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8
제478화. 재회
히이잉!
찻잎을 우리던 비비안나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 도착 소리를 들은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리엘 저 끝에서 온 귀한 손님들! 비비안나는 딸아이 비비의 어깨를 감싸며 함께 나가자 눈짓했다.
문을 열어젖히자, 화사한 금발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10년 전, 너무 급하게 떠나보낸 자신의 소중한 친구. 비비안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부인!”
“비비안나 님!”
“세상에,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어쩜 부인께서는 변하질 않습니다. 나이는 나만 먹지.”
“비비안나 님도 그대로이신데요. 저택도 그렇고요. 제 기억과 달라진 게 하나 없네요. 너무 좋아요.”
“네르사른 님! 이리 들어오세요. 어머어머, 이쪽이 로엘이로구나. 안녕? 반가워. 난 비비안나라고 해.”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비비안나가 인사하자, 로엘은 격식을 갖추고서 공손히 답했다. 여자 이안이라더만, 단순히 외모만 이르는 말이 아니었다.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 판박이다.
비비안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제 딸아이 비비를 로엘 앞으로 데려왔다. 로엘과 비비의 첫 만남. 비비는 굉장히 쑥스럽다는 듯, 어깨를 한껏 만 채 볼을 붉혔다.
이에 필리아는 손을 좌우로 흔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그 아기가 이렇게 자랐구나! 너무 대견하고 신기하다. 반가워, 비비. 나는 필리아란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는 내 딸 로엘. 로엘은 비비보다 한 살 어려. 언젠가 둘이 만났으면 좋겠다 했는데, 오늘로 이루어졌네.”
비비가 배시시 웃으며 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만났지만, 엄마와 아빠가 들려줬던 긴긴 밤의 이야기, 그리고 종종 주고받았던 서신으로 내적 친밀감이 상당했다.
로엘은 비비의 눈동자가 과하게 반짝인다는 걸 알아챘고, 필리아와 네르사른을 슬쩍 둘러보았다. 분위기상 맞잡지 않을 수 없겠다.
“…반갑습니다.”
“반가워, 반가워! 로엘!”
비비가 로엘에게 볼 인사를 하려 하자, 로엘이 단호하게 손을 들어 올려 차단했다.
“제국식 인사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앗, 그래? 미안미안! 안으로 들어올래? 방 구경시켜줄게. 내 방은 이 층에 있어.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나랑 같이 자자. 책 좋아해? 그림은? 아, 꽃잎 모아놓은 거 있는데, 같이 보러 갈래?”
비비가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로엘을 잡아끌었다. 로엘은 제 어미와 아비에게 도와달라 무언의 신호를 보냈으나, 두 사람 다 비비안나와 웃고 떠드느라 정신없다.
‘하아, 어쩔 수 없나.’
그렇게 비비에게 질질 끌려가던 와중, 로엘의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 붉은 머리칼이었다.
“아.”
처음 보는 것이지만 단번에 알겠다. 거칠게 흐트러진 머리칼과 재수 없어 보이는 눈매, 이죽거리는 입. 그리고 살갗 가득한 흉터들.
“…베릭 삼촌?”
“베릭 삼촌?! 어디, 어디?”
베릭이 로만드로와 함께 저택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확히는, 가기 싫다고 버티는 베릭과 그 등을 밀어대는 로만드로였지만.
“아, 진짜 왜 이래? 나 바쁘다니까?”
“한두 시간 늦게 간다고 뭐가 달라져?”
“당연히 달라지지! 로만드로 님은 다리가 짧아서 멀리 못 가지만, 나는 다리가 길어서 한두 시간이면 마을 세 개는 더 지나가!”
“이놈이? 놀고 있네! 네가 빠른 건 마력 탓이지, 어디서 다리 길이를 들먹여? 오, 도착했나 보군. 이봐아!”
로만드로가 베릭의 옷깃을 꽉 붙잡은 채로 손을 흔들어댔다. 로엘은 저것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비비의 행동과 똑 닮아있었다.
