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85
제485화. 라자산
짙고 울창한 이파리로 인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라자산 어딘가. 베릭은 배낭을 앞으로 메고, 이안을 업어 든 채 한 시간 가까이 등산 중이었다.
험한 산지라 맨몸으로도 오르는 게 쉽지 않거늘, 뒤에 업힌 이안이 별 불편함 없을 정도로 몸놀림이 가볍다. 호흡에도 문제가 없고, 발걸음 또한 느려지지 않는 것이, 배낭 열 개씩 메고 훈련했다는 게 괜한 소리는 아닌 게라.
이안은 동동, 제 발이 흔들리는 걸 보며 물었다.
“베릭.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어. 맞아. 흰색 나무에 짙은 이파리.”
“…여기 사방이 죄다 그런 것인데.”
“아니아니, 눈에 익은 건 딱 보면 알아. 왜? 배고파? 육포 꺼내 줄까?”
순간 간과하고 말았다. 베릭이 길치라는 것을.
산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두더지족을 모두 죽이겠다며 뛰어가던 뒷모습이 어찌나 자신 있어 보이던지. 이안은 당연히 베릭이 길을 알고 있을 것이라 믿은 게다.
물론 지금도 베릭은 스스로 길을 알고 있다 여기는 것 같지만, 뒤에 업힌 이안이 보기에는 턱도 없다. 이안은 베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렀다.
“내 생각에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서 길잡이 한 명 데리고 오는 게 나을 것 같다.”
“다 왔어, 진짜로.”
“해가 지면 내려가는 것도 힘들어져.”
그때, 베릭이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시선을 멀리 하곤 멈칫거렸다.
이안 또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제껏 봐왔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풍경이다. 나무와 수풀 그리고 구불구불한 흙길. 베릭이 말했던 거대한 구멍이나 전투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왔다.”
“무엇이?”
“두더지 새끼들 시선. 느낌이 딱 왔어.”
베릭은 이안을 내려주며 조용히 속닥거렸다. 자세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두더지 외형에, 서식지는 땅굴이라. 혹여 흙 아래 있을지도 모르겠다. 베릭은 발을 크게 울리며 소리쳤다.
“나 알지, 두더지 새끼들아!? 대가리 까인 값 갚으러 왔다! 이번에는 정정당당하게 내가 먼저 후려칠게!”
“베릭. 정정당당히가 아니라, 공평하게.”
“공평하게! 내가 선빵!”
이안은 베릭에게 손짓하여 흥분을 가라앉히라 일렀다. 마검사의 능력으로 시선을 감지한 것 같은데, 이안은 산짐승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력과 신체 능력이 바닥을 친 것이다.
이안은 조심스레, 베릭이 보는 쪽을 함께 보며 알렸다.
“라자산의 주인, 데라족은 거기 있는가?”
“두더지 새끼들아아아!”
“우리는 황궁의 명을 받든 사자(使者)들이다. 서로 오해가 좀 있는 듯한데,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우리는 그대들과 대화하길 원해.”
“나와아아! 비겁하게 또 뒤통수 노리고 있냐아!”
“베릭, 조용히.”
“…나오라고오. 십새들아아.”
이안의 경고를 받은 베릭이 조곤조곤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이 없다. 아무리 폐쇄적인 종족이라고는 하나, 바리엘에 있는 한 황궁의 존재를 무시하기는 어려울 터. 베릭이 보란 듯이 신분증을 흔들고 있었으나, 주위는 고요했다.
“베릭. 데라족을 느낀 게 확실한가?”
“당연하지. 지금도 보고 있는데?”
흐음. 뭘까. 이안이 잠시 고민하며 턱을 매만지는 순간이었다.
정면에서 무언가 반짝, 하고 깜빡거렸다. 그것의 형태를 인지하기도 전, 어떤 단단한 것이 이안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촤아악!
“이안아!”
“아.”
그리고 세차게 끌어당기는 힘. 이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고, 나무 몸통에 새겨진 여인의 얼굴과 마주했다.
‘드라이어드!’
나무의 요정이자, 나무와 운명을 같이하는 자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꽤 공격적인 성정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안은 반항하듯 힘을 주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몸이 끌려갔다.
“이 씨발!”
지이잉! 지잉!
베릭은 반사적으로 마력을 개방하여 흑검을 꺼내 들었다. 안 그래도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애를 질질 끌고 가? 이런 미친!
