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82
제482화. 너와 나의 10년
이 미친 마검사가 지금 뭐라는 거야?
랑드뢰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자신을 마법부 장관이라 밝혔던, 금발의 녹안 아이가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황궁친위대 소속의 마검사가, 장관을 찾고 있다? 이 조용하고 폐쇄적인 지역에서 그저 우연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랑드뢰는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연신 마른침을 삼켜댔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장관 사칭범이라 황궁에서 추격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마법부 장관이라서 찾는 걸 수도 있다. 전자면 바로 안내해도 되지만, 후자라면 난 죽는다. 절대 무사할 수 없어.’
베릭은 랑드뢰의 대답이 늦어지자 멱살을 거칠게 흔들며 재촉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피에서 이안의 희미한 냄새를 감지한 순간부터,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그를 파도처럼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안을 곧 만날 수 있다고, 되새기고 되새겼던 모든 나날이 베릭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안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꽈악.
“흐, 흐억!”
“옷 어디서 났냐니까? 말 안 하지? 혀 잘라줘?”
“그, 그것이 말입니다. 아랫것이 마검사님을 발견한 산에서 주운 것입니다. 맹세코, 강탈하거나 한 게 아닙니다! 저는 옷 주인을 본 적도 없어요!”
우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자. 랑드뢰는 자신이 아니라 부하가 가져온 것이라 일렀다. 그리하면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고 해도 의심받을 게 없다.
“산에서 주웠다고?”
“고급 천인지라 제게 가져왔지요. 그, 그래서 이번에는 아랫것들을 직접 이끌고 산에 오른 것입니다. 혹여 또 뭔가 발견할까 싶어서요.”
베릭은 랑드뢰의 멱살을 거칠게 내던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안의 흔적이 산에서 발견되었다라. 두더지 족과 연관이 있나? 혹여 그놈들이 이안을 해친 것인가?
베릭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치솟는 무언의 감정을 다독이는 동안, 랑드뢰는 목을 부여잡고 숨만 컥컥 내쉬었다. 개 미친 마검사 같으니라고!
베릭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명령했다.
“데려와.”
“커헉, 헉, 누, 누구를요?”
“옷 주운 네 부하. 물어볼 게 있으니 데려오라고.”
“…바, 밖에!”
끼이익.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랑드뢰는 마른침만 몇 번 삼키더니, 바깥에 서 있는 시종을 불렀다. 이 멍청한 놈들 중에서 그나마 말장단 맞춰줄 놈이 누가 있더라? 랑드뢰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베릭이 말을 가로챘다.
“여기, 네놈 주인이 입고 있는 옷 있지? 이거 가져온 놈 데려와.”
“아, 홋이요?”
“홋이든 나발이든.”
“그, 시체를 가져오라는 말씀이신가요?”
“뭐?”
시종은 어리둥절하게 눈만 굴려댔다. 주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사색이 된 랑드뢰가 눈빛으로 무언의 신호를 연신 보내댔다.
‘닥쳐! 제발 그 입 닥쳐!’
“시체라니?”
“홋은 주인님께서 처리하라 하셔서…….”
어쭈, 이것 봐라?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베릭은 랑드뢰와 시종을 번갈아 보고서는 검을 집어 들었다.
이럴 때 이안이었다면 좀 더 고상한 방법으로 상황을 풀어냈겠지만, 자신은 그럴 재주도 없고 인내심도 없다. 뭐로 가나, 목적만 달성하면 될 일 아닌가?
베릭은 코를 긁적거렸고, 이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문 잠그고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이다.
“두 사람 다, 지금부터 말 잘하는 게 좋아.”
“아이고, 마검사 님. 왜 이러십니까. 정말.”
“내가 조금이라도 이해가 안 되거나, 의문이 생기면 둘다 살아서 못 나간다. 오늘이 두 사람 마지막 날이라고. 알아들어?”
“살려주십시오, 사, 살려주십시오.”
“자. 질문 들어간다.”
베릭은 검 끝으로 랑드뢰의 웃옷을 살짝 걷어내며 물었다.
“옷 주인, 봤어?”
* * *
소란스럽다.