‘그 옆은 로만드로 님인가 보군.’
“아! 빠아!”
비비가 달려가자, 필리아와 네르사른 역시 로만드로 쪽을 돌아봤다.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변한 것 하나 없는 로만드로와 베릭. 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10년 전 함께 고생했던 일들이 떠올랐으니.
로만드로와 필리아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동안, 베릭은 머리만 벅벅 긁어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로만드로 님! 건강하셨어요? 잘 지내셨지요?”
“아이고, 부인. 말해 무엇 합니까?”
“맞아요. 말해 뭐 해요? 살 더 쪘잖아요.”
“안 쪘거든!”
“베릭, 키가 너무 컸다. 하지만 여전해. 너무너무 반가워. 잘 지냈니? 이리 와 봐. 손잡아보자.”
필리아가 베릭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감탄이기도 했고, 기쁨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슬픔이었다.
만약, 만약에 이안이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필시 베릭과 같이 자랐을 터. 베릭의 성장은 이안의 성장을 떠올리게 했다.
“아, 진짜.”
이럴 줄 알았다고, 베릭이 난감하다는 듯 머리칼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필리아가 자신을 보면서 이안을 그리듯, 베릭 역시 필리아를 보면 이안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금발이 저리도 찬란했지, 녹안이 저리도 짙었지, 하면서.
“로엘. 이쪽으로.”
필리아의 부름에 로엘이 천천히 걸어왔다. 로만드로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아이의 존재감에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반면 베릭은 무덤덤하게 로엘을 내려다봤다. 무표정으로 서로를 탐색하는 두 사람. 이내 베릭이 먼저 첫인상을 남겼다.
“존, …열라 이안이네.”
그리고 이어서 로엘.
‘…개.’
이를 지켜보던 필리아는 내심 놀랐다. 이안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베릭을 껴안았다.
“어디 가니? 아까 얘기 들어보니, 중앙 밖으로 나가는 것 같던데. 곧 있으면 진 전하 성인식이잖아. 멀리 가는 건 아니지?”
“토올룬으로 가요.”
“토올룬? 어째서 그 먼 곳까지?”
“러더포드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있어서 진짜인지 확인하려고요. 걔가 있으면 이안이도 있을 가능성이 커요.”
이안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말에, 필리아의 눈이 흘러내릴 것처럼 커졌다. 놀라서 말문이 막힌 게 분명했다. 그녀는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베릭 얼굴만 연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묻는 것처럼.
“그리고 이번 해 안으로 별채가 세워져요. 슬슬 때가 오는 거죠. 이안이 돌아올 때.”
“저, 저기 베릭?”
“근데 자꾸 밥 먹고 가라 해서. 나 원 참.”
“떠나면 또 언제 밥 챙겨 먹겠어? 가기 전에 잘 먹여서 보내려는 거지!”
“내 밥 걱정하는 거, 로만드로 님밖에 없는 거 알아요? 다들 그만 먹으라고 난린데.”
베릭은 되었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필리아와 그 가족 얼굴도 보았으니, 이제는 정말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 토올룬으로 가서, 러더포드가 있다면 때려죽이고 이안이를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음?”
순간 베릭은 로엘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곤 눈썹을 까딱거렸다.
“왜?”
“토올룬으로 간다고요?”
“어, 알아?”
“아는데… 됐어요.”
싱겁기는. 베릭이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돌렸고, 미련 없다는 듯 왔던 길을 통해 멀어져갔다.
필리아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로엘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토올룬 아닌데.”
“응? 로엘, 뭐라고?”
“근데 상관없겠어요. 어차피 길 잃어버릴 거라.”
무슨 뜻이니? 필리아가 갸웃거리며 물었으나, 로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말이다. 아이는 그대로 비비의 손에 이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어른들은 베릭이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침묵했다.
이안이 돌아온다라. 바람으로만 남아있던 그것이, 현실로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안을 데리러 가겠노라 이르는 베릭 덕분에.
