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5
제475화. 두 번째 심연
끔찍한 불균형.
러더포드는 자신을 덮치는 이 기이한 불쾌감에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수백 년 이상을 넘어,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런저런 몸을 빌려 기생했고, 존재했다. 영혼이 풍화되어 반도르라는 이름이 희미해질 때도, 심연에서 느꼈던 이 감각만큼은 뇌리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되, 혐오스러운 감각만이 남아있는 존재를 대체 무엇이라 명명해야 하나? 러더포드는 심연이 곧 자신인 것 같은 절망과 공포 그리고 무력감에 패배하여 오래도록 울었다.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러더포드 님, 괜찮으십니까?”
“여, 여기가 균열이라고?”
“세상에, 대체 심연이라는 건…….”
“섣불리 멀어지지 마라! 러더포드 님과 떨어져서는 아니 된다! 다들 자세를 바로 해서 모여!”
“시체들도 몇몇 함께 넘어왔습니다!”
“흘러가게 버려두어라. 산 자만이 러더포드 님을 따를 것이다. 죽은 자들은 죽음 너머에서 제 몫을 다하겠지. 이쪽으로, 어서!”
“젠장, 보물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어어? 저, 저게 무엇입니까? 무언가가 접근합니다!”
“뒤로 물러나! 물러나라고!”
사념에 빠졌던 러더포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심연의 바다로구나. 이안, 그 망할 것이 다 죽어가는 몸으로 좌표를 잘도 찍었어.
러더포드는 부하가 환영에 붙들려 끌려들어 가는 것을 돌아보았다.
“으아아아!”
한 발자국 뒤로 멀어진 자들에게는 희미한 형상이었으나, 본인에게는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지옥일 터라.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죽여달라 싹싹 비는 모습에 당황한 것인지, 부하들은 러더포드로부터 뒷걸음질 치며 서로 달라붙었다.
“뭐, 뭡니까? 저것이.”
“각자에게 존재하는 지옥. 그 지옥이 모여 잠겨 든 게 심연의 바다다.”
“그, 그러면 어떻게…….”
“내버려 두어라. 고작 해 봐야 미쳐버릴 뿐 죽지는 않을 것이니. 그보다, 지금 마법사가 얼마나 남아있지?”
“저를 포함해서 다, 다섯 정도입니다.”
“기용 가능한 마력은?”
“황궁에서 마력 소모가 심해, 거의 바닥입니다.”
“흐음.”
러더포드는 머리칼을 넘기며 고민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균열 아래 심연. 금기의 마법으로 떨어진 게 아니니,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과거의 반도르가 그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리되면 문제가 생긴다.’
바로, 러더포드의 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균열을 벗어났던 반도르는 낯선 자의 몸에 들어선 뒤, 영원한 죽음의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리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셀 수 없이 많은 환생 끝에, 서로 어긋나기만 하던 운명의 톱니바퀴가 이제야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지금을, 이 몸을 놓친다면, 하여 다시금 죽음을 맞이해 다른 시간대에서 눈뜨게 된다면, 그는 정말이지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러더포드 님. 그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 일러주십시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마법사들이 러더포드를 둘러싸며 매달렸다. 그 눈빛에는 맹목적인 믿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균열 아래 심연은 진정으로 존재했고, 이곳에서 살아 돌아왔던 자가 바로 그들의 주인, 러더포드였다. 이토록 멋진 일이 또 있을까?
미지의 세계에 두려워한 것도 잠시. 마법사들은 그들의 근원적인 존재와 연관되어 있을 심연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둘러봤다. 그러는 사이에도 서로 가까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때?”
러더포드는 부하들의 물음에 빛바랜 그날을 떠올렸다. 정확히 어느 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불현듯,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신의 음성.
‘네 울음이 내게 흘러왔다.’
한 줄기 빛과 같은 음성이었으나, 반도르는 기뻐하는 대신 거친 비난만 쏟아냈다. 자신이 정녕 신과 가까운 자가 맞는지, 맞는다면 어찌하여 자신을 이렇게 둘 수가 있는지, 참으로 무심하시어 원통하다는 비난.
“러더포드 님?”
“아.”
마법사들은 러더포드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재촉하여 그 옷깃을 붙잡았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건만, 그만큼 새로운 환경이 주는 위압감이 강했던 것이라.
러더포드는 옆으로 고갯짓을 하며 일러주었다.