굶주림을 이기고 겨우 잠들었던 이안은 눈살을 찌푸린 채 깨고 말았다. 밤까지 작업하는 시종들이 있는지라 조용한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좀 특이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적이 있었던가? 이안은 혹여 무슨 일이 났나 싶어 나무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저택 불이 모조리 지펴 오른 것 외 특별한 사안은 없어 보였다.
“하아.”
이제는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배를 곯는 게 이렇게도 힘든 일이었구나.
신체적으로 안정을 취하지 못하니, 마력 회복 역시 굉장히 더딘 게 느껴졌다. 아마 처음 눈떴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태일 것이다.
‘곧 있으면 주말이라 시장으로 갈 것 같은데, 그 수밖에 없나.’
꼼짝할 수 없어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이 무력감. 이런 걸 언제 느꼈더라? 전쟁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아니면 크로니에 의해 구금되었을 때?
아니다. 뭔가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몸과 마음 모두 마르고 황폐했지만, 지금은 온전히 물리적인 무력감뿐이다. 믿음 있는 삶은 이다지도 다르구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온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마음이 가벼워.
이안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 순간이었다.
째앵!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나 보다. 이안은 고개만 스윽 돌려 혹여 불이 난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다른 거면 몰라도, 화재면 심히 곤란하지 않겠나?
저벅저벅.
이어서 들리는 묵직한 발소리. 저택의 시끄러운 사정과 달리, 그 누구도 바깥으로 나오는 자가 없다. 오로지 한 명. 단 한 명의 인기척만 존재했다.
철컥.
…자물쇠를 푸는 건가? 누구지?
콰아앙! 쾅!
낯선 자는 자물쇠를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제 성질을 못 이겼는지 발길질을 해댔다.
문짝이 거칠게 흔들리자, 이안은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힘이 굉장한 자다. 고작 서너 번 만에 걸쇠가 뜯어진 것 같았으니까.
끼이익.
문틈이 벌어지고, 환한 달빛이 창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빛줄기가 이안의 금발과 녹안을 차례로 밝혔고, 주위에는 오로지 적막만이 감돌았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전사임을 짐작하게 하는 장대한 기골.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으나, 시원한 눈매와 입매가 참 익숙했다. 이안은 한참이나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고, 이내 깨달았다.
“…아, 베릭.”
베릭, 베릭이로구나.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걸 듣긴 했지만, 실감하지는 못했는데. 이리도 장성한 베릭을 보고 있자니 사실이긴 한가 보다.
이안은 신기하다는 듯 연신 베릭을 뜯어보았고,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 그렇지. 백 년 전의 바리엘을 살아가는 너와 백 년 후의 바리엘을 살아갔던 나의 시간선(時間線)은, 이리도 다른 것이었지.
“베릭. 많이 변했구나.”
“너…….”
“그래도 알아볼 수 있어.”
이안이 베릭의 팔을 잡으며 희게 웃었다. 네가 이리 변한 것처럼 모두가 변했겠지? 진, 로만드로, 시아. 그리고 마법부의 모든 이가 자신의 시간을 살아왔을 터. 멋있구나. 시간을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경이로워.
미래에서 온 이안은 이미 그들의 끝을 알고 있었지만, 과정 속의 변화를 목도하는 게 이렇게도 놀라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한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몰아치는 헛헛함. 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너는 나를 알아보겠니?”
“그걸 말이라고 해!?”
베릭이 이안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소리쳤다. 오랜 세월 꾹꾹 담아두었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너무 작은 외침이었지만 말이다.
“너, 너, 누가 제멋대로 가 버리래? 어!?”
“사과하마. 다른 수가 없었어.”
“시발, 그리고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이어서 심하게 목소리가 떨려왔다.
“…왜, 왜, 자라지 않았어?”
베릭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안의 어깨를 쥐었다. 미치겠다. 그때의 너는 이다지도 작았나? 기억 속의 이안이는 이렇게 어리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자란 탓인지, 아니면 내가 너를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무엇이 되었든,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이 기분은 지울 수 없으리라.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몰랐는데, 너를 보니 이제 좀 알겠다. 이렇게 만나려고 그랬나 봐.”
“뭔 소린데. 너,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심연에 들어갔다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어. 시간 흐름에 간극이 좀 있었던 것 같아.”
“미친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베릭은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멈칫거렸다.
