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79
제479화. 낯설지만 익숙한 곳
따뜻한 물을 몇 숟갈 넘기긴 했지만, 이안은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연의 바다에서 얻은 피로와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사내는 그런 이안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남은 죽을 모두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한 방울도 남길 수 없다는 듯 게걸스럽게 핥아먹는 것이 흡사 굶주린 짐승 같다.
그는 입가를 손등으로 슥슥 닦아내더니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먹었는데도 못 움직이겠어?”
몇 번이고 고민하던 그가 결국 이안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어 끌어당겼다. 이거 놓으라고,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저항하려는 순간.
끼이익!
콰앙!
“뭐 하길래 이렇게 늦어?”
“아이고, 주인님!”
“일어났어?”
“예예. 정신 차렸습니다요. 죽도 다 먹었고요. 그런데 이놈이 말도 못 하고 뭐,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요.”
사내의 주인이라는 자가 들이닥쳤다. 짤막한 키에 두툼한 살집, 대머리인 그는 사내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는데, 입고 있는 옷이 어딘가 익숙했다.
이안은 그것이 자신의 옷임을 금방 알아챘다. 피로 얼룩진 것을 대충 씻어내어 말리고서, 맞지 않는 몸을 꽉꽉 욱여넣은 것이다. 단추를 잠그기는커녕 어깻죽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귀머거리에, 벙어리라고?”
“말도 없고, 알아 듣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이네요.”
“그런 놈이 이런 옷은 어떻게 입고 있었담?”
이안이 집무실에서 주로 입었던 겉옷이었다. 온갖 고초로 너절해지긴 했지만, 금실로 자수가 섬세하게 박혀있는지라 그 값어치를 짐작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살려준 값은 말할 것도 없고, 죽값도 받아야 하는데…. 흐음. 이래서는 청소도 못 시키겠네. 팔아버리는 게 낫겠어. 이번 주말에 장 열리니까 그때 데리고 가지. 뭐, 얼굴은 반반하니 잘 팔릴 것 같다. 응. 여기 계속 가둬 놔.”
“나는-”
주인이 코를 훌쩍이며 창고를 나가려고 하자,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금전적인 걸 굉장히 중요시하는 자 같으니, 차라리 신분을 밝히고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게 낫겠다 판단한 게다.
“…이안 히엘로다.”
“어라? 말하네?”
주인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봤고, 사내는 사색이 되었다.
“말하잖아!”
“흐익, 죄송,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게 어디서 나를 속이려 들려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 거 정말 아닙니다!”
짜악! 짜악!
무차별적으로 올려붙이는 손찌검에 사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싹싹 빌어댔고, 이안은 없는 힘을 쥐어 짜내며 주인을 말렸다.
“그만, 그만하시게. 아까는 말할 사정이 안 되어 그런 것이니, 사내의 잘못이 아니다.”
“하아, 하아. 그만하시게? 네가 뭔데?”
그것 좀 움직였다고 주인 머리가 땀으로 반질거렸다. 막되어 먹은 자로구나. 이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했다.
“히엘로의 지주이자, 황궁 마법부 장관일세.”
뜻밖의 말을 들은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침묵했다. 얻어맞은 사내 역시 마찬가지. 퉁퉁 부어오른 볼을 부여잡은 채, 사고가 멈춘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이어서 주인은 배를 부여잡으며 낄낄댔다.
“미친놈이로구나!”
“주, 주인님. 아무래도 말 못 하는 편이 여러모로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다시 기절시킬까요?”
믿지 않는 눈치다. 이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황궁 혹은 히엘로. 어디든 가까운 곳으로 연락하여 내가 여기 있음을 알려주시게. 그리하면 보답은 충분히 하도록 하지.”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아이고, 주인님! 저놈 맞으면 진짜 죽습니다요.”
“그럼 네가 대신 맞을래?”
“시, 시장에 팔아야 하는데 죽으면 아깝잖습니까. 예예.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일리가 있다. 주인은 풍만한 몸을 겨우 추스르며 이안 앞에 쭈그려 앉았다. 우드득, 웃옷 터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누구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네놈이 마법부 장관이시다?”
