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7
제477화. 남겨진 기회
토올룬을 근원으로 부흥했던 신흥종교.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여 가이아에 종교 전쟁을 가져오고, 하나로 이어지는 신의 믿음 중 큰 갈래를 앗아갔던 세력이다.
이안은 지하신 외 이단으로 불리는 모든 존재가 ‘그림자’임을 알아챘다. 그리하여 어째서 저것이 신의 그림자인지를 정확히 인지했다.
신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존재함으로써 신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모순적인 관계. 하여, 건방지게도 그림자는 스스로를 신이라 이르는 게다.
“…수많은 이름 중 하나?”
이안은 천천히 마력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들어서 있는 운명의 굴레를.
“마물 속성을 지닌 주제에 신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구나. 과분하다.”
지진을 유발한 모든 정황이 이해되었다. 지하에 심장부를 둔 놈인지라, 가이아 밖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그 길이 유일했다.
바리엘을 위협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 제국은 신의 축복을 온전하게 받는 나라였으니, 신을 이루는 중요 근간 중 하나다.
저것을 보고 있자니, 신께서 이드갈을 만든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졌다. 현존하는 마력봉인석은 희소성이 강하여 범람하는 마물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
이드갈은 마법사를 위협하는 물건이었지만, 동시에 마물을 억제할 새로운 수단이었다. 마력봉인석과 달리 이드갈은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만들고 없앨 수 있었다. 역사를 조율하기에 알맞다.
“나를 베겠다고 검을 들었는가?”
지하신이 낄낄거리며 이안을 내려다봤다. 저것이 보기에, 이안은 아주 하찮은 개미 한 마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지 밟아 죽일 수 있는, 그런 존재.
“…알고 있다. 내가 너를 벨 수 없다는 걸.”
신이 존재하는 이상 저것 역시 존재한다. 헛된 믿음을 가진 인간이 모두 죽지 않는 이상, 저것의 힘 역시 줄어들지 않을 터. 이안은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지하신을 절대 처치할 수 없다는 걸.
“하지만 너와 마주한 이상, 나는 너를 베기 위해 모든 걸 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신께서 내게 내려주신 소명이고, 내가 이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네놈이 베이지 않는 건 중요하지 않아. 그저 난 할 일을 하는 것이니.”
“어리석긴. 신을 믿는가? 반도르를 보아라! 신과 가까운 마법사라 여기던 게 무색하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너 또한 그리되리라. 허황 속에서 살게 되리라.”
“나는 신을 믿는다.”
지이잉! 지잉!
촤아아악!
이안의 검기가 폭발했다.
금빛 눈동자와 닮은 마력 검이 크게 일렁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심연의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 등불이다. 작지만 분명했고, 잠겨버린다 한들 꺼지지 않는.
“그래. 믿음이 깊을수록 고통도 깊지.”
“두렵지 않다. 신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행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미련이 남아 아쉬울지언정.
지하신은 이안의 마음 한쪽에 남아있는 조각을 알아채고는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 네놈이 마음 준 모든 것들은 지하에 묻히게 될 것이다.”
“착각이 우습다. 내 동료들이라면, 나와 함께 너를 베었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나보다 먼저 결단을 내렸겠지. 하여, 우리는 신의 축복 아래에서-”
‘함께 웃었을 것이다.’
이안은 쓴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낮췄다.
러더포드를 우선으로 노리자. 지하신을 벨 수 없다면, 놈의 장난감인 러더포드를 처치하여 제 몫을 해내자. 가이아 위의 모든 작업이 러더포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니, 저자만 사라져도 세상은 자연스럽게 돌아가리라. 그리고 자신 역시, 옳은 흐름 속에서 흘러가리라.
타앗!
이안이 지하신 쪽으로 뛰어들자, 집시가 동시에 반대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전투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한 게다.
하지만 그 순간-
“히익!”