그의 주위로 공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변했다. 타앗, 가벼운 발돋움에 흙과 돌멩이 그리고 이파리 따위가 거칠게 휘날리며 밀려났다.
“그거 안 놔!?”
이따위 별것 아닌 가지, 단번에 베어주마. 베릭이 망설임 없이 검을 내려치려 하자, 어디선가 망치가 날아왔다. 데라족의 것이다.
휘이익!
까앙!
이번에는 뒤통수를 내주지 않았다. 베릭은 곧바로 검궤를 틀어서 날아오는 망치를 쳐냈고, 이를 바득거렸다. 두더지족 새끼들이, 하필이면 지금 공격해오다니!
“베릭!”
“이안아, 잠깐만!”
바닥으로 넘어진 이안은 돌부리를 잡고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리엔 부인이 그때 무어라 했더라?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잡아먹고, 평생 한곳에만 뿌리내려 살아야 하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산 채로 흡수한다. 그것이 산짐승이든, 인간이든. 드라이어드 생존 방식인 것이라.
이안의 왼손이 미끄러지며 돌부리를 놓치는 순간, 베릭의 발목에도 줄기가 감겼다.
“와씨.”
또 다른 드라이어드다. 사방에서 시선을 느꼈던 게 데라족이 아니라 저것들이었구나. 베릭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하며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처먹을 거 안 처먹을 거 구분 못 하지!?”
그리고 바로 자세를 낮춰 중심을 반대로 옮긴 다음, 검을 휘두르려 했다. 정말 별것 아닌 줄기들이다. 이안이 저렇게 고생하고 있을 필요가 없는!
하지만 그때, 다시 망치가 날아왔다.
휘이익!
까앙!
“억!”
이번에는 관자놀이를 제대로 맞았다. 띠잉, 하는 골 울림과 함께 베릭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두 번 맞으면 기절인데, 그러면 기회가 없다.
베릭이 정신을 집중하여 마력 개방을 더욱 증폭시키는 순간이었다.
“꼴뚜기 새끼. 뭣도 모르고 자르려고 하지.”
“두, 두더지!”
“닥치고 있어라. 그냥 돌아가기 전에.”
“뭐라는-!”
데라족이 모습을 보였다.
터덜터덜, 멜빵 바지를 대충 걸쳐 입은 두더지가 주위를 슥 둘러보고선,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주워 들었다. 그러곤 이내 이안을 지나쳐, 드라이어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흡!”
다시금 그의 짧고 통통한 팔에 근육이 불끈 솟아올랐다. 그렇게 있는 힘껏, 드라이어드 얼굴에 망치질을 해대는 데라족.
까앙, 까앙. 몇 번 청명한 소리가 울리더니, 드라이어드의 나무줄기가 힘 빠진 것처럼 처지기 시작했다.
“아.”
풀렸다. 이안은 시퍼렇게 멍든 손목을 감싸며 겨우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데라족은 계속 뛰어오르며 드라이어드의 얼굴을 내려치는 중이었다.
“이게, 뭘 자르든 열매를 따든, 일단은 기절시켜주고 나서 해야 하거든. 안 그러면 고막 다 나가. 귀 찢어진다고. 과장하는 게 아니라, 몸이 좀 약하다 싶으면 눈, 코, 입에서도 피나 나올 정도지.”
까앙!
데라족은 이만하면 됐다는 듯, 베릭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는 눈을 부라리고 있는 꼴뚜기. 어휴, 저걸 도와줘, 말아? 고민하는 눈치가 다분했으나, 길게 가지는 않았다.
“황궁에서 나왔다고 하니 살려는 준다. 어?”
혹여 여기서 문제 생겼다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분명했으니까.
데라족은 베릭의 머리를 일부러 지그시 밟은 다음, 다른 드라이어드 얼굴을 내려쳤다.
까앙!
베릭의 발목 역시 풀려났다.
베릭은 나뭇가지를 거칠게 밟아 으스러트린 다음, 이안에게 달려갔다. 손목도 엉망이고, 끌려가면서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이안아, 괜찮아? 와씨, 거지꼴 됐네.”
“되었다, 베릭. 난 괜찮아.”
“이봐들. 황궁에서 나오셨다고?”
데라족이 망치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한껏 날 선 경고를 보냈다.
