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83
제483화. 너와 내가 갈 길
부서진 창문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가구, 잡다한 것으로 어지러운 침실이거늘, 이안은 개의치 않고 식사를 받았다.
마구간으로 썼던 창고에 비하면 고급 식당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비록 구석에는 랑드뢰가 반쯤 벌거벗겨진 채로 기절해 있고, 식사를 옮기는 하인들의 낯빛은 두려움으로 물들었지만 말이다.
이안과 베릭, 그 누구도 그것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스윽.
오른손에 나이프, 왼손에 포크, 무릎에는 냅킨까지. 완벽했다. 이안은 팔 각도를 자연스럽게 뻗어 질긴 고기를 잘라냈다. 벌써 두 덩이째였다.
끊임없이 칼질하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배고팠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식기 부딪히는 소리는 하나도 안 났다. 베릭은 고깃덩어리를 채로 질겅거리며 그런 이안을 빤히 살폈다.
시선이 너무 따가운지라, 이안은 그쪽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왜?”
“신기해서.”
“내가 자라지 않은 게?”
“아니. 만났다는 게 신기해.”
그리고 이상했다. 이안과 달리, 분명 자신에게는 기다림의 세월이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고 나니 그 시간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린 기분이었다.
과거에는 힘이 없다더니, 정말이었다. 현재가 의미를 찾자, 지난 모든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이안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10년이고, 베릭에게도 이젠 상관없는 시간이 되었으니, 사실상 서로 같은 것 아닐까?
“베릭. 어서 들거라.”
“뭔 소리. 너 칼질할 동안 난 다섯 접시 비웠어.”
“그러니까.”
이안이 아는 베릭이라면 다섯 접시는 시작에 불과한데.
오물오물, 어찌 된 일인지 묻는 이안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여, 베릭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이 부드러워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자란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마음 놓고 먹잖아? 그럼 너 또 굶어.”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해.”
“엥? 며칠을 굶었다며. 근데 그것만 먹는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베릭은 반쯤 뜯은 뼈다귀로 식탁을 쳐대며 시종들을 닦달했다. 자고로 고기란 끊이지 않고 들어와야 하는 법. 갈수록 새로 나오는 음식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안이 저것만 먹는다고 하지, 쯧.
“저택에 있는 고기 다 내오고 있는 거 맞아?”
“예예. 물론입니다. 하, 하나 주방에서 모두 감당할 수 없는지라,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돈 낸 만큼 내와라, 진짜. 아니면 뒤진다.”
“베릭. 값을 지불하였어? 얼마나?”
의외였다.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주인장을 보고서 무전취식 중이라 여겼는데 말이다. 베릭과 랑드뢰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하긴, 엉망진창인 침실만 봐도 짐작은 가능했다만.
“몰라. 아까 금화 열 개 정도 줬어.”
멈칫. 이안은 우아하게 칼질하던 손짓을 멈추고 베릭을 돌아봤다. 입매가 단단히 굳은 것이, 심상치 않았다.
베릭은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 저도 모르게 앉은 자세를 바로 하며, 코를 훌쩍였다.
“왜? 문제 있어?”
“있지. 바리엘의 현 물가가 그러한가?”
“어? 아아, 난 또 뭐라고. 누가 장관님 아니랄까 봐.”
금화 한 닢은 농민의 한 달 치 수입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한데 지금 베릭은, 그 열 배에 달하는 값을 이런 저급 고기에 치른 것이라.
비정상적인 물가 상승은 나라의 혼란과 위태로움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였기에, 이안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베릭은 아니라는 뜻으로 뼈다귀를 휘휘 내저어댔다.
“물가가 오르긴 올랐어. 예전에는 고기 열 근 먹을 거, 이제는 아홉 근 정도밖에 못 사니까. 근데 내가 낸 금화는 음, 뭐랄까. 보상? 뭐 그런 거?”
보상? 이안은 고기를 한입에 넣으며 다시 침실을 둘러봤다. 그래. 보상이 좀 필요해 보이긴 했다. 멀쩡한 것이라고는 천장밖에 없어 보이니.
“산에서 기절했는데 저 새끼가 데리고 왔거든.”
“일종의 사례금.”
“그래, 그거. 근데 이럴 줄은 몰랐지. 십색기.”
베릭은 기절한 랑드뢰에게 뼈다귀를 집어 던졌다. 투웅, 머리를 맞은 그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으나 일어나지는 않았다.
