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92
제492화. 오래 걸린 인사
“엥? 뭐여?”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베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맛이 이상했다. 마치 물이라도 탄 것처럼 말이다. 그는 이안에게 마셔보라고 권해볼까 하다가, 앳된 얼굴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안은 닭고기 살을 깔끔하게 발라내며 의아하다는 듯 속삭였다.
“베릭, 왜 그래?”
“몰라. 술에 물이라도 탔나. 맹맹해.”
“여행자분들이세요? 아니면, 황궁 출신?”
콰앙!
베릭이 입을 비죽거리며 중얼거리자, 주인장이 대접을 상에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인심 좋은 웃음을 띠고 있었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베릭의 시선은 곱지 않다. 다른 건 몰라도 술에 물 타는 건 반칙이지! 베릭이 따지려고 하자, 이안이 가볍게 저지했다.
“황궁에서 나왔소.”
“그렇지요? 오호홋! 그럴 줄 알았어요. 배우신 분들은 꼭 닭고기를 그렇게 발라서 먹더라. 여기 인근에서 멀끔하다 하시는 분들은 다 중앙 출신이에요. 마법사들도 많고요. 아, 혹시 그쪽도?”
“북쪽 장벽으로 가는 길이긴 하지.”
“앞으로 자주 만나겠네요. 근처에 술집이라고는 저희 집밖에 없거든요.”
여기 하나밖에 없다고? 어쩐지, 휑하더라.
베릭은 처음으로 마음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헤일 대장과 마법부 자식들, 이따위 거지 같은 술 먹고 지냈구나. 사는 낙이라고는 개뿔도 없었겠네. 베릭이 혀를 끌끌대자, 이안이 나이프와 포크를 쥔 채 싱긋 웃었다.
“그렇군. 알겠네. 그럼, 이제 식사 좀 해도 될까?”
“오호호! 재밌는 손님이시네. 돈 주고 먹으시는 거니 드셔도 되지요.”
“내 말은, 그만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일세.”
“어머. 내 정신 좀 봐. 호호호.”
부드럽지만 단호한 제안에, 주인장은 식기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들고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베릭이 아예 몸을 돌리곤 속닥거렸다.
“이안아. 어서 중앙 가자. 여긴 있을 곳이 못 돼.”
“한 번으로 충분한 식당이긴 하다.”
“맛대가리 더럽게 없지? 애들 만나자마자 가?”
“아니. 우선 북쪽 지대 균열 상태와 이드갈 사용 방법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릭, 네 임무가 남아있잖아. 아탄족과의 접선.”
“아오. 걔들 알아서 살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되지. 존재 자체가 의미 있는 자들이다. 어떻게 해서든 제국에 이득 되게끔 회유하는 게 옳아.”
마물을 먹어 치우며 강한 힘을 축적하는 이들이다. 균열 아래 마물과 함께 서식하는 지하신에 대적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전력이라는 게다.
물론 반대로 바리엘에 등을 돌린다면 그만큼 위험한 자들이니, 제일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크겠지만.
“베릭. 다 먹었으면 슬슬 일어나자.”
“뭐 먹은 것 같지도 않네, 젠장. 주인장! 여기, 돈!”
“예예, 감사합니다!”
티잉! 베릭은 동화 몇 개를 튕겨주었고, 이내 묶여있던 말 등에 배낭을 올렸다.
드넓은 평지가 탁 트여있는 마을이다. 곳곳에 나무판자 구조물이 서 있긴 하지만, 실사용 중인지 아닌지 모호하다. 그만큼 평화롭고, 말라비틀어진 풍경. 바리엘의 국경 끄트머리이자 마물이 나오는 북쪽 지대인지라, 사는 사람이 거의 없어 보였다.
“말 위에 올려줄까?”
“아니. 천천히 걸어가자. 지도를 보아하니, 얼마 안 걸릴 것 같아. 아까 주인장도 그리 말했고.”
“그러시든가. 근데, 이안아.”
“응?”
히이잉!