누군가 그녀의 목덜미와 허리춤을 잡아채는 게 아닌가? 집시가 놀라서 뒤돌자, 낯선 남녀 둘이 절박한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멜라니아와 클라크였다. 두 사람은 집시가 신이 내려준 사자라도 된다는 듯, 절박하게 붙잡고선 물었다.
“여기가 균열인가요? 아까 이안 경이랑 같이 움직이는 걸 보고 따라왔습니다. 사정이 길지만, 이안 경, 도울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 도울 수 있으면 저쪽에다 말하면 되겠네! 힘 나고 좋겠어, 아주.”
“…이안 경 편 아니세요?”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
스윽.
집시가 멜라니아의 손을 떼어내려고 발버둥 치자, 클라크가 그녀의 목덜미를 단검으로 겨누었다.
당장이라도 살을 찢을 것 같은 거리. 집시가 멈칫거리며 눈을 흘겨댔다.
“…뭐 하는 짓이지?”
“모든 걸 보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안 경을 돕지 않는다는 건, 저 마물과 뜻을 함께한다는 것이지요. 미리 제거하려 합니다.”
“웃기고 있네! 이것들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마법사도 아니고, 범인에게 당할 만큼 호락호락한 집시가 아니었다. 문제는 배가 너무 부르다는 것이지. 그녀는 아가미를 크게 벌리며 위협했고, 동시에 온갖 끔찍하고 음습한 소리를 흘려보냈다.
기함하며 물러서는 멜라니아와 달리, 클라크는 담담하게 몸을 밀착시켰다. 소음에 불과하다 여겼는데, 중간중간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토올룬어?’
“그리고 네놈들, 저자를 돕느니 마느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죽은 마법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황궁으로 침입할 때, 상대가 식별하지 못하게끔 외투를 똑같은 것으로 걸친 탓이다.
집시는 이것 좀 놓으라며 연신 몸을 비틀었고, 멜라니아는 다시금 용기 내어 그녀의 하반신을 붙잡았다.
“사정이 있었어요!”
하이만가의 멸문 과정에서 이안은 그녀를 살려주었다. 그 행위는 러더포드를 추적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멜라니아에게 기회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국으로 복귀하기 위해 러더포드를 이용할 생각이었지, 신의 뜻을 위배하여 존재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클라크도 마찬가지. 토올룬에서 만나 자신을 거두어준 러더포드가 은인이었지만, 그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이안이었다. 리엔 부인에게 평온을 가져다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건 난 몰라!”
“대가를 원하신다면 이거라도 드릴게요. 황실 보석이에요!”
황궁 전시실에서 함께 넘어온 보석 하나.
집시는 잠시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비밀을 먹고 사는 자였다. 반짝이는 돌덩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얽혀있는 비밀과 사연이 중요한 것이니.
“이안 경과 러더포드 사이의 계약 내용을 알고 있어요!”
집시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멜라니아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보아하니 이안은, 이안이 아닌 다른 존재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계약 내용을 정확히 아는 것은 멜라니아 자신과 러더포드뿐이란 뜻 아닌가?
집시는 그제야 뭔가 동한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리며 반응했다.
“먹어도 될까?”
“예? 그, 글쎄요. 이안 경에게 물어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그리 했으나 마음은 가벼웠다. 비밀이되, 이미 흘러간 비밀이었다. 이안이 심연의 죽음을 겪음으로써 깨져버린 계약이었으니까. 먹이로 던져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집시는 승낙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는 길을 일러주지. 다만, 직접 헤쳐나가야 한다. 살아나가면, 나중에 내게 그 비밀을 주겠다고 약속해.”
“이안 경이 허락한다면요.”
“설득하겠다 약속해. 그게 살아남으려는 자의 자세라.”
멜라니아는 입술을 깨문 채 조심스레 알겠노라 일렀고, 클라크는 단검을 거두었다. 그는 이안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안 경을 채 올 수 있겠습니까?”
“미쳤어? 너희 둘 데리고 가기도 버겁다. 그리고 누가 누굴 걱정해?”
