모순에 나는 서자 이안으로 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나움의 기도를 들었다. 하여, 우리가 이렇게 만났어.”
꽈악.
아이는 거의 투명해진 팔로 이안 베로시온을 끌어안아 속삭였다.
“러더포드와의 계약이 버겁다고 한들, 걱정하지 말라. 심연에서 너의 육신은 이미 수차례 죽고, 또 죽었다. 하지만 영혼만은 고귀한 황제의 그것 그대로지.”
전부 환영이 아니었나?
공간의 개념이 뒤틀린 것과 같이, 신체와 영혼 그리고 죽음의 개념까지 아득히 섞여버린 심연의 바다였는데.
그렇다면 러더포드와 계약으로 이어져 있던 몸이 죽어 없어졌으니, 이제는 그 제약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서자 이안과 러더포드 사이에서 정확히 무슨 계약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이드갈의 탄생 그리고 서자 이안을 구속하는 모든 게 신의 뜻이었단 사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이안 베로시온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의미 있는 것이지.
무엇보다 다시 한번 러더포드와 마주하게 된다면 직접 알아낼 수 있었고, 이안 베로시온에게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솨아아.
아이는 완연한 빛으로 사라졌다. 작게 휘날리는 반짝이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아주 익숙한 광경이 가까운 곳에서 펼쳐졌다.
“이안 님.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나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삶을 얻었던 그날이다. 그날의 지하 감옥. 나움은 녹슨 쇠사슬을 피가 나도록 긁어대며, 이안 베로시온으로 추정되는 것을 흔들어댔다.
자신은 여기에 있는데, 그대는 대체 무엇을 잡고 있는가. 제발 힘 좀 내라고, 마법부 별채로 가야 한다고, 신께서는 언제나 답 없는 문제를 내려주지 않는다고 이르는 음성이 기억과 하나 다를 것 없었다.
이안 베로시온은 천천히 다가가 나움을 들여다봤다. 가까이 갔음에도, 자신의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 매몰된 것처럼.
‘아.’
이안은 나움의 눈을 들여다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절망에 갇히되, 원망 따위는 한점 없는 눈빛이다. 그날의 자신은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저걸 보지 못했던 것일까?
희미하게 웃음 짓는 나움의 뒤로, 크로니가 들이닥쳤다.
“아! 나움!”
조심하라고, 이미 보았던 죽음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곳에서 너를 구하고 싶다고, 이안 베로시온은 손까지 뻗어대며 소리쳤다. 나움 역시 그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화들짝 놀라며 정면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시간을 넘어, 차원을 넘어 다시금 마주한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를 인식했다.
촤아아악!
하지만 파도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나움을 태우는 불길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이 타오르고 이내 고통스럽다는 듯 앞으로 고꾸라져 비명을 질러댔다.
“나움!”
“으아아아아!”
너를 여기서 구해주마. 더는 영원의 죽음 속에서 고통받지 않게끔, 내 그리 구해주마. 이안이 몸을 던지려고 하자, 나움이 비명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온전해 보이시어 다행입니다, 폐하.”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고, 환영이 아닌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을 경이로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데 있어 안도했다.
이안은, 차마 손을 다 뻗지 못한 채 멈추었다.
신께서는 자연스러운 것을 옳은 것이라 하였다. 금기의 마법을 쓴 나움이 이곳에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니, 옳은 것이다. 더해 내 선택이 당신의 뜻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 돌이 들어앉은 기분인가? 나움을 꺼낸다는 것은, 심연을 가이아 밖으로 꺼낸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집시의 충고가 생각나서일까?
심연이 밖으로 흘러나가면, 바리엘은 어떻게 되는 거지?
“폐하.”
나움은 차마 이안 베로시온의 손을 잡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와 그 아래 엎드렸다. 그의 주위로 불길이 치솟고, 살이 저절로 베였으며, 낭자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지만, 나움은 익숙하다는 듯 초연하게 참아내며 일렀다.
“이안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을 지키세요. 우리의 시간은 여기서 멈추었으니, 역사 또한 멈춘 것입니다. 쓰이지 않았기에 지워지지도 않았습니다. 폐하. 지키세요.”
