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84
제484화. 전서구를 보내다
다음 날 아침.
이안은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몸단장을 제대로 하여 거울을 들여다봤다. 금발에 녹안인 서자 이안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브라츠 저택에서 보았을 때와 비교하여도 별 차이 없을 만큼 고돼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유독 눈동자는 힘 있게 반짝이는 듯했다.
이안은 거울을 볼 때마다 심연에서 보았던 신과 마주하는 기분인지라,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지 얼굴 보고 웃네. 얼탱.”
“베릭. 준비는?”
“아직. 펜이랑 종이는 마땅한 게 없고, 배낭 새로 채우고 있어. 어제 우리가 많이 먹긴 했나 봐. 주방이 텅텅 비었다.”
“그래? 적당히 채워. 어차피 시장을 들렀다 갈 것이니, 필요한 것은 나가서 사면 된다. 들고 다니기도 무겁잖아.”
아까 전, 베릭과 시종들의 소란이 꽤 시끄러웠다. 금화 열 개 몫을 단단히 챙기려는 것인지, 베릭은 와인 창고까지 털어대며 배낭 자리를 만들라 소리쳤고, 시종들은 천 찢어진다며 기함해댔다.
생글생글 웃는 것으로 보아, 해결책을 찾았나 보지. 이안은 배낭 옆으로 덧대어진 허접한 천때기를 보며 시종들이 고생 좀 했구나, 싶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배낭은 이안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참나, 나를 뭐로 보고. 훈련할 때 이런 거 열 개씩 지고 뛰었어.”
“랑드뢰는?”
“어젯밤부터 계속 기절한 척하는데, 어떡할까? 죽이고 갈까? 새끼가 하는 짓이 꺼림칙한 게, 영 별로라.”
인신매매를 익숙하게 하고, 살인에 거리낌이 없는 작태. 확실히 동의하는 바였으나, 이안은 소매를 단정하게 정리하며 일렀다.
“우선은 살려두어라.”
“왜?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지.”
“우리에게는, 특히 베릭 너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어. 전하의 성인식과 즉위식을 앞둔 지금, 떨어지는 이파리조차 조심하여 잡음 만들지 않을 필요가 있다. 황궁친위대가 제국민을 죽였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소문이 몸집을 부풀려, ‘죄 없는 제국민을 죽였다’로 둔갑하면?
실체 없는 소문을 믿으며 살아가는 아둔한 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당장 보이는 문제는 없겠지만,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아니라, 진을 위해서.
“전서구로 중앙에 조사단을 파견해달라 할 것이다. 인근 시장에서 노예 매매가 이루어진다고 하니, 수비대 역할이 유명무실하다는 뜻이겠지. 전체적으로 뒤집어엎을 필요가 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예예. 아, 그리고 이안아. 이것 봐라.”
베릭은 문밖에서 발로 무언가를 끌어왔다. 잡다한 것들이 스윽, 방으로 대충 굴러들어왔다.
저것이 무엇인데? 이안이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모두 고철 덩어리에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데라족들의 물건이다.
“들어보니까 얘들, 두더지족 물건 많이 훔쳐 왔다고 하더라. 산 올라갈 때마다 종종 있었던 일이라 하더라고. 특히 그 홋인가, 핫인가, 하는 놈이.”
이안은 손수 쪼그려 앉아 물건을 뒤적거렸다. 대부분 무엇에 쓰는지 짐작할 수 없었고, 짐작한다 한들 실패작으로 보이는 게 대다수였다. 이런 식으로 고물을 수집하여 시장에 내다 파는 게 또 쏠쏠한 수익이었던 것 같다.
베릭은 혀를 끌끌 차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두더지족의 알통을 떠올렸다.
“겁대가리도 없지. 일반인이 망치로 대가리 맞으면 그대로 뒈질 건데.”
“베릭. 그 뒤에 있는 것도 이쪽으로.”
“아, 이거? 안 그래도 어디서 본 것 같다 했어.”
이안은 두 손으로 아주 익숙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드리퍼다.”
일종의 자동기록장치. 일정한 시간마다 점이 찍히는, 자동공정기계의 초석. 이안이 황제였던 시절에도 대대적인 혁명 기술로 분리되어 연구되던 중요 분야의 핵심 부품이었다.
베릭이 이것에 익숙함을 느끼는 이유 또한 이안은 알고 있었다.