“뭔진 몰라도, 우리는 바리엘 시작과 함께 이곳에서 터를 잡았다. 삶을 어지럽히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무엇보다, 우리는 지난 일들에 있어서 피해자다.”
수인족인지라 더욱 경계하는 것 같았다. 인간들이 라자산을 시끄럽게 하고, 가끔은 물건을 훔쳐 가도 별다른 조치 없이 넘어간 이유 중 하나다.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한들, 두더지 인간의 주장을 그 누가 들어주겠나? 마물이라 하여 몰아내자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 아닌가?
“피해자라니. 진정한 피해자는 길 잃고 산에 들어섰다가 그대들에게 망치로 얻어맞은 내 부하가 피해자다.”
이안은 데라족의 입장과 상황을 단박에 파악했으나, 모르는 척 우선 잡아떼었다.
“…부하라고?”
데라족의 단춧구멍만 한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곤 또르륵, 이안을 보았다가 베릭을 연달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소년과 우락부락 성격 더러워 보이는 사내의 조합이거늘. 상관이 금발 쪽이라?
“…하긴, 말하는 본새로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시정잡배 같은 놈이 황궁 소속이라 하여, 나라가 망해가나 싶긴 했지.”
“뭐? 말 다 했어?!”
베릭이 버럭 달려들려고 하자, 데라족이 덤비라는 듯 자세를 취했다. 그들 사이로 가볍게 끼어드는 이안.
“리엔이라는 자를 아는가?”
“누구?”
데라족이 멈칫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게다.
폐쇄적이고 경계심 가득한 상대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적절한 외부 도움이 필요한 법. 이안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리엔. 이름은 바뀌었을지 모르나, 데라족의 기억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드라이어드의 피를 이었고, 직접 어머니를 베어 도망친 자지. 그대들과도 친했다 하던데?”
그리고 마지막, 관련 없는 자라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고철 덩어리의 이름.
“드리퍼도 전해 받았다고.”
“……!”
“서운해하지는 말게. 리엔 부인이 내게 신세 진 것이 있어 그걸 보답으로 받았어. 아무튼, 명성이 자자한 라자산의 주인을 보게 되어 반갑네. 통성명이나 하지.”
이안은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다. 저쪽, 그대에게 망치로 얻어맞은 자는 황궁친위대 마검사 베릭.”
넌 뒤졌다, 베릭은 입 모양으로 뻐끔거리며 두 손으로 욕설을 날려댔다. 그 모습을 본 데라족이 코를 찡그렸지만, 별다른 말 없이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핌.”
“이름 한번 존나 이상하네.”
“네 얼굴이 더 이상하다.”
“어어? 이것 보소. 그쪽이 할 말은 아니지!”
핌은 베릭을 가뿐히 무시하고서 고잿짓했다. 리엔도 그렇고, 무엇보다 드리퍼에 대해서 듣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상처 치료할 것들이 있나?”
“당연-! 읍!”
베릭은 우리를 뭐로 보냐며, 상비약 따위는 저 엄청난 배낭에 가득 있다고 외치려 했다. 이안이 단박에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도와준다면 고맙게 생각하지.”
“이쪽으로.”
스윽.
핌은 앞장서서 수풀을 헤쳤고, 이안은 베릭에게 눈짓으로 배낭을 들라 명령했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는 데라족. 그들의 땅굴로 초대받은 것이다.
* * *
서류를 정신없이 정리하던 로만드로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창밖이 밝구나. 천천히 움직이는 나뭇가지들로 인하여 따뜻한 바람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정오의 햇살은 이안의 빈자리를 바로 내리쬐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깔린 먼지가 그대로 보였다. 닦는다고 닦아도, 앉는 사람이 없으니 저렇다.
로만드로가 닦을 만한 것을 찾는 순간.
똑똑.
“로만드로 님. 바쁘십니까?”
“으응? 아닐세.”
“곧 있으면 대회의 시간이라 알려드립니다.”
“그래. 고맙네. 같이 가지.”
“아, 그리고…….”
로만드로는 옆구리에 서류를 끼워 넣고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이다.
“왜 그래?”
“좀 이상한 전서구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이상한?”
“예. 아무래도 확인 먼저 하신 다음, 전하께 보고하시는 게 좋겠는데요.”
로만드로는 부하가 건네준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다. 꼬깃꼬깃, 어딘가 모르게 작성자의 사연이 잔뜩 묻어있는 듯한 종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