“심연은 공간과 시간이 얽혀있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가 없지. 헤매고 헤매면 어느 순간 균열에 도달할 수는 있는데-”
“균열이라 하시면?”
“가이아 대지와 심연 사이, 마물이 생성되는 곳.”
심연을 벗어났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마물의 태초라 부를 수 있는, 균열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갈 길이 생각보다 멀다는 걸 깨달은 마법사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환영에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 특히 마법사들. 마법사들은 문제가 생겼을 시 서로를 도와주어 벗어나도록 해. 이곳에서의 죽음은 곧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력을 잃게 된다고. 나처럼.”
그 말을 들은 마법사들이 환영에 잡혀버린 동료를 급하게 살폈다. 다행히도 마법사는 아니었다. 어떻게 되어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게거품을 문 채 그대로 기절한 상태였다.
“그러면 심연에서 균열로 무사히 이동하는 게 우선이겠군요. 혹 길이 있습니까? 아니면 떠도는 수밖에 없습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 무언의 바람을 읽어낸 러더포드가 작게 한숨 쉬었다. 그때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지도 않을 것이다. 혹여, 신께서 저놈들에게 저와 같은 기회를 준다면, ‘러더포드’라는 이름 아래 모인 결집의 힘이 깨질 테니까.
“아니, 당장이라도 나갈 수는 있지.”
“역시!”
“이안이 열었던 포탈. 가이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심연에서 균열로 한 단계 올라설 수는 있다.”
그러니, 어디 누가 한번 열어볼 테냐? 러더포드는 느긋한 눈짓으로 마법사들을 종용했다.
당황한 마법사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각자의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저는 정말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마찬가지. 아까 황궁 마법사들과 대적하느라 다 썼어. 회복되려면 적어도 이틀은 필요할 것 같은데.”
“이틀이라. 여기도 하루의 개념이 있습니까?”
“지금 좀 밝은 것 아닌가? 주위에 빛이 돌잖아.”
“잠깐, 그래서 다들 하나도 없으시다?”
“황궁에서부터 포탈은 무리였어. 그리고 열 수 있다 하더라도 그다음이 문제지. 심연 위로 올라서면 균열이니까, 마물들과 맞서야 한다고.”
“맞아. 충분한 마력 없이는 몰살이다. 어떤 놈들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러더포드 님. 일단 힘이 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균열로 올라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마법사들은 얼추 의견을 모았는지, 러도포드의 허락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그들의 수장은 참으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감정.
“바다에 오래 잠겨있으면 필시 보이지 않는 위험을 만나게 된다. 그 전에 서둘러 피하는 게 좋아. ‘저것’처럼 되기 싫으면.”
러더포드가 가리킨 것은, 환영에 당해버린 자의 ‘껍데기’였다. 정신을 잃고서 축 늘어진 채 영원히 주위를 맴도는 그것은, 익사한 시체의 모습과 같았다.
그렇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마법사들이 답을 내어달라는 듯 침묵하자, 러더포드가 손끝을 튕겼다.
사아악.
그 끝에서 몽글몽글 솟아나는 금빛의 용암. 흘러내린 알갱이가 굳어버리면서 이드갈의 형태를 만들었다. 러더포드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내게 마력은 없으나, 이것이 있다. 대체 다들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하지만, 회복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불가합니다.”
“금기의 마법을 사용해라. 이중 누가 희생할 테냐.”
“……!”
러더포드는 심연 바닥으로 가라앉는 이드갈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한 명의 희생으로 모두가 균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이곳은 언제든지 당도할 수 있는 일종의 다른 세계.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구하러 올 것이다. 우리가 여기 온 것. 그리고 내가 두 번 온 것. 이 모든 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방증이니.”
러더포드는 마법사가 아니니 제하고, 남은 자 중에서 지원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황궁에서 러더포드를 위해 사지를 내어놓았던 자들은 모두 죽었고, 이곳은 낯설고 위험한 곳이었으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정신을 빼앗긴 채 유영하는 몸뚱어리밖에 없건만, 홀로 남으라니? 쉽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러더포드는 침묵한 채 눈만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함이 무겁게 휘몰아치는 세계.
“…내 뜻이 아니다. 신의 뜻이다.”