“그래.”
“마법 써 봐.”
“…일어설 힘도 없거늘, 어찌 마법을 쓰겠나.”
“이렇다니까. 사기꾼 새끼들은 항상 혀가 길어.”
주인은 이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이놈아. 10년 전 사라진 마법부 장관이 왜 여기에 있는데? 누가 그러디? 반반하니, 장관이랑 닮았다고?”
…10년?
심연으로 들어선 게 그리도 오래 지났단 말인가? 혼돈의 공간인지라, 시간 역시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았나 보다.
이안이 제 손을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하는 동안, 사내가 주인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장관이 그리 잘생겼습니까?”
“몰라. 그랬다고 하더라고. 어린데 제국 장관직까지 차지했으니 소문은 무성했지.”
지금이야 특별히 기억하는 자가 없겠지만.
주인은 이안의 이마를 마지막으로 세차게 밀어낸 뒤 일어났다. 등이 다 터져 옷을 입었다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다. 그는 사내에게 고갯짓하며 명령했다.
“입 터는 거 보니까 정상 아니다. 못 도망가게 잘 감시해.”
“예. 알겠습니다.”
이안은 천천히 일어나 창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워낙에 힘없는 발걸음이라, 주인이나 사내 둘 다 특별히 저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긴…….”
문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낯설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흙돌로 쌓은 칙칙한 담벼락, 건초 더미로 올린 지붕, 식솔로 보이는 자들은 반쯤 헐벗은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잡일 중이다. 촌락 중의 촌락이라, 이안은 여기가 어디인지 당최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네가 알아서 무엇하게?”
끼이익!
콰앙!
주인은 도로 들어가라는 듯, 이안의 가슴팍을 밀치며 문을 닫았고, 이내 잠금장치까지 단단히 걸어 잠갔다.
이안은 한동안 그리 서 있다가 반대쪽으로 움직여 벌어진 틈 사이를 살폈다. 식솔이 꽤 있는 것으로 보아, 일대에서는 나름 유지(有志)인 것 같은데…….
‘오지에 떨어진 것 같군.’
그래도 위안인 점은 이곳이 바리엘이라는 것.
마력 또한 텅 비어있지만, 휴식을 취한다면 조금은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지금, 그것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10년이라.’
긴 시간이다. 진이 있는 이곳은 이안에게 과거임과 동시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온 미래였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나? 이안의 머릿속으로 온갖 질문들이 꼬리를 문 채 떠올랐다.
전하께서는 장성하셨을까? 베릭과 로만드로 그리고 마법부는 잘 지내었고? 정세는 어찌 돌아갔으며, 러더포드는 어떻게 되었지?
투욱.
그때, 벌어진 틈으로 말린 밀가루 덩어리가 떨어졌다. 사내가 식사 삼으라 넣어준 것이다. 인심이 박한 것인지, 아니면 먹을 것이 어지간히도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조용히 쉬어. 그러면 별일 없어.”
“여기가 어디인가? 황궁 혹은 히엘로와 거리가 먼 것인가?”
“또 그 타령이냐? 히엘로가 어딘지는 난 잘 모르고, 중앙이랑은 좀 멀지. 아마도.”
한평생 사는 곳을 떠난 적 없으니,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안은 인내심을 갖고서 재차 물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인데.”
“랑드뢰.”
“랑드뢰?”
들어본 적 없다.
“주인님 성함이 랑드뢰시거든.”
“귀족인가?”
“우리한테는 왕보다도 높은 분이시지.”
미치겠군. 참으로 어지간한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재정 상태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았을 때, 하급 귀족조차 못 되는 작자인 듯하거늘.
이안은 이마를 잠시 짚은 다음, 질문을 바꿨다.
“시장이 열리는 곳도 멀고?”
