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93
제493화. 들판 위의 금빛
“마력이 아예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처음 느껴보는 바닥이다.”
“세상에.”
헤일은 자못 놀란 듯이 턱을 매만졌다. 심연에서 돌아온 이안이 어째서 황궁이 아니라 북쪽으로 올라왔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게다.
마법사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곤 이안을 찬찬히 살폈다. 외상으로 별문제 없어 보여 안심했거늘, 그게 아닌가 보다. 대체 심연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른 마법사도 아니고 이안의 마력이 동나버린 것인가?
“제 기억으로는 처음 봅니다. 이안 님 마력 못 쓰시는 거요. 심연에서 나온 지 며칠 되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안 님 정도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터인데요.”
“어디까지 가능하십니까?”
“마력을 개방하는 것조차 불가해.”
“이럴 수가.”
마법사들이 멈칫거리자, 베릭이 별 유난이라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심연에서 구르다 왔는데, 바닥 좀 칠 수 있는 거지, 뭐.
그 심드렁한 눈빛을 알아챈 마법사 하나가 단호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덧붙였다.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베릭. 이안 님은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크고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어. 하여, 모두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도 홀로 버틴 경우가 많았지.”
“그런데?”
“그런데 그게 완전히 바닥을 보였다는 거잖아. 마력 개방은 호흡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본능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게 불가할 정도라면…….”
마법사들이 동시에 이안을 돌아봤다. 모두 심각한 표정이건만, 이안은 여유롭게 미소까지 띠며 그들과 마주했다.
아아, 그만 좀 웃으십시오. 진지할 때인데 덩달아서 웃게 되지 않습니까. 마법사들이 우는 낯으로 웃자, 헤일이 소매를 걷었다.
“가늠할 수 없으니, 우선 한번 해보자고.”
“에엥. 한마디로 무지막지하게 때려 넣어야 한다, 이거구만? 가성비 구리네.”
“가성비 구린 건 네놈 위장이고, 베릭. 이안 님은 일정 수준까지만 끌어올리면 회복세가 빨라질 것이다.”
헤일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자,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맞잡았다.
순간, 마법사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절망스러운 가정 하나. 혹, 이안 님이 마력을 영구히 잃어버린 건 아닐까?
오래전, 심연에서 돌아왔다는 반도르라는 자도 그리되지 않았나? 타인의 몸으로 생존하긴 했으나, 어쨌거나 그자 역시 마법사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심연으로부터 말이다.
“저기, 자, 잠깐만요! 대장!”
“여기서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우리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서, 그다음에 해 보는 게 어때요? 혹시 모르니…….”
마법사들이 일시에 헤일 대장의 손목을 붙잡곤 소리쳤다.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이안이 지금 일반인의 몸이라면, 헤일의 마력을 받아낼 수 없다. 되려 독을 몸에 들이부은 것처럼 부작용이 생겨날 것이라.
“괜찮다.”
하지만 이안은 그들의 걱정을 앞서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인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반도르가 심연에서 마력을 잃은 건 다른 이유로 인한 것이었지, 심연 자체가 상실의 원인은 아니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대들이 멀리서부 다가오는 걸 분명히 느꼈다.”
그것만큼 확실한 게 어디 있나? 감각으로 이어져 있는 마법사들이니, 이안은 두려워 말고 어서 힘을 나누어달라 손짓했다.
궐련을 깨문 헤일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금안으로 변했다.
지이잉! 지잉!
솨아아아!
두 사람 주위를 천천히 맴도는 마력의 흐름. 따뜻한 것이 봄바람 그 자체였다.
베릭은 여전히 말 위에서 턱을 괸 채 바라보았고, 마법사들은 두 손을 마주 잡고서 기도했다. 제발, 이안 님에게 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이 없기를.
“아.”
지이잉! 지잉!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헤일의 턱 끝으로 땀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뭔가 잘못됐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에 마법사들이 제 입을 틀어막으며 긴장했다.
“이안 님, 큰일 났습니다.”
“왜 그러지?”
“처음에는 너무 오랜만이라 제가 착각했나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저로는 턱도 없습니다.”