“회수하려 했는데 한바탕하니까 동전이 어디 갔는지 안 보여. 그러니까 준 거나 마찬가지임. 고기 더 가져와, 이것들아!”
“네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콰앙! 쾅!
베릭이 식탁을 거칠게 두드려댔으나, 이안의 칼질에는 흔들림이 없다. 사정 있는 값이라는 걸 이해했으니, 안심한 게다.
“그런데 베릭, 기절이라니?”
“두더지족이 망치로 대가리 깠어. 어지간하면 기절 안 하는데, 미친놈들이 뭐로 만든 건지 모르겠더라. 황궁 돌아가기 전에 산 들렀다 가자. 그 새끼들 다 조져버리려니까.”
이안은 커트러리를 내려놓으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데라족, 역시나 라자산에 있었던 게다. 지난 세월 동안 베릭이 훈련을 게을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거늘.
‘황궁친위대 마검사를 기절시킬 정도의 전력은 있다는 뜻. 특성상, 신체적인 능력보단 저들이 발명한 무엇인가를 사용하였겠지. 아무래도 직접 보는 편이 낫겠다. 심연에서 처음 눈뜬 장소가 라자산 근처인 게 영 마음에 걸려.’
“이안아, 내 말 듣고 있어?”
황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왜 대답이 없어? 베릭이 손을 탁탁 튕기며 이안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이안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그 전에-”
“그 전에?”
“전하의 명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어. 아무래도 러더포드를 감지하여, 토올룬으로 가는 길이었겠지?”
말 안 해도 잘 아네.
베릭이 손가락을 꼽으며 기억을 더듬거렸다.
“에, 그러니까 토올룬으로 가서 러더포드가 진짜로 돌아왔는지 확인하고, 들이패서 죽인 다음에, 이안이 네가 있는지도 조사. 그리고 아탄족 만나고, 헤일 대장이랑 합류.”
그 많은 걸 용케도 외웠구나.
하지만 이상했다. 아직 토올룬으로 가지도 못했을뿐더러, 이행하지 못한 황자의 명이 태산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황궁으로 귀환할 생각을 하였을까?
나직이 한숨 쉰 이안은 베릭의 손가락 하나를 접어주며 일렀다. 바로, 자신을 찾는 일이다.
“이건 행하였으니 되었다.”
“…….”
그리고 하나 더 접히는 손가락.
“러더포드가 진정으로 나타났는지 또한 되었어. 그자는 나와 같이 살아서 돌아왔을 것이다. 한데, 그게 토올룬인가는 생각해볼 문제지. 러더포드의 근거지가 그곳이 맞기는 하나, 현 정세를 따졌을 때 버고스에 있을 가능성이 더 높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토올룬은 지하신을 존재하게 하는 믿음의 근거지였다. 바리엘로 접근하기 위해 발판 삼은 버고스가 내전으로 혼란스러우니, 버고스를 우선으로 정리하는 게 마땅한 순서다.
또한, 진의 성인식을 앞두고 있다 하지 않았나? 이는 바리엘의 역사에 방점이 찍히고, 새로운 문장이 쓰이리란 뜻이니. 인접한 국가에서 기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토올룬에서 러더포드가 나타났다는 건, 바리엘을 속이려 드는 수일 수도 있다. 전하께서 많은 인력을 파하지 않은 게 아주 잘하신 대처라.”
“난 그런 것까진 몰라.”
황궁에 전서구를 날려야겠다. 러더포드와 자신이 돌아왔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만 확인되어도, 바리엘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진다. 이안은 낑낑대며 고깃덩이를 들고 오는 시종에게 물었다.
“저택에서 사용하는 전서구가 있는가?”
“전서구요? 비둘기? 그, 그런 건 없는데요.”
“마력석이 없는 것이라도 좋다.”
“나, 날개 달린 건 닭밖에 없습니다.”
“육로를 통하면 중앙까지 얼마나 걸리지?”
“어…. 모르겠는데요.”
시종 역시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어떠한 답도 시원하게 내놓지 못했다. 흐음, 이안의 고민이 깊어지자, 시종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시, 시장에 가면 아마 늙은 전서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주 나오는 건 아닌데,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시장? 내가 팔려 갈 예정이었던 그곳?”
“…예. 거기요.”
시종이 후다닥 뒷걸음질 쳐서 나가는 동안, 이안은 머릿속으로 동선을 정리했다.