“걸어서 꼬박 나절은 나가야지. 이럴 시간 없다. 나 일해야 해. 그거 아껴 먹어. 다음 밥은 내일이니까. 알겠지?”
중앙에서 주최하는 시장 외 모든 노예 매매는 불법이다. 그런데 노예가 아닌 자신을 그곳에 팔다니. 이는 노예 매매를 넘어 인신매매 범죄가 아닌가.
“하아.”
이안은 도대체 왜 자신이 이곳에서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것 또한 신의 뜻이긴 할 터인데, 감히 짐작조차 불가다.
무언가 단서가 없을까? 이안이 나무 틈으로 바깥을 계속 살피자, 사내와 식솔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산에 갈 건가?”
“어. 가서 주울 수 있는 건 또 주워와야지.”
“저번에 나도 갈 걸 그랬어! 금발이 예쁘장하던데, 시장에서 팔면 돈 좀 되겠지? 주인님이 고기 조각 한 점이라도 챙겨주시겠구먼. 부러워!”
이안은 어렵지 않게 대화 주주가 자신임을 알아챘다. 인가 근처가 아니라 산 어딘가에서 발견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 오늘이라도 같이 가시든가.”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두더지 나올까 봐 그런 거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요즘 들어 안 보인 지 꽤 됐어.”
“그래도, 재수 없으면 만날 것 아닌가.”
“재수 좋으면 나처럼 저런 것도 줍는 거고.”
“됐네. 죽은 드라이어드나 잘 잘라 오시게.”
…두더지. 그리고 드라이어드.
이안은 익숙한 단어의 조합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산, 산이 어딨지?
여기서 보이는 산이 있나?
“아.”
보인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 유독 검푸른 나무들로 인해, 먹구름이 대지에 낀 듯한 착시를 일으키고 있었다. 라자산(山)이다.
‘리엔 메렐로프 부인이 어린 시절 자랐다는 그곳. 나무와 운명을 같이하는 정령이 살고 있으며, 데라족(族)의 근거지.’
두더지 외형을 한 데라족은 폐쇄적인 성격으로, 평생 발명품 만드는 것에 몰두하는 종족이었다. 마물이 거의 없는 바리엘이다 보니, 인간과 다른 모습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운명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리엔 부인이 그러했지. 드라이어드인 어머니를 베고 나서 숲을 내려왔더니, 바로 노예 상단과 마주쳐 팔리었다고.’
혹시 그것도 이놈들 짓인가? 행동으로 보아, 한두 번 해 본 짓이 아닌 것 같긴 하다. 이놈들이 아니더라도, 분명 시장에서 활동하는 작은 상단이 있을 터.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가는 것이 유리할지, 아니면 라자산으로 도망치는 것이 유리할지 말이다. 시장으로 가면 그래도 중앙과 연락할 방도가 닿을 것 같긴 한데, 이자들의 수준으로 보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은-’
스윽.
쉬자. 쉬어서 마력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이안은 말라비틀어진 밀가루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외면하고선 눈을 감았다. 허기가 극심했지만 저런 걸 먹었다간 오히려 탈이 날 것이라.
마력이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니, 마음을 편하게 먹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부디 알맞은 시기에, 적절히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 * *
한편, 라자산 한복판.
검푸른 나뭇잎과 흰색 줄기 나무들로 주위가 울창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만이 감도는 숲속. 바스락거리는 것이 바람인가, 아니면 산짐승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정체불명의 무엇인가? 어린 데라족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코를 킁킁거렸다. 낯선 자의 냄새다.
‘또 물건 훔치러 왔나 보군.’
아마도 산 아래에 사는 족속, 인간일 터. 그는 두 주먹에 망치를 단단히 쥐고서 몸을 낮췄다. 바스락, 이파리를 치워 시야를 확보하니, 역시나 인간의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붉은 머리칼에 성질 더러워 보이는 낯짝. 생긴 것 하나 특이하게 생겼군! 데라족이 이를 드러내며 공격 태세를 갖추자, 인간이 중얼거렸다.
“…아, 시바. 또 길 잃어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