“베릭, 너도 본 적이 있어. 아주 오래전이라 그래.”
“언제?”
“브라츠에 있었을 때. 리엔 메렐로프 부인이 선물로 준 적 있거든. 내가 중앙으로 올라올 때 함께 가져왔으니, 음. 로만드로 님이 내 짐을 버리지 않았다면 아직 저택 어딘가에 있을 게다.”
“버리긴 뭘 버려. 2층 네가 쓰던 방, 아직 그대로 있는데.”
이안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베릭을 올려다봤다. 장장 10년이었다. 아이도 자랐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를 위한 방도 필요할 터인데, 그 방을 그대로 두었다니?
“비비가 아직 어려서 작은 방 쓰거든. 좀 더 크면 뭐, 옮기든지 하겠지만.”
“…방세가 많이 밀렸군.”
“어. 너 가서 소처럼 일해야 해.”
이안이 희미하게 웃자, 베릭이 손에 든 드리퍼를 이리 내어달라 손짓했다.
“아무튼, 그것도 가져간다는 거지? 배낭 자리가 있나 몰라. 또 주머니 덧대라고 할까?”
“음.”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가진 것과 똑같은 드리퍼. 분명 최근에 훔친 것일 터였다. 아니었으면 랑드뢰가 진작 팔아 고물값을 벌었겠지.
그때, 문득 이안의 머릿속에 한 가닥 실마리가 잡혔다.
‘…10년 전 그때와 지금의 드리퍼가 똑같이 생겼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안은 물건을 베릭에게 건네주며 부탁했다.
“아니,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면?”
이안이 황제였던 시절. 드리퍼는 제작하기 가장 까다로운 부품 중 하나였다. 장인(匠人) 수십이 장장 수년을 달라붙어야 고작 한 개를 만들 수 있었으니.
10년 전 선물받았던 그 드리퍼는, 도난당하기 전까지는 분명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이었을 터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 또한 세상에 단 하나뿐이란 뜻.’
“부숴.”
“엥?”
데라족이 10년 동안이나 매달렸음에도 발전시키지도, 포기하지도 못한 자동기록장치. 혹여 이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드리퍼라면? 또다시 새로이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면?
중앙에 있는 자신의 드리퍼가 데라족과의 연결고리로 변모하지 않겠나?
“부숴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 * *
늙은 당나귀를 타고 한 시간.
라자산 둘레를 따라 이동한 터라, 보이는 것이라고는 풀과 언덕 그리고 들꽃들밖에 없었거늘. 시장 인근에 도착하니 희미하지만 확실한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은 심연에서 나와 처음으로 10년 후의 바리엘을 목도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랑드뢰의 저택이 진정으로 외진 곳이었음을 깨닫기도 하였고.
“들나물 사세요. 싸게 팝니다.”
“복권 한 장에 동화 두 개. 물물교환 가능합니다.”
“이봐! 왜 남의 자리에 와서 그래?”
“네 자리, 내 자리가 어딨어? 영주님라도 되시나?”
“손님! 여행객? 싸게 해 줄게요. 여기서 묵어요.”
가게는 보기 드물었고, 좌판이나 가판대를 세워두고 물건 파는 노점상이 대부분이었다.
이안과 베릭은 로브를 더욱 깊게 눌러 쓰며 주위 시선을 피했다.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신문 파는 아이. 누런 신문을 휘적이며 소리쳤다.
“신문 사세요! 중앙에서 갓 들어온 소식입니다! 이거 진짜 엄청난 일이에요! 황궁에서 일어난 일이거든요! 궁금하면 신문 사서 읽으세요!”
중앙이었다면 너나 할 것 없이 한 부 달라며 손을 뻗어댔겠지만, 이곳은 놀라울 정도로 모두가 무관심했다. 중앙을 아예 다른 나라라 생각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 이안은 베릭의 옆구리를 쿡 찔렀고, 이어 베릭이 손을 들었다.
“여기! 신문.”
“예예. 안녕하세요, 여행객이신가 보네요.”
“얼만데?”
“동화 한 닢입니다.”
베릭이 값을 치르는 사이, 이안이 먼저 신문을 받아 보았다.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황제의 서거 소식.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있던 황제의 병환이 갑자기 악화하여, 결국 승하하셨다는 내용이 주였다.
