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8
제48화. 데르가의 밀서
“그런데 그자들 정말 기사 맞는답니까?”
“뭐?”
이안의 말에 에리카가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금 이안이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천려족을 의심하고 있는 지금! 이안이 저리 말하는 것은 자백이나 다름없지 않나.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나 있나?”
“그럼요. 물론입니다. 데르가를 잡아들일 때, 숲에서 그의 기사들을 모두 정리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기사라니.”
“하!”
이것 좀 보게나? 에리카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혹시 에리카 님의 부하 중 변절자가 있는 건 아닐까요?”
순간, 에리카의 머리에 망치가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이안의 말대로 변절자가 있다는 걸 믿은 게 아니라, 그 말이 시사하는 바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메리와 첼이 살아남아 영지 밖으로 도망쳤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고, 옆에 조력자까지 있다 하니 다들 그들이 무사히 도망치고 있다 생각할 겁니다.”
“너, 너……!”
“그런데 혹여, 조력자라 알려진 자들이 변절자라 에리카 님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두 사람을 감추지 않겠습니까?”
황궁의 명을 받고 내려온 몸이다 보니, 에리카는 충실하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존재가 증발한다면?
그녀는 두 사람의 생존 확인 여부라도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이해 가능할 만한 증거, 예를 들어 시체 쪼가리라도 첨부하여서 말이다.
“서둘러 최대한의 전력으로 두 사람을 쫓는 게 좋겠습니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안답니까?”
제삼자가 들으면 에리카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이었으나, 그녀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당장 저택에서 병사를 빼지 않으면, 메리와 첼을 죽여서 숨겨버리겠다. 그렇다면 네놈은 몇 년이고 흔적을 찾아 산맥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이 X발새끼가…….”
스르릉.
에리카는 욕설을 지껄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흥분하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지 않나. 완벽하게 이안의 덫에 걸려버린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왜 흥분을 하고 그러십니까. 저는 에리카 님을 걱정해서 드린 조언인데.”
“메리와 첼을 어디서 찾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이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나는 황궁의 명을 받은 조사단장이다. 나를 방해하는 건 황궁의 지엄한 결정을 방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에리카가 씩씩대며 쏟아댔지만, 이내 실수한 걸 깨닫고 인상을 찡그려댔다. 제 입으로 되짚은 것이다. 황궁의 명을 받았노라고.
그러니 당장이라도 메리와 첼의 뒤를 쫓아 영지 밖으로 달려나가는 게 본연의 의무이자,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라 시인한 것이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메리와 첼의 도주를 도운 자들을 잡아들이셔야겠네요.”
이안과 그자들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에리카가 입술만 잘근 깨물며 이안을 노려보는 동안, 심부름 갔던 부하가 돌아왔다.
“에리카 님, 마구 담당이 말하기를 브라츠 소유 말 두 마리가 없어졌다고…….”
이안이 와 있는 걸 보고 서둘러 말꼬리를 흐렸지만, 이미 다 듣고 말았다. 이안은 그것 좀 보라는 듯 환히 웃었다.
“맞네요. 저택의 말이에요. 변절자인 게 확실합니다.”
“지랄하지 마라. 네놈이 천려족과 짜고 치는 걸 모를 줄 아는가? 어디서 뻔뻔하게 자꾸 연길 하는 거지?”
“제가요? 천려족과요? 어찌 생사람 잡으십니까.”
“사람 같지 않은 실력자들인 것만 봐도 그러하다!”
“원하신다면 이쪽으로 들어온 천려족 전력을 확인해 보십시오. 두 명이 비는지 보면 되시겠네요.”
“너, 너…….”
“설마, 천려족 전력도 확인 안 하고 계셨습니까? 황궁의 조사단장은 생각보다 느슨하게 일을 처리하는가 봅니다.”
이안의 말은 명백히 모욕이었으나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설령 파악했다고 한들, 밖에서 따로 붙인 자라면 그걸 어찌 알겠는가?
“넌, 너는 내가 죽인다.”
“그러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진짜야. 넌 내가 죽일 거야.”
저주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저 건방진 천민 자식을 언제고 직접 참수하리라. 에리카는 이를 바득거린 다음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콰앙!
혼자 남겨진 이안. 그는 어깨만 으쓱거리며 메리 부인의 방을 쓱 훑어봤다. 분명 부인이 여기서 가져갈 게 있다 했는데…….
드르륵.
서랍 안쪽은 반쯤 비어있었다.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의 값어치 있는 것들은 조사단이 몰수한 모양이었다. 누락된 세금이 만만치 않으니, 그걸 갚기 위해 저택의 귀물은 모두 황궁에 귀속될 터.
‘뭘까. 대체…….’
이안이 혀를 쯧 차며 고민하는 동안, 에리카는 부하와 함께 복도를 내달려 밖으로 나갔다. 천려족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일이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
“병사를 소집해라.”
“어, 얼마나요?”
“최소한만 남겨놓고 모두 추격대로 편성할 것이다.”
“하, 하지만 그리되면……,”
천려족인 것을 알았으니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한 번에 몰아쳐서 놈들을 족쳐야만, 이안과 천려가 브라츠 가문 사람을 빼돌렸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밟아주마. 네놈들의 덫.’
“이안과 카칸을 감시해라.”
“아, 네. 알겠습니다.”
“혹여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해.”
뭐가 됐든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데르가의 기사라 호칭했던 천려족 두 새끼를 잡는 순간, 이안을 비롯해 저택의 이방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소집!”
에리카와 중앙군이 소란스러워지자, 분위기만 살피던 천려족도 은밀히 움직였다. 전사 한 명이 네르사른에게로 가 상황을 보고했다.