러더포드는 신과 소통하여 세상을 조율하는 자. 그 증거로 신께서는 이드갈이라는 물질을 세상에 내려주어 마법사들을 복종하게 하였고, 신만이 관장하는 삶과 죽음, 그 권능의 일부분을 러더포드에게도 하사하였다.
다몬 왕이 그러했고, 지금까지의 러더포드가 그러했으며, 앞으로는 자신들이 그러할 것이다. 살아나고, 또 살아나고,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삶.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고민하던 마법사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자청했다. 주위에서 희미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고, 러더포드는 이드갈을 쥔 손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금기의 마법이지만, 이곳이 그 목적지인 심연이니 문제없는 것이겠지요? 꼬, 꼭 돌아오시리라 믿습니다. 러더포드 님. 꼭…….”
러더포드는 믿으라는 듯, 미소만 지었다.
사실 금기의 마법으로 남겨진 자를 밖으로 데려가는 법 따위, 모른다. 하물며 심연에서 금기의 마법을 쓴 자가 어찌 될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하나,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사사로운 게 아니지 않나? 심연과 바깥은 시간의 흐름이 상당히 달랐으니, 서둘러 돌아가 위업을 잇는 게 그의 계획의 전부였다.
“나만 믿거라. 그대의 희생을 내 깊이 새기지.”
“…예. 영광으로, 영광으로 받들겠습니다.”
마법사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제 팔을 그었다. 피가 뚝뚝 떨어짐과 동시에 발하는 금안. 마법사들은 뒤로 물러섰고, 이내 그 주위로 시커먼 것이 울컥울컥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지잉!
솨아악!
“으아아아악!”
“이런, 젠장!”
이안이 보였던, 반듯한 검은 달이 아니었다. 마치 물에 젖어 일그러진 검은 흔적과 같다.
마법사들은 괜찮을까 싶어 러더포드를 돌아보았고, 그는 솔선수범하여 앞으로 다가섰다. 이것만 넘으면 처음처럼 그리 고생하지 않고 균열로 올라설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단 하나의 죽음 없이도 벗어날 수 있음이라, 문제없다.
스윽.
그 순간,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이한 흐름. 마력이 없는 러더포드마저 감지할 정도였으니, 마법사들이 알아챈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들은 동시에 한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멀리서-
“러더포드 님!”
거대한 무엇인가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빛이 스쳐 지나가는 걸 눈으로 본다면 이런 것일까? 마법사들은 자신들 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마력을 눈으로만 쫓아 고개를 틀었다.
퍼어어엉-!
콰직! 콰지지직!
엄청난 위압감이 응축된 채 내려 찍히는 공격.
이에 금기의 마법으로 불러낸 포탈에 금이 가더니, 이내 한꺼번에 박살 나며 산산이 조각났다. 검은색 파편이 주위에 휘날렸고, 러더포드는 놀란 눈으로 근원을 찾았다.
‘이안?’
촤아아악!
엄청난 속도로 이안이 다가오고 있었다.
러더포드는 이를 아득거리며 크게 표효했다.
“이안-!”
더 이상의 방해는 용납할 수 없다. 신께서 말씀하신, 네놈의 육신 덩어리 따위,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게라. 차라리 죽여서 갈기갈기 찢긴 걸 가져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안 되겠다.
러더포드는 계약 마법을 발동하여 그의 심장을 쥐어 잡으려고 했다.
솨아아악!
하지만 진명 따위 통하지 않는다는 듯, 한순간에 바짝 붙어 내린 이안.
러더포드의 머리칼이 잠시 그의 시야를 가렸고, 이내 앞이 보였을 땐 백금발에 벽안인 자가 살벌한 눈빛으로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가.”
“너-”
지이잉! 지잉!
이내 금빛으로 순식간에 물드는 벽안.
러더포드는 저 모습이 서자 이안 안에 있던 영혼의 모습인 걸 알아챘다. 계약 마법이 끊어졌나? 그렇다면 환영에 붙들려 육신이 죽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죽었는데도 마력을 유지할 수 있지?
꽈악.
지이이잉!
이안은 러더포드의 머리채를 붙잡고서 그대로 마력을 개방했다. 차가운 시체가 되어 심연의 바다를 떠돌거라. 사지가 제각각 흩어져 영원히 헤매거라.
이안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으며, 러더포드 눈에 비친 자신을 살폈다.
“러더포드, 내가 누군지 궁금해했지.”
놈의 눈에 비친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바리엘의 황제, 이안 베로시온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