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89
제489화. 데라족의 땅굴
“로엘. 어렸을 때 대사막에서 산 적 있다고 했지? 그때 보았던 것들 좀 들려줘. 난 사막을 본 적 없거든.”
비비가 잔디밭을 데구루루 굴러오더니, 로엘의 무릎을 베고 누었다.
책을 읽던 로엘은 멈칫한 것도 잠시, 자연스럽게 비비의 볼에 붙어있는 잎사귀를 떼어 주었다. 그러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금빛 모래.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떠올렸다던, 사막의 홍수.”
“그게 뭔데?”
비비가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으나 답이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익숙한지, 비비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하늘로 뻗어 구름 잡는 시늉을 했다.
필리아와 비비안나가 찻잔을 들며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 대에 같은 여자아이. 성격은 정반대지만, 둘은 예상보다 훨씬 잘 맞는 듯 보였다.
“우리 애가 로엘을 귀찮게 하네요. 미안해서 어째.”
“아니요. 로엘이 비비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혹 로엘이 비비에게 무례를 범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제 기우였네요. 비비가 참 성격이 좋아요.”
“참, 오후에는 같이 의상실 나가볼까요? 진 전하 성인식 때 입을 드레스가 마땅치 않다고 하셨지요?”
“네. 내일은 출근이시니 오늘이 좋겠네요. 이전에 가던 곳을 계속 다니시나요?”
“어우, 바뀐 지 오래예요.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그렇구나. 필리아는 새삼 흘러간 10년을 헤아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책 읽던 로엘이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저택 입구 쪽을 쳐다봤다. 무릎을 베고 있던 비비 역시 마찬가지.
“왜 그래?”
아무것도 없는데?
비비가 의아해하며 일어서려는 순간, 모퉁이를 꺾어 들어오는 갈색 말 한 마리. 마법부 깃발이 꽂혀있었다. 타닥타닥! 기수는 울타리 앞까지 다가와 말을 바짝 대고는 소리쳤다.
히이잉!
“필리아 님! 필리아 님 계십니까? 마법부에서 나왔습니다! 로만드로 님의 급서입니다! 직접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외침에 필리아와 비비안나가 서로를 멀뚱히 쳐다봤다. 보통 전언할 것이 있으면 아내인 비비안나를 통하지 않았나? 필리아는 서둘러 찻잔을 내려놓고서 쪽지 한 장을 건네받았다.
“그럼, 이만.”
마법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황궁에서 나온 기수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몸을 돌린다는 건, 그만큼 다급하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비비안나 역시 걱정스레 필리아 옆으로 다가왔고, 이내 함께 쪽지 내용을 확인했다.
“어머!”
먼저 소리친 것은 비비안나였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안 히엘로가 살아있고, 현재 베릭과 함께 중앙으로 돌아오고 있다니! 비비안나는 필리아를 얼싸안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부인!”
“…….”
“세상에, 네르사른 님, 나와보십시오! 경사입니다! 로엘, 네 오라버니가 살아서 돌아왔단다. 이안 히엘로, 마법부 장관께서 말이다! 네르사른 님!”
오오, 대박. 그 말로만 듣던 이안 히엘로? 비비는 두 손으로 엄지를 치켜들었고, 로엘은 별다른 반응 없이 책만 덮을 뿐이다.
비비안나가 네르사른을 부르기 위해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필리아는 울타리를 짚고서 몸을 휘청거렸다.
“으앗, 부인! 괜찮으세요?”
“비비, 미, 미안한데 무, 물 한 잔만…….”
“잠시만요! 엄마! 엄마아아!”
필리아는 숨을 힘겹게 내쉬며 가슴 부근을 붙잡았다. 너무 놀랍고, 믿을 수 없어서 세상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온전히 서 있기 힘든지라, 필리아는 주저앉아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부여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아들의 숨을 거두어주시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한순간 사라졌던 제 인생의 의미가 다시 돌아왔음에 감사합니다. 자식의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앞으로 이안이 어떤 길을 나아가든 좋습니다. 영원히 이안의 뒷모습만을 지켜보아도 좋습니다. 믿고 의지하여, 그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저는 만족하겠습니다…….
“어머니.”
로엘이 무릎 꿇고 어미의 손등에 작은 손을 대자, 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턱선을 타고 뚝뚝 흐르는 눈물. 아이는 그런 제 어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로 족합니다.”
“…로엘?”