“네르사른 님. 이안 경의 말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슬슬 매를 날리심이 좋겠습니다.”
“그러지.”
전사의 언질에 네르사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격대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으니, 이제 메리와 첼을 처리해도 된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그는 천려어로 짤막한 쪽지를 써서 부하에게 넘겨주었다.
“험준한 산맥이라 하는데, 어찌 잘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모래바람만 맞던 애들이.”
“그대는 식구를 믿지 못하는가?”
“그럴 리가요. 전사들 아닙니까. 그저, 걱정입니다.”
전사에겐 패배란 없다. 패배는 곧 죽음이요, 죽고 나서는 패배했다는 걸 자각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설령 위기에 처한다고 한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스스로 심장을 꺼낼지언정, 적들에게 빌미를 줄 리 없다.
“매를 날려 보내라.”
“네. 아참, 남은 매가 카칸의 것인데요.”
전사는 네르사른의 뒤쪽 침대를 힐끔거렸다. 카칸티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복숭아를 맛보고 있었다. 그는 허락한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제노를 보내겠습니다.”
“보내기 전, 단 과일을 먹여라. 녀석이 요즘 성격이 이상해졌어.”
“알겠습니다. 쉬십시오.”
끼익.
부하가 나가자, 네르사른이 뒤를 돌아봤다. 카칸티르는 여전히 창밖만 멍하니 보며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으나, 사막과 비교하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카칸. 이제 영지에서 중앙군이 빠져나가면, 슬슬 데르가를 죽이고 정리하시지요. 천려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부마트의 일도 그러하고, 지금 사막에는 주둔지를 지키는 병력이 모자랐다. 대사막의 가호로 크게 걱정할 것 없지만, 집을 오래 비우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데, 네르사른. 이안이 마력운용자라 황궁의 눈에 들면 언젠가는 중앙으로 올라가야 할 터인데, 그때는 이곳을 관리할 자가 누구 있겠나?”
“글쎄요. 베릭은 데리고 올라갈 것 같습니다.”
“두고 간다 해도 그놈으로는 무리다.”
카칸티르가 네르사른을 힐끔거렸다. 워낙에 오래 곁에 있었던 터라, 시선만으로도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었다. 네르사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싫습니다.”
“무엇이?”
“지금 저보고 여기 남으라는 말 아니십니까.”
“오. 그렇게 느껴졌나?”
“제가 있으면 천려에게도 여러모로 이득이겠지요. 하지만 이안 경이 허락할지도 미지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네르사른은 카칸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추워서 싫습니다.”
“아하. 그거 중요하지.”
“눈이 내리는 곳입니다. 혹한이라고요.”
카칸티르는 낄낄대며 남은 복숭아를 마저 베어 물었다. 겨울까지 갈 것도 없다. 앞으로 두어 달, 가을바람이 차가워지면 천려 전사들의 향수가 깊어질 것이다. 그 전에 모든 걸 매듭지어야 했다.
“지금쯤 작위임명장이 내려오고 있겠지요?”
“그럴 것이네.”
“카칸께서는 정녕 이안을 믿으십니까?”
“믿다니? 그가 마력운용자라는 것 말인가? 자네도 보지 않았나. 베릭이 기사와 싸우던 모습.”
“제 말은, 마력운용자라는 것이 작위임명장을 뒤집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겁니다.”
제국인들의 마법 숭배는 들어본 적이 있다. 그들이 윈첸을 믿고 따르듯 바리엘 사람들은 마법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지.
하지만 직접 겪은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변방. 마법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영지민들이 천지였다.
“글쎄다.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아. 황궁에서 사람이 내려온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게다.”
“그나저나 확실히 좀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네르사른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며 중얼거렸다. 이쯤 하면 와야 할 때가 되었는데, 여전히 아무런 기미도 없었으니 말이다.
‘대체 황궁에서는 뭘 하고 있는 건지 원.’
* * *
똑똑.
제1황자, 마리브 베로시온의 집무실은 밤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황자는 가벼운 옷차림에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적막을 깨는 인기척에 그가 안경을 내려놓았다.
“들어오시오.”
“마리브 저하. 보실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밤중에.”
마리브가 식은 차로 입을 축이며 물었다. 보좌관이 내놓은 것은 구겨지고 더러운 서신 한 통이었다. 그가 먼저 내용물을 확인했는지, 입구는 열려 있었다.
“변방의 데르가 브라츠 백작이 보낸 밀서입니다. 일부러 황자님이 아닌 제 쪽으로 돌아서 왔습니다.”
“브라츠 백작?”
마리브가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브라츠라면 최근에 황제께서 탈세 혐의로 조사단을 보낸 곳 아닌가? 데르가 또한 가끔 국가 행사가 있을 때나 몇 번 봤던 인물이지, 사적으로는 전혀 친분이 없는 자였다.
그런데 거기서 서신이?
의아하면서도 미심쩍고,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인장이 안 찍혀 있군.”
“대신 브라츠의 가보임을 증명하는 글귀가 안쪽에 새겨진 반지가 들어있었습니다. 10캐럿으로 추정되는 다이아몬드 반지입니다.”
“흐음.”
마리브는 탁자 위에 놓인 반지를 보고서 탄성을 내질렀다. 보석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그걸 내놓을 만큼 백작의 처지가 다급하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
“선처를 구하려면 아버지께 보내는 게 맞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다른 내용이겠군.”
“맞습니다.”
보좌관이 곱게 접힌 종이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흥미롭게 글을 읽어가던 마리브의 눈매가 날카롭게 휘었다.
“이게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