“그럼 저희도 들어갈까요? 여독이 심할 터이니, 오늘은 우선 푹 쉬세요. 미니가 방 청소를 아주 정성껏 해 두었답니다.”
비비안나가 반쯤 주저앉은 필리아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함께 들어가, 슬픔을 나누고 달래보자고.
* * *
환한 빛. 이드갈. 지하신의 물결. 러더포드의 동공.
심연에서 보았던 모든 광경이 한데 어우러져 이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차치하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괴로웠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고, 등 전체를 감싸는 축축한 감각에 멈칫했다.
얼기설기 대충 얽혀있는 천장…. 마구간인가?
‘뭐지?’
몸을 살짝 움직이자, 온몸의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오롯이 작동하는 것은 눈동자밖에 없는 듯했다.
이안은 자신이 있는 곳을 파악하고자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마구간으로 사용했던 창고다.
“아.”
틈틈이 새어 나오는 햇빛으로 보아 낮인 것 같은데, 자신이 왜 여기에 있지?
이안은 심연에서의 마지막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하신에게 보호받는 러더포드를 죽이고자 했던 그 하나하나의 순간 모두를.
결국에는 환한 빛이 주위를 잠식했고, 따뜻한 느낌만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뭐였을까. 지하신이 러더포드를 지키는 것과 같이, 자신 또한 신의 보호를 받았나?
‘러더포드는 자신이 따르는 것의 정체가 지하신인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의 정체가 지하신인 걸 알고 있는지, 아니면 카르보 신전의 신관들처럼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인지를 말이다.
사실 둘 다 이안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바리엘을 위해 그리고 신의 뜻을 위해 베어내고 처리해야 할 존재는 분명했으니까.
‘다만, 돌아가서 토올룬을 어떻게 정리할지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러더포드 상단이 일정 기간 토올룬에서 머물렀던 흔적이 있고, 영향력 또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니.’
하아, 이안은 우선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할 일이 산더미였고, 서둘러 움직이고 싶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산새 우는 소리. 그리고-
바스락.
‘발소리다.’
이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와 동시에 열리는 창고 문. 역광으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마흔 살 언저리로 보이는 마른 남성이었다. 그는 이안의 상태를 보러 온 것인지, 바로 탄성을 내질렀다.
“오, 정신을 차렸구나!”
인간의 외형을 지녔다. 남루한 차림새로 보아 계층이 낮아 보였고, 교육을 따로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바리엘 공용어를 자연스럽게 쓰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리엘 어딘가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억양이 특이한 걸 보면 외곽지인 것 같은데.
“오늘도 안 일어나면 어떡하나 했다. 입 벌려봐.”
구해주어서 고맙다고, 실례지만 이곳이 정확히 어디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기절한 다음 일어난 사람을 대하는 말치고는 굉장히 기이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상태가 괜찮은지, 신분은 무엇인지를 묻는 게 일반적인 것 아닌가?
이안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사내를 쳐다보았으나, 그자는 개의치 않고 희멀건 죽을 들이밀었다. 죽이려는 것치고는 그저 따뜻한 물을 건네는 것 아닌가 싶었으나, 이어지는 말은 여전히 험했다.
“입 벌리라니까? 아, 혹시 말을 못 알아듣나? 생긴 건 바리엘 사람인데?”
바리엘, 맞다. 돌아오긴 돌아왔구나. 이안이 입을 앙다문 채 버티자, 남자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큰일 났네. 말귀를 못 알아먹으면 힘든데. 자, 아-! 아! 입 벌려! 이렇게!”
사내는 친절하게 손짓, 발짓, 제 입까지 찢어가며 시범을 보였다.
“오늘까지 너 안 일어나면 주인님이 노예 시장에다 팔아버린다 했거든. 판다고! 뭔지 알아? 노예! 끽! 기운이라도 차려서 인사해야지! 안 그러면 너 팔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