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6
제476화. 그림자
존엄한 자. 러더포드가 마주한 백금발 청년의 첫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찬란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칼 때문일까, 아니면 심연보다 깊어 보이는 눈빛 때문일까. 살기(殺氣)를 명백히 지니고 있음에도, 성스러운 기백에 무력화되는 기분이었다.
시선이 맞물리는 찰나의 시선 속에서, 러더포드는 이안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러더포드 님!”
솨아악!
지이이잉!
아, 이번에는 진짜 죽는다.
마법사들이 도와줄 틈 따위 없었다. 이미 이안과는 근거리였고, 금빛으로 일렁이는 마력은 러더포드의 목덜미 바로 밑까지 치고 올라왔으니.
죽는다, 죽는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다.
수백 번의 죽음을 지나고 나서 더는 이에 관한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다. 죽음이라는 그림자에서 인간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 미련이 그득하여 삶이 무거워질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하였지.
‘지금’을 놓치면 돌아올 ‘다음’이 언제일지, 러더포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연금술이 가능한 러더포드의 몸, 신께서 일러준 마법사 이안, 전쟁으로 휘몰아치는 세계. 그리고 어린 황자만이 존재하는 바리엘.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인 상황을 겨우 만들어놓았거늘, 죽음으로 허무히 떠나보내는구나.
“러, 러더포드 님!”
“안 돼에에!”
퍼어엉! 퍼엉!
촤아아악!
심연의 바다, 그 미지의 공간으로 거센 바람이 틈 없이 들어찼다.
이안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뜨겁게 터지고, 서늘하게 움직이던 마력이 아직 생생했다. 달을 파훼하던 감각과 심지어는 러더포드의 살을 찢어 파고들던 감각까지도.
그런데 어째서, 이런 느낌이지?
“하아, 하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상실의 감각이다.
이안은 검은 달 조각과 알 수 없는 불순물로 엉망이 된 주위를 둘러봤다. 러더포드는? 러더포드의 사체 조각은 어디로 갔나? 아니, 그 전에 산산이 찢긴 게 맞나? 참으로 기이하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던 이안은, 저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집시를 발견했다.
“……?”
마치 이상 징후를 감지한 날짐승처럼, 그녀는 오차 없는 궤만을 그리며 한 곳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의도는 모르겠다만, 이안에게 무엇인가를 일러주기 위함이라. 하여, 이안은 경계를 풀지 않고 마력을 계속 유지했다.
솨아아아-!
“……!”
날카롭게 서 있던 감각이 심연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했다. 불순물과 달 조각이 무언의 힘에 이끌려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투명한 물살이 형상을 만들어냈고, 조각들은 그 형상을 보다 가시적으로 보이게끔 결집했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마법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저것은, 분명히-
“헉!”
“어, 얼굴이다.”
산 하나가 우뚝 솟은 것과 같이 거대한 크기. 이목구비가 확실히 구분되는 인간의 머리다.
저것도 심연의 환영인가? 마법사들은 두려움에 잠식되어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고, 오로지 이안만이 담담하게 그것과 마주했다.
“이안.”
그것의 목소리는 깊고 묵직하여 심연의 바다를 크게 울렸다. 솨아아, 이안의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갈 정도로.
“저, 저게 뭐지?”
“러더포드 님! 어디로 가셨습니까? 서, 설마 저희를 버리신 것은 아니지요? 저희를 두고, 가, 가신 것은 아니지요? 대답해 주십시오!”
“살려줘! 제발 살려줘!”
마법사들이 울부짖으며 호소하자, 그것이 입김을 가볍게 불어냈다. 물결이 사납게 출렁였다.
그 속에 반쯤 잠긴 러더포드. 이안의 공격으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정신을 잃은 것일까? 축 늘어진 몸 선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이안.”
지이이잉.
이안은 마력으로 검날을 만들어내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저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황제 이안으로서 존재하는 지금, 이름을 함부로 부르게 둘 수 없었다.
“…네놈이 러더포드를 구했나?”
“그렇다.”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처신도 건방지구나.”