“신께서는 인간의 뜻을 아득히 넘어 행동하시니, 감격에 젖어 기도했다간 가끔 곤란해질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필리아가 코를 훌쩍거리며 자세히 설명해달라 쳐다보았지만, 아이는 어미의 눈물만 훔쳐줄 뿐이다.
필리아는 천천히 로엘을 끌어안았고, 아이는 순순히 안겼다. 어미는 아이의 어깨에 숨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중앙에 오길 정말 잘 했다. 혹, 히엘로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올라오는 보름이 정말 길게 느껴졌을 것 같아.”
“예. 중앙에 계십시오. 벗어나면, 오라버니를 보기 힘들어집니다.”
“로엘. 또 무엇을 보았어?”
“…….”
필리아가 로엘의 어깨를 잡으며 간절히 물었으나, 아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슬그머니 옆으로 떨어지는 시선. 평소 같았으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어미의 눈물을 앞에 두고 침묵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베릭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응?”
“이러나저러나, 잘 하겠지요. 우리는 걱정 말고 기다려요. 어머니.”
로엘이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필리아는 더 묻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그래. 이안이 돌아올 것이라 스스로 일렀고, 그 옆에는 베릭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나? 눈매를 따라 눈물이 계속 흘렀지만, 필리아는 개의치 않고 더 크게 웃었다.
* * *
그 시각.
이안은 얼큰하게 취해서는 목청껏 노래 부르는 베릭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베릭은 반쯤 꺾인 망치를 부여잡고, 한쪽 발은 나무 상자에 걸친 채였다. 저 망치가 제 머리를 후려쳤다는 걸, 까먹은 걸까?
노래 부르는 베릭 옆으로 핌의 식구들, 데라족이 바글바글 몰려들어 연신 손뼉을 쳐댔다.
“최-고의 전사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안 비키면 궁둥짝 불나게 때려주마! 으짜짜짜!”
“으짜짜짜!”
“크으. 생긴 건 엉망이어도 노래 하나는 잘하는군! 이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시끄러! 노래 중에 누가 말을 거나?”
“베릭이래, 베릭. 이래서 세상은 공평하다니까. 얼굴은 아작 났는데, 노래 실력은 작살 나는군!”
“아하하하! 술 한잔 더 마실 텐가?”
“어! 주라! 나는 잔으로 안 마셔!”
“오오오. 좀 마실 줄 아는 놈일세.”
저 술이 문제다.
데라족의 땅굴은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데다, 한 명이 다섯 개의 용광로를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땅굴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덥다고 찡얼대던 베릭. 시원하게 목 축이라 건네준 술에 저리 취해버린 것이다.
핌은 베릭을 힐끗거리며 이안의 손에 붕대를 꼼꼼히 감아줬다.
“그래도 안 곯아떨어지는 게 용하군. 우리가 먹는 술은 도수가 상당한데.”
“베릭도 애주가라서.”
“못생기고 성격 더러운 것 빼고는 쓸 만하다.”
상당히 흥미롭다. 필리아의 결혼식에서 노래 한 소절 했다가 쫓겨날 뻔한 베릭이다. 그런 그의 노래를, 듣기 좋다며 환호하다니.
드라이어드의 비명과 깡깡 울리는 제련 소리만 평생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데라족의 심미적 기준이 일반적이지 않은 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베릭이 저리 풀어진 덕에 데라족과의 만남이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대놓고 적대했던 핌조차 저 말도 안 되는 화음에 콧노래를 흥얼거렸으니.
이안이 약초로 푹 절여진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자, 지켜보고 있던 다른 데라족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황궁에서 왔다고 했지? 저자도 황궁 사람이고?”
“그렇네. 나는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저자는 황궁친위대 베릭일세.”
이안은 베릭과 놀고 있는 데라족이 모두 젊은 축에 속한다는 걸 알아챘다. 핌을 포함하여, 이안 곁에 앉은 자들은 차분하게 코를 찡긋거렸다.
“그래. 어떤가? 데라족의 땅굴에 들어온 소감이.”
“음…….”
땅굴이라기보다 동굴에 가까운 느낌이다. 십수 미터에 달하는 높은 천장과 수백 년 동안 숨 쉬는 고목 뿌리가 기둥을 대신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고철 덩어리는 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안이 보기에는 공간 구분이 거의 없어 보였다. 모두가 무언가를 만드는 데 인생을 건 것처럼, 먹고 자는 생활 행위 자체가 배제된 듯한 흔적이다.
“보물 창고 같은데.”