“그럼 네 지난 시간은? 네 10년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겠지.”
저들이 봄을 열 번 맞이하는 동안, 이안은 단 한 번의 봄조차 맞이하지 못한 게다.
이걸 다행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네가 심연에서 겪었던 모든 게 고작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어서 다행이었다고, 그리 말하는 게 옳을까?
할 말이 너무 많으면 되레 어떠한 말도 할 수 없구나, 베릭은 코를 조금씩 훌쩍였다.
“…이안이 맞아?”
“너무 늦게 물어본 것 같은데, 베릭.”
“시발, 맞네. 말하는 거 보니까 이안이 맞아.”
“너도 말하는 거 보니까 베릭 맞는구나. 솔직히 조금 낯설다.”
“…나는 안 낯설어.”
“그래? 다행이네.”
“다행…….”
베릭은 붉어진 눈시울을 대충 닦아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다행은 무슨 다행. 10년이 지나도 낯설지 않다는 뜻을 모르나? 재수 없는 주인 새끼.
“진짜 존나 짜증 나. 미친.”
“오, 세월이 지나긴 지났나 보다. 베릭 네가 아이처럼 우는 것도 다 보고.”
“시꺼! 이거 눈물 아니거든? 콧물이거든?”
“그래그래. 다들 잘 지내고?”
“잘 지내겠냐? 개판 났다!”
이안이 눈썹을 구부리며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우선 이안 히엘로라는 존재가 황궁에 끼친 파문을 수습하지 않은 채 사라졌으며, 자신과 비슷하게 러더포드도 공백을 그렸을 터이니. 버고스와 바리엘 사이의 정세가 어떻게 얽혀 들어갔는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베릭이 개판이라고 정의할 만큼, 바리엘에게 불리한 상황은 아닐 것이라 여겼다.
“마법부 쪽박 찼어. 다들 황궁 나가고, 남아있는 마법사들은 북쪽이랑 남쪽으로 찢어지고, 로만드로 님 혼자 실무 보고. 아, 로만드로 님 딸 열 살이다? 비비라고… 아, 맞다. 네 동생도 얼마 전에 봤는데 다 컸더라.”
“…내 동생?”
“로엘. 너랑 개똑같아.”
“아아. 진 전하는?”
“…잘 계시지. 곧 있으면 성인식이다.”
“오호, 세상에.”
이안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작았던 아이가 성인식을 앞두고 있다니! 저조차도 달하지 못했던 곳으로 한 걸음 나아가 의연히 서셨구나.
이안이 환하게 웃자, 베릭은 눈을 샐쭉하게 뜨곤 중얼거렸다.
“웃기는 시발. 사람 속도 모르고.”
“네게도 속이 있었구나. 몰랐는데.”
“…뭐래.”
“그래서, 베릭. 너는 어쩌다 여기로 왔어?”
“토올룬으로 가려 했는데. 길 잃어버렸음.”
“…변한 게 하나 없구나.”
“누구만 할까!”
토올룬. 베릭 혼자 그곳으로 떠날 이유는 없으니, 황궁의 명을 수행하던 중이라 짐작 가능했다. 러더포드 또한 가이아 어딘가에서 눈떴을 터. 아마 그 여파겠지?
베릭은 골똘히 생각하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뒤로 꺾으며 꿍얼거렸다.
“그래. 시간 좀 멈춘 게 대수냐. 남들보다 10년 더 산다고 생각하면 이득이지, 뭐. 잘됐네. 돌아왔으니까 됐다. 야! 근데 갑자기 어이없네. 너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마력이 없어. 심연에서 다 썼거든.”
“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꼬르륵.
베릭이 눈을 크게 뜨며 이안을 쳐다봤다. 지금 이게 뭔 소리여? 내 배에서 난 거 아닌데?
“…….”
이안은 담담하고 진지하게 일렀다.
“…배고프다.”
“뭐? 밥도 안 먹었어!?”
“갇혀있었으니까.”
“이런 개 XXX! XX XXX! 밥을 안 줘!? XXXX!”
콰앙! 쾅!
열 받은 베릭이 단숨에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가, 후다닥 되돌아왔다. 아주 중요한 걸 놓고 갔다는 듯이.
그는 주저앉아있는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