지난 10년, 이안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의 무엇인가가 변했다. 안 그래도 거대해서 혀를 내둘렀던 마력 그릇의 깊이가, 당최 짐작조차 불가하게끔 깊어져 있는 것이다.
이는 헤일이 온 힘을 다 넘겨준다고 해도 어찌 메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안 님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아, 조금. 시원찮구나 싶긴 했지.”
“…가능한 만큼 다 넘겨드리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별 효과 없겠지 싶습니다.”
이안은 작은 제 손을 아무렇지 않게 까딱거렸다. 심연에 다녀온 덕인가, 아니면 이 몸 자체가 신의 것이란 걸 깨달아서 그런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신께서 내려주신 축복인가. 알 수 없었다.
베릭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벌떡 일어나 되물었다.
“효과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데?”
“말 그대로,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뜻이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마력을 담는 그릇의 깊이가 아득해졌어. 회복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거고, 회복한다면-”
회복한다면? 차원이 다른 힘을 보게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마법부 전체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었는데, 이제는 그걸 까마득히 넘어서는 것이다. 헤일로서는 이안의 한계가 얼마나 거대하고 아득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당분간 계속 빈 깡통이라는 거네?”
“자꾸 깡통, 깡통 하지 마! 이안 님 기분 상하셔!”
“뭐가? 이안아, 기분 나빠?”
“그걸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너는 시바, 나한테 예의 안 갖추냐?”
“계급장도 같으면서 웃기네. 꺼져.”
마법사들과 베릭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이안은 희미하게 내면에서 감도는 마력을 느꼈다. 이전에는 정말 텅 비어있었는데, 헤일이 도와준 덕분에 그나마 흐름을 느끼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어느 정도 선까지 회복해야 문제없이 마법을 쓸 수 있을까? 이안이 제 손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자,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어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이안 님, 이제 저희 차례입니다.”
“헤일 대장보다는 적겠지만, 뭐, 십시일반이라는 게 이런 거지요. 보탬이 된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십시일반! 오, 나 이제 그거 잘 알지.”
“이안 님. 받으십시오.”
지이잉! 지잉!
드넓은 들판 위, 일렁거리는 금빛. 이안과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피어오르는 마력의 아지랑이다.
개중, 10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한 마법사는 감회가 새로운지 다시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그때는 이안을 죽음으로 내모는 힘이었지만, 지금은 도와주기 위함이라는 게 감격스러운 모양이다.
집중되는 마력 덕에 천천히, 이안의 금발이 휘날렸다.
“어떠십니까?”
조금씩 땀을 흘리던 마법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도움이 좀 되는지를 묻는 말이었거늘, 이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따뜻해.”
“……!”
“……!”
마법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시에 커지더니, 이내 너 나 할 것 없이 마력을 더욱 힘 있게 개방했다. 따뜻하다고, 싱그러운 녹안을 휘며 웃으시는데, 어찌 자신들이 그만둘 수 있겠나?
마법사들이 무리하는 듯싶자, 이안이 손을 빼어내려고 했다.
“중앙으로 갈 힘은 남겨두는 게 좋겠어.”
“괜찮습니다. 장벽으로 돌아가면 아코렐라 대장이 보내준 마력회복제가 있어요. 가서 이안 님도 드세요. 막 눈에 띄게 좋은 건 아닌데, 효과가 있긴 있습니다.”
“회복제? 증폭제가 아니라?”
“예, 벌써 10년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코렐라 대장, 그동안 사고 좀 거하게 쳤습니다. 하하. 별에 별걸 다 만들었어요. 한번은 지하실 폭발이 너무 크게 일어나서, 마력석관리부에 맨 위층을 줘 버렸답니다.”
그리 말하곤 털털 웃는 마법사의 모습에, 이안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문득 회복제 외에도 무엇이 더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라면 분명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 냈겠지.
마법사들이 걱정하지 말라며 이안의 손을 꽉 붙들자, 이안은 알겠노라 답하며 그 힘을 모두 전달받았다.