두 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말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 마법부 별채 지어지면 돌아온다고 했었잖아. 근데 그거, 아직 짓고 있거든. 버고스에서 뭐가 안 들어온다나.”
“…그랬어?”
“이제 상관없나?”
베릭은 이안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예전부터, 그러니까 진 황태자가 황자였던 시절부터, 별채에 대한 이안의 집념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진에게 그걸 지으면 일찍 돌아온다고까지 말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지나갔다. 이안은 심연에서 돌아왔고, 그 안에 어둠을 두고 왔다 하였으니, 별채 건설은 더는 의미가 없는 것인지 궁금한 게다.
이안은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상관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내 목표가 아니라, 과정을 겪어내면 자연스레 주어질 결과라는 걸 알아. 그러니-”
‘답이 오기를, 그쪽으로 오면 기회를 열어준다고 하였습니다…….’
이안은 문득 나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별채가 완공되는 날, 이안에게, 그러니까 자신에게 무슨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일까.
“아.”
그때, 이안의 사념을 단번에 잘라버리는 기운. 심장 한쪽이 크게 요동치며, 모든 감각이 만개하는 느낌이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고, 이내 반짝거리며 날아오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베릭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손날로 햇빛을 가리더니, 마법사들을 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어이! 어떻게 알고 마중 나왔데!?”
라자산에서 코앞에 있던 데라족의 인기척은 느끼지 못했지만,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마법사들은 느낄 수 있구나.
마치 청명한 하늘에 별들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천천히 고도를 낮추더니, 이내 언덕을 제 발로 구르며 떨어졌다.
촤아아악!
쿠우웅!
“으아아악!”
“아오, 허리!”
마법사들은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며, 온갖 풀때기를 한가득 뒤집어쓴 채 겨우 멈췄다. 그러곤 땅을 짚어 상체만 겨우 일으켰는데, 눈앞의 작은 소년과 눈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길잡이가, 마법사들의 장관이 돌아왔다.
사라졌던 그날 모습 그대로.
“다들, 잘 지냈는가?”
이안이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마법사들은 환상이라도 마주한 것 같았다. 몇몇은 인지하지도 못 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안 님?”
“그래. 칸치. 머리가 많이 길었구나.”
“이, 이, 이안 님 맞으십니까?”
“옌. 너는 옌이 맞지? 네가 나를 보는 것과 같이 나도 너를 보고 있단다.”
“어째서, 어, 어째서…….”
이안은 무릎 한쪽을 꿇어, 옌의 머리에 붙은 풀을 떼어주었다. 눈높이가 맞으니, 현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안의 녹안을 들여다본 마법사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저 안에, 그들의 10년이 멈춰있다.
“어째서 지금 오셨습니까.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이안 님이 없어서, 우리 모두 힘들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참으로 고생했어.”
마법사 서넛이 엉엉 울음을 터트리자, 이안이 그들을 껴안으며 토닥였다.
어째서 이안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 하여 다시금 저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
“이안 님. 저, 저…….”
이안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채 엎드린 마법사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날, 제가 이안 님께 그리 힘을 나눠주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안 님을 심연으로 밀어 넣고 살아난 것 같아, 저는, 저는 제 영혼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세월에 외관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이안은 마법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안이 러더포드와 함께 심연으로 가고자 모든 힘을 끌어낼 때, 마력을 보태주었던 자다.
이안은 아직도 그들의 외침이 생생했다.
“대장, 싫습니다. 저, 못 하겠습니다. 이안 님 심연으로 밀어 넣는 것 같아서-”
“이안 님!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발! 하지 마! 안 돼!”
누군가는 그를 보낼 수 없다 하였고, 누군가는 이안의 선택이니 존중하여 도와주자 하였지. 이안은 엎드려 우는 마법사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넘겨 주었다.
“…그대들 덕분에 나는 심연의 바다를 헤엄쳤고, 세상에서 제일 진귀한 것을 보고 왔어. 모두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결정이었다. 원망하려거든, 앞만 보았던 나를 원망하라.”