러더포드는 이안이 베어야 할 존재. 그런 러더포드를 구했으니, 네놈 또한 베여야 할 것이다. 이안이 자세를 바로 하여 낮추자, 그것은 크게 웃어댔다.
“건방진 것은 네놈이다, 이안. 감히 신 앞에서.”
신? 이안의 미간이 움찔거림과 동시에, 지켜보던 러더포드의 마법사들이 환희를 쏘아 올렸다.
러더포드는 신과 소통하여 세상을 조율하는 자. 그를 따르던 믿음이 결실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신께서 강림하셨으니, 분명히 저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 심연의 바다에서 벗어나, 그 뜻을 잇고 위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
“…….”
반면, 이안은 기가 찬다는 듯 마력 검을 어깨에 걸쳤다. 방금까지 ‘신’과 마주했던 자신 앞에서, 그 이름을 운운하다니.
이안은 ‘저것’이 신께서 말씀하신 ‘그림자’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신이 되고자 하는 어리석은 것 말이다.
“멀리 갈 것 없어 좋다.”
지이잉!
이안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중얼거렸다.
러더포드도 저기 있고, 그림자 또한 저기 있다. 심연 밖으로 나가 추적할 필요 없이 이곳에서 끝장을 내자. 그리한다면, 나움의 고통 역시 금방 끝나리라.
베릭과 로만드로, 진, 시아, 마법부 모두를 보지 못하는 건 가슴 아프지만, 자신이 응당 걸을 길이라면 괜찮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태초부터 그려온 신의 뜻에 인간 하나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나의 아이들아. 저 하찮고 작은 것을 죽여라. 죽여서, 육신을 내게 바쳐라. 그리하면 내 심연의 바다에서 가이아까지, 길을 일러주마.”
우웅, 그림자의 목소리는 파동을 지닌 채 마법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서서히 고개를 틀어 이안을 바라보는 마법사들.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하지만, 신의 명령 역시 분명했다.
지이잉!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마력을 개방하자, 이안은 의아하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형상이 경이롭기는 하나, 고작 그것만으로 저것을 신이라 믿는 것인가? 자신들의 신께서는 더욱 따뜻하고 다정하신데.
이안은 마법사들을 향하여 꾸짖었다.
“어리석다. 러더포드를 구했다고 하여 저것을 신이라 믿는 것인가?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이거늘.”
“닥쳐라! 저것이라니! 네놈도 마법사이면서 어찌 권능에 도전하는가?”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라. 하나로 이어지는 신의 뜻을, 어찌 거스르려고!”
이안은 마법사들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합리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었다.
이곳은 심연의 바다. 마물이 생성되는 균열 아래 존재하여, 그 어떤 사특한 것이 나온다 한들 자연스러운 곳. 그런데 그저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저것을 신이라 믿는다?
‘…정신 지배.’
아르센 사태와 같았다. 마물의 목소리가 저들을 파고들어,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하게 만든 것이다. 반도르의 경우, 황폐해진 상태에서 저것과 마주했으니 더더욱 깊고 단단하게 걸려들었을 터.
이안은 어째서 신께서 자신을 선택했는지 깨달았다. 황실의 축복을 받은 마법사라, 그림자에 현혹되지 않고 오롯이 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서 이안을 죽여라. 죽여서, 그 몸을 내게 가져오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영원한 생명과 죽음, 이 무한한 굴레로부터 너희를 해방하리라.”
지이잉!
타앗! 촤아아악!
그것의 재촉에, 마법사들이 이를 꽉 깨물고 이안에게 덤벼들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았고, 와중에 그들의 힘은 바닥이었지만, 신께서 명령하시니 이행할 수 있었다.
금빛 눈동자를 지닌 자들이 좌우로 나뉘어 날아오르자, 이안은 보호막을 펼쳐 가볍게 그들을 저지했다.
터엉!
퍼어어엉!
“의심하고, 생각하라. 저것이 진정 신이라면 우리의 근원이니. 그대들의 바닥난 마력을 순식간에 차오르게 할 것이다. 애써 나를 죽이라 명할 것 없이, 부름 하나로 내 목을 비틀 것이다.”