“베릭. 나와 시장에 가서 전서구로 보고서를 올린 다음, 산으로 가자.”
“으흥. 좋지.”
“그러고서 너는 북쪽으로 올라가 전하의 명을 완수하고 복귀해. 나는 중앙으로 가겠다.”
“뭐?!”
베릭이 먹던 고기를 툭, 하고 떨어트렸다. 지금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모르겠다.
“자, 장난 까?”
“…? 전혀?”
어느 부분이 장난처럼 느껴졌지? 이안이 단호하게 웃으며 고기를 썰자, 베릭이 식탁에다 천천히 머리를 박았다. 자신도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황태자의 명이라는 게 있어서 불가하다는 걸 깨달은 게다.
명 좀 취소해 달라고, 전서구에 물려 보내볼까? 그래도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뭐, 어차피 답이 오기도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하겠지만.
“아 참.”
이안은 뭔가 의문이라는 듯, 다시 멈칫거렸다. 현재 북쪽 지대에 헤일 대장이 가 있다 하지 않았나? 아탄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마물 범람 지대인 것 같은데…….
“베릭, 현재 마법부 장관은 누구지? 헤일 대장이면 황궁을 비울 리 없을 터.”
“장관은요, 니 똥, 지금 빈 자리거든요.”
베릭이 식탁에 이마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너 간 이후로 계속 비어있었거든요. 말했잖아. 마법부 쪽박 찼다고. 애들 다 흩어졌어. 절반은 북쪽 마물 범람 지대로, 절반은 남쪽 클리포포드로 가서 이드갈 박느라 정신없다.”
10년 동안이나 장관직이 비어있었다고? 이안은 굉장히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잊어버렸다.
마법부란 황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부서 중 하나지 않나? 대외적으로는 바리엘의 위상을 견고히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마법부가, 지도자도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니. 이는 앞으로 쟁취할 진의 황권에 있어서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드갈로 균열을 조절하는 것인가?”
“듣기로는? 그게 마력을 흡수하는 거잖아. 자이라가 발견했는데, 뭐, 이렇게 저렇게 하면 균열을 억제할 수 있다더라.”
현재 바리엘 인근에 존재하는 균열은 모두 두 곳. 북쪽의 마물 범람 지대와 남쪽의 클리포포드. 마법사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게다.
이안은 먹던 것을 내려놓곤 잠시 침묵했다.
“이안아?”
할 일이 하나 더 있었구나.
“…마법사들을 다시 불러들여야겠다.”
흩어진 자들을 다시 결집하여 마법부를 단단히 해야 했다. 러더포드를 그리고 지하신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했으니까.
이안은 잠시 머릿속으로 바리엘 지도를 떠올렸다. 이곳은 라자산 인근. 북쪽 지대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포탈을 이용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안의 마력으로는 현재 불가했다. 회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예상, 그리하면 여러모로 제약이 생긴다.
‘북쪽으로 가서 마법사들에게 마력을 나눠 받아 회복하고, 다 함께 중앙으로 통하는 포탈을 여는 것. 그리고 홀로 중앙으로 가는 것. 무엇이 더 나은가?’
이안은 비쩍 마른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굶은 탓도 있겠지만, 심연을 헤엄친 탓에 체력 자체가 바닥이다.
이런 몸으로 말이나 몰 수 있을까? 필시 마차를 구해야 할 것인데, 시장에 간다고 한들 찾을 수 있을까? 전서구 하나 구하기 힘든 이곳에서?
“…베릭, 아니다. 시장과 산에 들렸다가, 같이 북쪽으로 가자. 나 혼자 움직이는 건 힘들 것 같아.”
베릭이 귀를 쫑긋거리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크게 손뼉 쳤다. 이안의 결정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듯이.
“그치? 그게 맞아.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런 꼴로 돌아댕겼다가는 바로 도적놈들한테 털리지. 암암.”
그러곤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이안의 접시 위로 옮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꼭꼭 씹어서 모두 먹으라는 표정이다. 이안이 알겠노라 웃자, 베릭이 따라 웃었다.
“근데 너, 심연 갔다 온 것치고는 되게… 뭐랄까…….”
온전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생각보다 멀쩡하다 해야 하나? 심연이란 끔찍한 지옥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 궁금증.
“심연은 뭐였어?”
베릭의 뜻을 알아챈 이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나지막이 대답했다.
“세상의 온갖 어둠이 있는 곳이었어. 그래서 내 어둠도 거기에 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