이안 베로시온은 무릎 꿇어 나움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자신을 대신하여 타오르는 형벌이기에, 오로지 나움에게만 허락된 벌이었다.
“…시간이 흘러, 너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하면 나는 다시 너를 만날 것이고, 그때는 실패하지 않겠다. 나를 따랐던 모든 자의 신의를 그대로 지켜내겠다. 맹세하여,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여 이루겠다.”
“예. 설령 그것이 지금의 제가 아닐지라도, 그자 역시 나움이니 전하의 벗이 될 것입니다.”
“아니, 너일 것이라.”
돌아가서, 세상을 신이 바라는 대로 옳게 이끌면 우리의 그날이 다시 이어지고, 너의 존재 또한 부정할 수 없게 존재해야 하니, 분명히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나는 그리 믿어. 그러니 너도 믿어라.
이안 베로시온이 단호하게 이르자, 나움이 환하게 웃었다.
“폐하. 더 단단해지셨습니다.”
“그대 덕에 삶을 계속 살아왔으니.”
“그렇군요. 아, 다행입니다. 앞으로의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솨아아.
또, 나움 역시 아이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한 번의 죽음이 끝나고, 다음 죽음을 위해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나움은 이안의 손을 꽉 잡은 채 인사했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부디 안녕하십시오.”
그대도 너무 아프지 말라 이르고 싶었으나, 이안은 말을 삼켰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움은 잿더미로 변하여 심연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떠돌고 떠돌다, 그날을 반복하겠지.
꽈악.
이안은 온기조차 남지 않은 손바닥을 꽉 쥐었다.
한 시라도 여기서 빠져나가, 바리엘 역사를 흔들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베고 베어내어, 신께서 바라시는 옳은 그 길로 나아가리라. 하여, 이안 베로시온과 나움 오비아가 살았던 그 시간대를 새로이 열겠노라.
사아아악.
이안 베로시온이 헤엄쳐 위로 올라갈 때마다 모습이 변하였다. 긴 백금발의 머리칼은 찬란한 금발로, 하늘과 같던 벽안은 싱그러운 녹안으로.
황제에서, 변경의 그 작았던 아이로.
“아이고!”
무슨 일인가 싶어 아래로 내려왔던 집시가 이안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위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신과 황제의 대화를 엿들은 죄일까, 그녀의 배는 곧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헐렁한 천 아래에서도 그 흉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였다. 몸이 무거운 터라, 집시는 쉽게 속도를 내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생각보다 버릇이 안 좋아. 낸 적 없는 것을 훔쳐먹다니.”
“아, 그게-”
“맛은 있었나?”
이안은 집시의 어깨를 잡아채어 몸을 바짝 붙였고, 집시는 아가미만 뻐끔거리며 웃었다. ‘말해 무엇하나요, 호호.’ 하는 표정이다.
“여기서 나갈 것이다.”
지이이잉! 지잉!
이안은 마력을 발동하여 집시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이곳은 가이아가 아닌, 심연의 바다. 집시의 배가 갈린다 하여도 세상이 혼란에 빠질 염려는 없었다. 모두 이 아래로 잠겨버릴 테니까.
“여기서 함께 나가든, 아니면 함께 잠기든. 선택은 그대가 해. 낸 만큼은 지불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길만 안내할 수 있습니다. 나가는 것은 오로지 그대의 몫이오니.”
“좋다. 그리고 그 전에, 알고 싶은 게 있다.”
집시는 금안으로 번뜩거리는 이안의 눈동자를 보곤 신이 건네준 보석을 연상했다. 포식자만이 지닌다는 짐승의 눈동자.
“나를 찾은 것처럼, 이곳에 함께 떨어진 것들도 찾을 수 있지? 러더포드. 그리고 그 일당들.”
이안이 나갈 수 있다면, 그자들도 나갈 수 있다. 특히나 러더포드는 심연에 두 번째로 들어선 자였다. 이미 한 번의 경험으로, 먼저 탈출에 성공했을지도 모르겠다.
집시는 한숨만 내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곤 잘 붙잡으라는 듯이, 힘차게 하체를 움직이며 헤엄쳤다. 배가 너무 부른 탓에 속도가 조금 느렸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