“시끄러워! 저것이라니, 어디서-!”
“으아아악! 죽어라!”
황궁에서 모든 걸 쏟아냈지만, 온전한 자신을 보라. 지옥이라 이르는 심연의 바다에서 모든 걸 치유한 자신을 보라. 이안이 친절하게 일러주었으나, 그림자에게 잠식당한 마법사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젓곤 그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촤아악!
마력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어 오르며, 마법사들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단출한 합을 셀 때마다 마법사들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마력이라는 힘으로 존재하는 감각의 핏줄들. 이안은 그들을 베는 게 유쾌하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 이들의 행동이 그림자의 세뇌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하하하!”
이내, 이안이 모든 것을 베어내고 홀로 서 있게 되자, 그림자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젖혔다.
둥둥 떠다니는 마법사들의 시체. 놈은 깊게 숨을 들이쉬어 마법사들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역시, 별미다! 하하하!”
신의 힘을 빌어먹는 법도 다양하구나.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턱 끝으로 떨어지는 땀을 훔쳐냈다.
마법사들은 신과 가장 가까운 자. 그 힘 역시 신의 힘과 다를 바 없으니, 그림자는 그것을 먹음으로써 나름의 권능을 유치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방금 먹은 자들도 반도르와 같이 심연의 저주를 받게 되나? 영원히 계속되는 죽음 말이다.”
“어찌 심연의 저주라 하지? 그것은 내가 반도르에게 내려준 축복이거늘.”
육신과 영혼이 풍화될 상황에서, 반도르는 선택받았다. 그림자가 처음 마주한 마법사였기에.
신이 이안을 내세운 것과 같이, 그림자 역시 반도르를 앞세워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적당한 시간선까지 닿기 위하여, 죽고 또 죽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을 뿐.
“힘만 앗아 내어 되살렸고, 인간이 제일 두려워하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그만한 축복이 어디 있는가?”
이제 여기에는 너와 나밖에 없다고, 이안은 솔직하게 말해보라는 듯 마력 검을 겨누었다.
“서자 이안의 육신을 탐한 게 사실인가? 그 몸은 신께서 가이아로 현현(顯現)한 육신. 지하를 기어다니는 네놈이 탐욕하기에 아주 적당하다 여겨지는데.”
이안과 러더포드의 만남은, ‘신’과 ‘그림자’가 맞부딪치는 운명의 접점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어째서 러더포드가 계약 마법만을 맺고 서자 이안을 돌려보냈느냐는 점이다.
물론 신께서는 서자 이안이 자유로워야 역사에 개입할 여지가 생겨나기에 그리 조절하셨겠지만, 그림자 입장에서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네놈의 안배라 보기에는 어렵고,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겠군.”
‘안배’라는 것은 오로지 신의 이름 아래에서만 행해지는 것. 놈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떠한 ‘사정’일 뿐이니.
그림자는 천천히 목을 빼내어, 이안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거대함이 실로 압도적이다.
“신과 내가 무엇이 다르기에, 네놈은 나를 그리 대하는가?”
“…무어라?”
“신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나 역시 어디에나 존재했다. 신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나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신께서는-”
“신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 이제는 나 역시 믿음으로 살아간다. 신과 내가 다를 바 없거늘, 네놈은 어찌하여 그리 일러!”
가이아 대지 아래 존재하는 의문의 신이라. 믿음을 얻고 있다는 그 말에, 이안은 뭔가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서자 이안이 어렸던 그 시절, 육신을 얻는다고 하여도 놈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저놈의 말에 따르면, 인간들의 믿음이 미미했을 터이니.
“…너, 지하신(地下神)이로구나.”
토올룬에서 시작된, 이단 중 역사에 가장 깊이 흔적을 남긴 신흥 종교. 거기서 믿음을 먹고 근원을 다졌던 그림자는 점차 바리엘로 다가서고자 하였고, 그 과정에서 버고스가 들어선 것이었다.
그림자는 걸쭉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정답을 맞혔노라고, 농락하듯이.
“지하신. 인간들이 나를 부르는 수많은 이름 중 하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