“뭐? 아하하하! 그래, 맞지! 여기는 보물 창고다! 번쩍번쩍한 것이 가득하니까!”
데라족의 자부심을 그대로 존중하는 감상이다. 그들은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게 술병을 흔들었다. 그에 맞춰, 까앙! 깡! 어디선가 망치질이 울렸다.
“술 한잔하시겠는가?”
“정중히 사양하네. 베릭이 이미 취해버려서.”
이안은 후덥지근한 열기를 느끼며 웃옷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이에 핌도 납득했다.
“데라족 외 사람이 있기에는 적합한 환경이 아니긴 하지.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볼까?”
“좋아.”
“드리퍼를 정말 가지고 있나?”
드리퍼! 핌의 질문에 데라족이 코를 꿈찔꿈찔거렸다. 이안은 누군가 건네주는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하다. 그대들이 만든, 일종의 자동기록장치 아닌가? 일정 시간 간격마다 자동으로 점을 찍어대는.”
“맞아! 그게 어떻게 자네 손에 있지?”
“리엔 부인을 통해서라고, 핌에게는 이미 설명했는데.”
이안이 핌을 바라보자, 핌이 말을 덧붙였다.
“드라이어드와 인간 사이에서 난 여자아이.”
“아? 아아! 기억나는군. 몇 년 전이지? 20년 전?”
“그 정도는 아닐걸? 제 어미 베고 도망친 아이 말하는 거 맞지? 기억 나. 잘 지내고 있나? 그때만 하더라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것 같은데, 음음. 리엔이라. 아주 좋은 이름을 얻었군.”
“물론, 부인은 잘 계시지. 메렐로프 영지를 다스리고 있을 터이니.”
“뭐? 세상에, 살다 살다 원. 허허! 그때 걔 덕분에 열매 따는 게 참 쉬웠어. 아이가 있으면 망치질하지 않아도 드라이어드가 사납게 굴지 않았잖아.”
“맞아맞아. 그래서 산 내려갈 때 우리가 드리퍼를 선물로 줬나 보군.”
“누가 그때 그걸 줬데? 차라리 다른 걸 주지!”
데라족이 리엔 부인을 떠올리며 반가움의 소란을 피워댔다. 이안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드리퍼가 필요한가?”
“어? 어어. 드리퍼 자체보다는, 그걸로 만들어내려는 게 있거든.”
그게 뭐지? 이안이 궁금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데라족은 알려줄 생각이 없는지 말을 돌려댔다. 아직 그 정도로 마음을 연 건 아니라는 게다.
“예전에는 어렵지 않았거든. 실패하면 또 다른 드리퍼를 만들어서 시도하고, 부수고, 다시 만들고. 근데 언제였지? 어느 날부터 필요한 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더라고.”
“버고스에서 수입해 들어오는 거라 그런가?”
“그쪽 나라 개판 난 이후로 그런 것 같았으니까.”
데라족이 턱을 괸 채 심각하게 중얼중얼거렸다.
“재활용해서 쓰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그렇게 드리퍼가 딱 하나 남았는데, 망할 놈들이 훔쳐가서는, 원.”
“이번에는 가만있지 말자니까? 찾아오자!”
“안 돼. 산 밖으로 내려갔다간 죽을 지도 몰라.”
“우리가 마물도 아닌데, 뭐 어때? 공격하면 우리도 맞서 싸우자!”
데라족들이 주둥이를 이리저리 뻗으며 각자 주장했다. 이들 사이에서도 의견 대립이 좀 있나 보다.
열기가 과열되자, 이안이 진정하라며 천천히 손짓했다.
“안타깝지만, 그대들의 마지막 드리퍼는 파손되었네.”
“뭐?”
“내가 같은 것을 갖고 있어서 알아볼 수 있었어. 완전히 파괴된 채로 고철 덩어리와 뭉쳐져 있던데.”
데엥. 데라족은 작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충격받은 것 같았다. 입까지 벌어지니, 손톱만 한 앞니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이, 망할 것들!”
“주, 죽여-!”
다들 격분하며 망치를 찾으려는 찰나. 이안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한다면 내것을 줄 수도 있어. 그리고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 재료 수급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곤 가까이 있는 망치를 자연스럽게 제 손에 가져왔다.
베릭을 단 두 방만에 기절시킬 만큼 위력이 강한 이 무기. 혹여 이것을 대량으로, 황궁 병사들에게 보급한다면 어떨까?
“어때? 내 드리퍼를 받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