보아라. 지하신과 대적하는 저 작은 인간이 얼마나 높게 뛰어오르는지. 신께서 남긴 가이아의 흔적이 얼마나 찬란한지.
집시는 후드를 여미곤 하체를 열심히 움직였다. 느릿하지만, 확실히 위험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멜라니아와 클라크는 집시 등에 매달린 채 뒤를 돌아봤다.
촤아아악!
퍼엉! 퍼어엉!
이안은 담담하면서도 치열하게 마력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죽을 걸 알면서도 전장에 뛰어드는 전사였고, 운명을 받드는 선지자와 같았다.
마력 검의 궤가 그려질 때마다, 금빛의 불꽃이 터졌다. 묵묵히, 하나하나에 성스러운 의무를 다하여, 이안은 이를 꽉 깨문 채 공격을 이어갔다.
“가소롭다.”
타닥타닥!
촤아악!
지하신이 흘린 물결에 이안의 몸체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멈칫거릴지언정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안이 허공에 발돋움하자, 그 발치에서 마법진이 생겨나며 동심원을 그려냈다.
재빠르게 위로, 더 위로, 지하신이 품고 있는 러더포드를 향하여 내달리는 이안. 그 궤적을 마력과 머리칼이 따라 그려냈다.
타앗!
크게 요동치는 기운을 느껴서일까. 정신을 잃었던 러더포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세상이 일그러져있다. 저것이 뭐지?
“러더포드!”
의문의 그자다. 포효하는 목소리가 지하신 안에 존재하는 러더포드에까지 닿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은 분명 이안에게 죽임을 당한 것 아니었나? 당황한 러더포드가 움직이려 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신!
신께서 다시금 자신을 구해주었구나.
그는 육신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음 없이 다시 돌아가려는 게다. 역시, 신께서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러-더포드!”
다시금 이안이 기합을 넣으며 소리쳤다. 신이 건네준 이드갈을 쥔 채 검을 세차게 찍어 누르자, 주위가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러자 지하신 안에 존재했던 러더포드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촤아악!
“……!”
놓치지 않겠다. 내 손아귀로, 적어도 네놈 목숨 하나만큼은 반드시 쥐고 가겠다. 막아서는 지하신의 물결에 잠겨가도, 이안의 결연한 눈동자는 뜨겁게 이글거렸다.
마력 검이 러더포드의 눈을 벨 것처럼 빠르게 다가섰다.
타앗!
손을 들어서 막아선 것은 반사적이었다. 신의 물결이 이안의 숨통을 옭아매자, 그 뒤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바랬다. 이안의 마력과 발하는 이드갈 그리고 러더포드 자신까지. 모든 걸 지워버리는 강렬한 빛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러더포드는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__신이다. 네가 믿는 ___…….”
“…뭐?”
빛에 의해 소음까지 지워져 버린 것일까. 뒷부분이 윙윙 울리며 묻혀버렸고, 러더포드는 이내 어둠에 잠겨 들었다.
미친 자다. 감히 신의 힘에 덤벼들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정체가 무엇일까. 백금발에 벽안. 존엄한 자. 그리고…….
‘…황실 사람.’
* * *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러더포드의 말이 끊어지자, 버고스 신하가 뒤이어 일러달라 재촉했다. 그는 담뱃대를 물고서 어깨만 으쓱거렸다.
“…정신을 잃은 부분이 있어,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게 다다.”
서자 이안의 실체가 ‘황실 사람’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이미 집시에게 먹혔기에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몰랐지만.
“이안 장관이 돌아오는 것은 확실하다는 말씀이시지요? 허어, 곤란하네요. 안 그래도 바리엘에서 황태자가 즉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말했잖은가. 괜찮다고, 지금이 기회라고.”
“혹, 그 말씀은…….”
버고스 신하들이 희망을 품은 채 조심히 물었다.
저리도 확신하는 것은, 분명…….
“그래. 신께서 일러주셨다. 올해가 지나기 전까지는 기회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