이안은 쓰러지던 마법사들의 그림자를 기억했다. 붉은 천을 휘날리며 하나둘 속절없이 쓰러지던 자신의 동료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지켜보았던 것은 분명 자신의 뒷모습이었을 터인데, 이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심연으로 나아가야 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하다. 나를 위해 죽어가는 그들에게, 나는 작은 시선조차 주지 못하는 못난 자였다.”
“어찌,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마법사가 고개를 들자, 이안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 마지막을 보았다면, 지난 시간 동안 그대가 이리 후회에 잠겨 있지는 않았을 터이니.”
온전한 나의 의지였다. 그러니 이제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모든 과거가 올바른 운명대로 지나왔음을 인정하자.
이안은 손수 마법사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웃었다.
“그래도, 이리 보아서 좋다.”
“예. 좋네요. 이안 님, 그때 그 모습 그대로라 더 좋습니다. 저 또한 시간을 거슬러 간 기분이라서요.”
“균열 아래에선 시간이 다르게 흘렀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심연에서 그러했다.”
“그러면 이안 님은 여기까지 오는 데 그리 오래 걸린 것이 아닌 거지요?”
“그래. 미안하게도.”
“아니요. 되레 다행입니다. 그 시간, 너무 길었거든요.”
마법사들은 옹기종기 이안 가까이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어깨를 기대고, 누군가는 손끝을 잡았으며, 또 누군가는 무릎에 이마를 대는 것으로 현실을 만끽했다.
이안은 그들을 다시금 껴안았고, 그러다 문득, 조금 떨어져 있는 헤일과 눈이 마주쳤다.
“헤일.”
“하아.”
그는 마른 궐련을 질겅거리며 제 이마만 연신 문지르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 탓에,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듯싶다.
이안이 이리 오라며 손짓하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원망하는 눈빛인 것 같으면서도,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진짜 뭡니까.”
“미안.”
“그리 사라지시면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그러게. 장관직을 그리 계속 비워둘 줄은 몰랐어.”
“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아있으면 또 볼 수 있다고, 아코렐라가 인사했었지. 옳은 말이었다.”
이안은 헤일에게 손을 뻗었고, 헤일은 마지못한 척 그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었다. 순간 무게가 너무 가벼워 멈칫했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라는 걸, 그때나 지금이나 인지하지 못했나 보다.
이안은 붙잡은 손을 가까이 끌고 와 어깨를 부딪쳤다.
“돌아왔다. 헤일.”
“기다렸습니다. 정말로.”
“우에엥. 이안 님.”
“다시 황궁으로 들어가시는 거죠? 그렇죠?”
“저희도 같이 가요. 여기 생활 못 해 먹겠습니다.”
“그래그래. 모두 황궁으로 모여, 상황을 다시 보자.”
“이안 님. 원래 키가 이렇게 작았습니까? 어흑.”
“정말 이게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가요? 너무 작아요. 아니, 다른 뜻은 없고요. 그, 믿기지 않아서요.”
“우리가 큰 게 아닐까?”
“성장판 닫힌 지가 언젠데, 양심 없게.”
“아아아! 이안 님! 진짜 보고 싶었습니다. 이안 님 없으니까 마법부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어요.”
이안을 가운데 두고 마법사들이 둥글게 몰려들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제각각 하고 싶은 말이 산처럼 쌓여있는 터라, 쉬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그저 웃으며 그들의 호들갑을 들어주었고, 참다못한 베릭이 말 위로 올라가 소리쳤다.
“이것들아! 나는 안 보여?”
그러자 잠깐 멈춘 소란. 하지만 찰나였다. 마법사들은 다시 이안에게 집중하며 조잘댔다.
“보여, 짜식아.”
“맞네. 저것도 있었네.”
“이안 님, 어쩌다 베릭이랑 만난 겁니까? 심연에서 나오자마자 고생 많으셨습니다. 식사는요?”
당분간 아주 피곤하겠군. 베릭은 턱을 괸 채 한숨 쉬었고, 다시금 중얼거렸다.
“다들 그만 쪼잘대고 이안이한테 마력이나 나눠줘! 쟤, 지금 빈 깡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