‘전하께서 동결을 푸셨구나.’
아비의 숨을 끊어내는 것으로 바리엘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신 게라.
동결 후 얼마 있다 서거하였을 터이니, 러더포드의 존재와 무관하게 먼저 결단을 내린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왜 그래? 뭔 일 있어?”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
“그래? 오래 살았지.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 하고. 아, 그럼 황궁 지금 바쁘겠네. 나와 있는 게 다행인 건가?”
잔돈을 고르던 신문팔이 아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궁에서 나왔다는 베릭의 말에 집중한 것이다. 이안은 재빨리 아이에게 말을 붙였다.
“인근에 전서구를 취급하는 곳이 있을까?”
보통은 우편물 취급하는 곳에서 전서구를 함께 관리하고는 하였다. 중앙처럼 발전한 곳이라면, 하급 마력석까지 말이다.
하나, 아마 여기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 비둘기 두어 마리 놓고 장사하는 가판대를 상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것만 해도 이안에겐 충분했지만.
“전서구요? 음,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이는 두 사람을 골목 안쪽으로 안내했고, 이안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텅 빈 새장들이 줄지어 놓여있는 점포 천막이다.
촤악!
“여기라고? 정말?”
“어이고, 손님이네. 어서 오십시오. 뭐, 보내실 것 있습니까?”
베릭이 새똥 냄새에 코를 쥐었다. 녹슨 철창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늙은 비둘기 두 마리. 날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볼품없다.
베릭은 이안을 돌아보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안 되겠다. 이안아, 얘들 날아가다 죽겠다.”
“무슨 말씀을! 이래 봬도 아직 팔팔한 놈들입니다.”
“장난하나. 구워 먹으라 해도 못 먹겠구먼.”
“베릭.”
이안은 자중하라는 뜻으로 베릭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장은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랜만에 온 손님을 놓칠 수는 없는지 인내심 있게 대했다.
“황궁으로 보낼 것이라, 과정에 문제가 없어야 하네. 보장할 수 있겠는가?”
“화, 황궁이요?”
엄청난 목적지에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돈이 된다는 걸 깨닫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만, 황궁으로 바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전서구들이 길도 모르고, 마력석도 없거든요. 중앙에 있는 우편국을 중간 거점으로 삼아서 보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마력석은 내가 있어.”
베릭은 괜한 걱정하지 말라며,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딸깍, 신분증 옆부분을 누르니 일부분이 떨어져 나오며 작은 마력석 하나가 딸려 나왔다.
“근데 저것들이 날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혹, 육로로 보내는 방법은?”
“보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수비대원들이 중앙으로 보급품을 받으러 올라갑니다. 그때 같이 보내시는 방법밖에 없어요. 아니면 사람을 따로 구해야 하는데, 다들 어지간하면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는지라. 썩 안전하진 않지요.”
수비대원들은 안 된다. 우선 신뢰가 없고, 무엇보다 조사단을 파견해달라는 내용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혹 중간에 문제라도 생기면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이안은 꾸벅꾸벅 조는 비둘기 두 마리를 가만 쳐다보다가, 이내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방도가 없었다.
“한 마리 보내겠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종이와 펜을 빌릴 수 있겠나?”
“예예. 물론이지요. 원래 이것도 돈을 받는데-”
“받아. 뭣 하러 깎아줌?”
“아닙니다. 하핫.”
펜을 쥐려던 이안이 문득 베릭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베릭이 이리 혼자 나와 있는 것은, 이제 스스로 보고서를 써서 올릴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베릭,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어?”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대. 봐봐.”
스윽.
-ㅂ…ㅔ 릭. 보고 서 올림다. 길 잃었는데 이안이 만나서 북쪽으로 올라감. 아코렐라 마력증폭재 개 거ㅈㅣ 같으니까 압프로 ㅁㅏ시지 마라. 뒤진다. ㅈㅏ세한 내용은 이안이가 쓸 것임. v이상v.
베릭은 대충 보고서를 갈긴 다음, 이안에게 펜을 건네주었다. 다음은 네 차례라고, 어서 너의 존재를 모두에게 전하라고.
이안은 펜대를 만지작거리더니, 맨 처음 서두를 써 내렸다.
-진 황태자 전하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참으로 오랜만에 보고서 올립니다. 인사를 드리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간의 봄은 안녕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