지이잉! 지잉!
“허억, 허억…….”
“아이고, 되다.”
“우리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봐? 그치?”
“우리라고 하지 말아줄래? 난, 아직, 괜찮으니까.”
“흐르는 침이라도 닦고 말해.”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해가 조금씩 짙어지는 시간. 마법사들은 들판 위에 대 자로 뻗어 쓰러졌고, 이안만이 한가운데 서 있을 뿐이다. 모두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지만, 상쾌하다는 듯 웃고 있다.
베릭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낄낄댔다.
“이안아, 네가 애들 다 처치한 것 같다.”
“다들 장벽까지 갈 수 있겠는가?”
“예예, 조금만, 조금만 쉬면 됩니다아! 하하!”
“좋단다, 저것들. 에효. 이안아! 이제 마력 개방할 수 있겠어? 여기 있는 애들 싹 다 갈아 넣었는데, 그 정도는 이제 가능하지?”
베릭의 물음에, 마법사들이 고개만 살짝 들어 올려 이안을 쳐다봤다. 제발, 되겠지요?
“…음.”
이안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이안의 주위로 일순 바람이 멈췄다가, 강하게 폭발했다. 짧은 풀들이 시원하게 흔들리며 마법사들의 땀을 단번에 식혀주었다.
지이이잉! 지잉!
“와, 와아아!”
“됐다, 됐어!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안 님! 이제 황궁으로 갈 일만 남았어요!”
“앗싸아아!”
이안의 녹안이 금안으로 반짝이자, 마법사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은 채 들판을 굴렀고, 또 누군가는 베릭에게 덤벼들어 기꺼이 업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안의 마력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했고, 그 힘의 세기 또한 일부 돌아왔음을 간접적으로 짐작한 게다.
“곧 해가 지겠습니다. 이안 님, 우선 장벽으로 가시죠. 다들 날아갈 힘은 있지?”
“진짜 잠깐만요. 조금만, 오 분만!”
“참, 헤일.”
마법사들이 장난스럽게 손을 싹싹 빌어대자, 이안은 베릭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인근에서 아탄족이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던데. 베릭이 진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아 그들과 회담할 것이네.”
“…황궁에서 보낸 해결사가 쟤입니까?”
“오, 젠장. 기대가 하나도 안 되네. 베릭, 너 회담이 뭔지는 알지? 욱해서 싸우면 안 된다? 장벽 넘어가면 균열 천지라서 마력에 예민해.”
“내가 애야?”
티격태격하는 베릭과 마법사를 보던 헤일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북쪽을 쳐다보며 이안에게 일렀다.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장벽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탄족이 인근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 오기 전, 그러니까 이안 님을 뵙기 전 에프디람을 먼저 만났습니다. 러더포드를 찾아 버고스로 넘어간다더군요. 이안 님이 심연에서 돌아오신 것으로 보아, 러더포드도 버고스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긴 합니다. 아무튼, 그쪽으로 간다고 하니 당분간 북쪽 장벽에서 문제 일으킬 소지는 없습니다. 굳이 베릭을 에프디람과 만나게 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 적절할지는…….”
괜히 긁어 부스럼일 수도 있다.
혹여 그 과정에서 이안의 존재 여부가 알려진다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심지어는 이안조차도.
“하나 황궁의 명이라면, 일단 이행하는 게 맞습니다. 혹 지금을 놓치면 베릭이 아탄족 쫓아 버고스로 들어갈 상황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주장에 이안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바로 그거라는 듯이.
“아탄족은 아직 바리엘 안에 있나?”
“북쪽 산에서 목격했으니, 내일 밤중에는 국경을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좋다. 아주 적절해. 헤일, 내일 중으로 다른 걱정은 말고, 우선 아탄족이 있는 곳으로 베릭을 안내하라. 베릭, 너는-”
“나? 왜?”
땡그란 눈을 한 채 손으로 저를 가리키는 베릭.
이안은 그 팔을 단단히 붙잡곤 당부했다. 마치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어른과 같다. 이안이 머리통 하나는 더 작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고 기억해.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지?”